소설리스트

최애캐를 꼬시는 법-189화 (189/312)

〈 189화 〉 히스토리아­2

* * *

히스토리아가 나에게 한 부탁은 그녀의 말 처럼 굉장히 간단한 부탁이었다.

간단한 부탁이라고 해서 실제로 몸만 가볍게 움직이는, 예를 들면 상대 진영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등의 정치적인 의도가 섞인 부탁도 아니었고 아주 평범하고 쉬운 부탁이었다.

"와아..."

지금 내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소녀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 보라색 눈빛, 쉽게 볼 수 없는 색 배치에 당황하는 티를 내지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 꼬마 영웅님이세요?"

"네, 제가 꼬마영웅입니다. 아직은 과분한 칭호라는 생각이 들지만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희 영지에서 꼬마 영웅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부터 엄청나게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소녀의 눈에는 동경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안나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굉장히 흡사했기 때문에 적어도 얘가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루이나, 자기 소개 부터 해야지."

"아, 반가워요! 저는 히스토리아님의 휘하에 있는 루이나라고 합니다! ... 보직도 말해야 할까요?"

"말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네가 우리 세력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정도는 만천하에 알려질테니까 말이야."

"히스토리아님의 세력에서 참모를 맡고 있어요."

루이나, 참모.

그 두 단어를 들은 순간 나는 그녀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히스토리아의 두 머리 중 하나.

자신의 주군인 히스토리아가 사특한 혀를 쓰는 모략에 특화되어 있다면 루이나는 정석적인 외교에 특화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서로 정치 성향이 다르다 보니 좀 티격태격 거릴 만도 한데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싸움이 났다는 말은 수많은 플레이 중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난세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는 히스토리아의 두 머리 중 하나인 만큼 그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 플레이 성향상 서부는 거의 들르지 않아서 후반에 가야지 히스토리아와 맞붙는데 그 시점에서 루이나는 성장을 완전히 끝내서 미모의 누님이 되어 있으니까.

난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캐릭터의 모습이 조금씩 수정되는 게임이다.

나이가 어린 편인 에이스와 안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고 있었고 심지어 라이넬이나 미네타 같은 내 최측근들도 아직 성장기다 보니 키가 커지고 체형이 변하는 등의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루이나는 지금 시점부터 몇년동안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라는 캐릭터기 때문에 내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체를 유추할 수 없는 것이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참모라... 그런 분이 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는지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셨잖아요? 아직 어린 나이에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 한 번 대면하고 싶으셨어요."

"너무 고 평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영웅이라는 말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니까요."

"맞아요."

루이나가 나를 바라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영웅이라기 보다는 간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분이시죠."

당황스러운 말이긴 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작은 미소만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 봤다.

"간웅이라니요? 왜 그리 말씀하시는 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얼굴에서 야망이 보여요. 그 야망의 크기가 너무 커서 어떤 것을 꿈꾸고 있는지는 제가 감히 알 수 없지만 제국과 황제님께 충성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당신의 얼굴에 야망이 담겨 있다는 건, 곧 간웅이라는 뜻이겠죠."

예리한 꼬맹이네.

'역시 히스토리아의 두개의 머리 중 하나인가?'

잘 숨기고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루이나님의 추측은 굉장히 재밌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진심으로 제국에 충성하는 황실파입니다. 모함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모르쇠로 잡아때겠다는 거죠? 흥, 오히려 좋아요. 제가 그토록 만나고 싶던 꼬마 영웅님이 이렇게 야망이 많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것 만으로 이번 만남의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으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하시지만 저는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목표는 황제폐하의 권력을 다시 하늘 위에 올려 놓는것, 그 뿐입니다."

루이나는 내 말은 절대 믿지 않겠다는 듯 나를 올려다 봤다.

옆에 있는 히스토리아 조차 내 얼굴에 서린 야망같은 건 읽지 못했다는 듯이 갑자기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좋아요. 알아서 하세요."

루이나가 자신의 여린 팔을 팔짱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신 한가지만 명심해 주세요. 꼬마 영웅님이 황실파든, 아니면 스스로 세력을 일구고자 하는 야망가든,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저희 세력을 꺾어야 한다는 거 말이에요."

어린애가 눈빛이 얼마나 사나운지.

맹금류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줄 알았다.

"이 정도면 히스토리아님이 말한 가벼운 부탁 정도는 다 들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제 돌아갈거야?"

"이제 돌아가 봐야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만은 없으니까요."

"제도의 밤은 남자 혼자서 걷기엔 위험한 곳이야. 그건 제도에서 오래 산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일반 적인 남성에게 제도의 밤은 위험한 곳이 맞았다.

아주 오래전에 하이네스가 제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려 주겠다면서 나를 납치하는 척 한 적도 있지 않던가 일반인, 특히 나같이 잘생긴 남자한테 제도는 상당히 위험한 곳이 맞았다.

'딱 훈장을 얻기 전까지만 말이야.'

은급 훈장을 달고 있는데 누가 덤비겠어.

"호위를 하나 붙여줄게."

내가 제도를 거니는 데 아무런 위협도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호위를 붙여주겠다는 말은 호위를 통해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캐내고 싶은 정보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그냥 호의로 달아준 거 아니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히스테토리아가 호의같을 걸 쓰겠냐고.'

당장에 거부하고 혼자서 돌아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지만 겉으로는 호의를 가장하고 말하고 있으니 마냥 거부하는 것도 힘들었으며 나 역시 그녀에게 캐내고 싶은 정보가 없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해야 겠지?

그녀도 내가 호의로 거절한 것 정도는 알테니 아마 다시 한 번 제안을...

"그래, 남자 입장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호위 기사와 같이 움직이는 것도 불편할 수 있겠지, 그러면 어느 정도 안면을 튼 내가 같이 따라가는 것은 어때?. 대단한 기사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익스퍼드의 경지에 올랐으며 너도 알다시피 이름값도 대단한 여자지. 나랑 같이 다니면 절대로 위험한 일은 없을거야."

그래 위험한 일은 없겠지.

누가 감히 우리 히스토리아 님을 건드려고 하겠어?

대신 히스토리아랑 아이데스가 같이 지나다녔다고 온 제도에 소문이 쫙 퍼지겠지.

그리고 나는 황녀한테 끌려가서 왜 히스토리아랑 같이 돌아다녔냐면서 엄청나게 까일 것이 분명했다.

개방된 공간인 제도에서 군주가 다른이와 걸었다는 사실이 공개 된다는 것은 정치적 파장이 굉장히 큰 상황이었다.

둘 사이가 무슨 사이냐. 동맹 아니냐,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고 하필 그 중 하나가 플레아 아이데스 같은 미소년이라면 열애설까지 뜰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직위에 올라갈수록 외부활동을 할 때는 자신들의 수하하고만 움직이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런데 뭐? 나랑 같이 제도를 거닐자고?

자신의 이름값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히스토리아가 미쳐가지고 진짜로 나랑 같이 쎄쎄쎄 하면서 돌아다니고 싶거나, 호위를 붙여준다는 본래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서 얼토당토 없는 제안을 했거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후자가 무조건 맞는 상황이었지만 히스토리아가 워낙 미친 인간이다보니 본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혼자 가도 됩니다."

"안돼, 꼭 나랑 같이가."

히스토리아의 눈에는 매우 강력한 단호함이 차 있었다.

'진심이구나.'

좆됐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