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프로트라인1
* * *
몽환의 용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마법까지 끊긴 것은 아니었다.
강이 급격하게 불어나는 마법은 몽환의 용이 일으킨 마법이 아니라 진짜로 자연이 만들어 낸 마법이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애들의 쌀쌀맞은 눈빛을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즐겁게 웃으면서 잘 준비를 했을 텐데 내가 잘 곳과 자기들이 잘 곳을 멀찍히 두고 나를 배척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장난이 심했구나 싶긴 했다.
'그래도 몽환의 용을 완벽하게 속이려면 이 수밖에 없었어.'
시에린은 걱정할 것이 없다. 걔는 거짓말 잘하니까.
라일라랑 안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연기력이라면 충분히 몽환의 용을 속여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용병들은 어차피 내 수하들이 아니니 몽환의 용을 상대로 한 사기극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치면 라이넬과 미네타가 남았는데 얘네가 문제였다.
라이넬은 거짓말을 상당히 못해서 미리 작전을 알려줬다면 발목을 잡았을 확률이 너무나 높았다.
미네타는... 얘가 좀 애매했다. 될 것도 같고 안될 것도 같았는데 확실하지 않으니 그녀에겐 이야기 해줄 수 없었지.
물론 이둘만 빼놓고 다른 애들에게는 작전을 말해주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해도 됐겠지만 그랬다가는 라이넬한테 진짜 한대 맞았을 확률이 높았다.
'주먹으로 때리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하나 관절기를 당했겠지.'
대충 99% 정도의 확률로 벌어졌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작전을 숨겼다.
아마 애들도 내 마음을 알고 있어서 이 정도선에서 끝내주는 것이지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비오는날 먼지나도록 맞았을 지도 모르지.
'물론 지금 비는 안오지만.'
아무튼 오늘은 다른 일행들에 비해 멀찍히 떨어져서 잤다.
애들이 나 싫다고 멀리서 자라는 데 가까이서 잘 수는 없잖아?
***
날이 밝은 다음에도 여전히 쌀쌀 맞았다.
강을 건너고 길을 한참을 걸을 동안 애들은 라아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끼리는 잘만 이야기 했으니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얘들아. 미안하다!"
결국 점심시간에 바닥에 머리까지 박으면서 사과를 박자 애들이 뭐 그렇게 까지 하냐면서 극구 말려서 그제서야 굳었던 분위기가 풀릴 수 있었다.
'다행이다.'
성에 도착할 때 까지 이 상태일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애들도 나한테 화난 게 아니라 단지 삐진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금방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같이 맛나게 점심을 먹은 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스으읍, 영지가 넓기는 엄청 넓네요."
"넓은 땅이 다 쓸모 없는 땅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참 좋은곳이에요."
"크기만 하고 쓸 데 없다는 말을 돌려하시는 거죠?"
그렇게 까지 말할 건 없는데 말이야.
요즘들어 라일라가 자꾸 독설가 기질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프로트라인 자작령에 들어온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성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걷고 있다고요."
"그래도 조금 더 가면 성에 도착하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요."
안 그래도 저 멀리에 성이 보이는 참이었다.
마땅한 특산물도 없고 땅도 험한 곳이 프로트라인 자작령이었지만 그래도 성 만큼은 자작이 사는 곳인 만큼 그 크기가 상당히 컸다.
"제 눈에도 보이네요."
라일라가 베에 하고 혀를 내민 후 걸음 속도를 높여서 시에린의 옆에 붙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프로트라인 자작, 이라고 하면 아마 잘 감이 안 올 수도 있을텐데 위대한 기사인 나마흐의 제자라고 하면 감이 좀 오려나?
나를 제자로 삼으려 했던 나마흐를 프로트라인 자작령에 보내고 거의 사제 관계를 맺었으며 지금은 이미 황실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중앙과 거리가 있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지방파 귀족들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황녀님이 막 관심을 가지는 참이라고 할 수 있지.
'이번에 정식으로 나마흐와 사제 관계를 맺는 다면 황녀의 지원을 무시무시하게 받게 되겠지.'
나도 나름 황녀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프로트라인은 그 결이 다르다.
나는 아무런 기반 세력 없이 제도에서 돌아다니는 세력가 비스무리한 무언가일 뿐인데 프로트라인은 활용가치가 엄청 높지는 않아도 나름 남부에 든든한 세력을 일구고 있는 자작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자작대리긴 한데 그녀의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지도 벌써 1년 가까이 된 데다가 다른 후계자도 없기 때문에 그녀가 프로트라인의 자작이 되는 시점은 그렇게 먼 시점이 아니다.
때문에 황녀 입장에선 프로트 라인을 중히 쓸 수 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 밀어줄 수 밖에 없었다.
난세에서는 황녀의 지원을 받은 프로트라인이 황실파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고.
이런 대단한 세력이랑 나는 미리 맹약을 맺어둔 것이다.
저번에 황실연회에서 제국에 충성하는 자로서 맹약했다.
서로 위험에 처한다면 도와주기로,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상 동맹과 큰 차이가 없는 관계였다.
프로트 라인은 자기가 잘나간다고 예전에 했던 맹약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마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언젠가 한 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천천히 걸어서 성문 앞에 도착하니 병사들이 우리를 검문하기 전에 기사로 보이는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아이데스 상단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네. 아데스 상단의 사람들입니다."
"저희 영주 대리님이 귀빈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오시죠."
역시 동맹이라서 그런걸까? 다른 곳과는 대우가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라이트가 있는 리쿠르트에서도 상대쪽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대접하는 일이 없었는데 프로트라인은 그걸 해준 것이다.
'물론 언제 갈지 말 안하고 갔던 리쿠르트랑 다르게 프로트라인에는 언제쯤 도착할 건지 미리 전달해 놓긴 했지.'
그 시점이 오늘 오전이었기에 대충 8시간 정도 늦게 도착한 것인데 온다고 했던 사람이 8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프로트라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할만 했다.
기사의 안내를 따라서 성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바로 프로트라인이 있는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 과정에서 안나는 물건 팔러 가고 다른 4명의 가신들만 함께했었는데 이것도 상대가 프로트라인이라서 다 데려가는 것이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면 가신들을 데려가지도 않았을거다.
"영주대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하네요."
어제 자연마법만 안 일어났어도 훨씬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끼이익
영주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프로트라인이 손님석 쪽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찾아갔던 사람 중 대부분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오셨습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그 사이에 키가 큰 걸까? 분명 저번에 만났을 때는 나보다 머리 3개 정도 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4개까지는 아니더라도 3개 반 정도는 더 클 것같은 미친 크기를 자랑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이 아플 정도라서 자연스럽게 뒤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다가 갑자기 자연마법이 발생해서 강에서 막혀버렸습니다."
"아, 그런 이유때문이었군요. 너무 안오시는 것 같아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혹시 안 오시는 건 아닐지 걱정했습니다."
이 사람 말 주변이 없다.
"뒤에 계신 분들은 수하분들이시죠?"
"네, 연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으시죠?"
"네, 한 분을 제외하고는 안면을 튼 것 같네요."
그녀가 앉지 않으니 우리 모두 멍하니 서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기사가 헛기침을 하면서 그녀에게 눈치를 줬다.
"커흡, 손님 커흡 자리..."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기사의 눈치를 들은 프로트라인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해줬다.
"아무튼... 이렇게 저희 성에 방문하신 걸 정말 환영합니다."
환영이요?
여기가 놀이 동산이야?
어째 알면 알 수록 맹한 것 같다?
"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그녀의 짧은 네 한마디에 놀랄만큼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있는 프로트라인을 보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사람 나랑 같은 과구나.'
낯 가리고 사람이랑 친해지지 못하는 게 너희 찐따냐고 하이네스한테 욕먹었던 과거의 우리를 보는 듯 했다.
나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군주를 꿈꾸는 인간인데다가 프레스티아를 상대하다보니 찐따같은 성격을 천천히 줄여나간 반면 그녀는 아직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앉아있을 수 만은 없으니 먼저 입을 열려할 때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나왔다 제자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