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레베나 카르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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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스킬로 미션 여러개를 스킵하고 레베나 카르텔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도수가 높은 알코올 향이었다.
알코올에는 면역이 전혀 없는 내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높은 도수의 향에 정신 어질어질해 지는 듯 했다.
'그렇다고 진짜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알코올에 대한 내성은 지력 수치가 높아지면 같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내 지력 수치는 50을 넘은지가 오래이니만큼 직접 마시는 것도 아니고 향만 가지고 취할리는 없겠지.
"아래로 내려가면 돼오."
"알겠습니다."
이곳은 레베나 카르텔의 실체를 숨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단순히 도수 높은 술을 파는 곳으로 위장해 경비대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속임수였는데 나는 이미 암호를 대고 들어왔기 때문에 바로 레베나 카르텔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구역에서 왔소? 이 근처에선 당신 같이 쬐만한 조직원을 본 적이 없는데?"
"멀리서 왔어."
멀리는 멀리지, 무려 제도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나무로 된 문을 열자 수많은 여자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곳은 깔끔하게 술만 마시고 어떤 곳은 도박판까지 벌어지고있는 모습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그녀들은 입구에서 들어온 나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이곳은 레베나 카르텔에서 어느 정도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쉼터에 불과했으니까.
'여기서 한 층 더 들어가야 카르텔의 주요 인물들이 있는 구역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한 층을 더 들어가야 레베나를 만날 수 있다.
결국 두 개의 층을 뚫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미 이곳에 들어온 이상 레베나를 향한 최소한의 충성은 이미 확인 됐다는 뜻 다음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자신의 능력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았지만 그 중 가장 쉬운 것은 돈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
돈이 많다.
이는 곧 능력의 증거가 아닌가.
따라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레베나 카르텔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 상당한 양의 돈을 소모하게 된다.
지하 1층에서 지하 2층으로 가는 데에는 큰 돈이 소모되지 않지만 2층에서 레베나에게 독대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재화가 소모되거든.
'그런데 여기서 또 스킬이 들어가지.'
내가 난세를 하면서 카르텔에 들어온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당연히 돈을 더 적게 소모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고 결국 그 방법을 찾아냈다.
"아지매, 나랑 체스한 판 두지?"
내가 아지매라 언급한 여성은 그렇게 나이가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많아봐야 나보다 10살 위 정도?
내 나이가 아직 17살 밖에 안됐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창창한 나이인 셈이었다.
어딜가도 아가씨 소리 들을 나이인데 로브를 꾹 눌러쓴 수상한 인물이 자신을 아지매라 칭했으니 말은 안해도 속으로는 열불이 꽤 날거다.
"체스? 내가 체스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녀가 분노를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혼술을 즐기듯 위스키 한병을 홀로 들고 컵에 담아서 마시고 있었는데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강한 술향이 확 풍겼다.
"그냥 체스는 좀 그렇고 내기 체스 어때?"
"내기를 걸자고?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말을 하는 거야?"
"네가 누군지가 중요해? 뭐가 걸렸는지가 중요하지."
상대는 레베나의 심복 중 하나인 레나라는 여성이었다.
레베나를 따른 다는 마음으로 이름까지 레나로 개명한 여성은 레베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이 여자를 공략하면 레베나로 향하는 길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다.
물론 돈도 덜 들고.
"그래, 뭘 걸 건데? 나는 낮은 금액은 안받아."
"내가 이기면 나를 레베나님과 독대시켜줘."
레나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녀가 평소에 레베나에게 얼마나 깊은 충심을 보여주고 있는 지를 생각하면 내가 방금 한 말은 정말 싸가지 없이 들릴 것이 분명했다.
"네가 누군데 너를 레베나님과 독대 시켜줘야 하는 거지?"
"아까 말했잖아.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뭐가 걸려 있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네가 졌을 때 그만한 대가를 지불 할 수 있나?"
"나 자신을 걸겠어."
여기선 약하게 나가면 안된다.
아예 화끈하게 나 자신 정도는 걸어줘야 레나가 '얘는 최소한의 신념이라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내기를 받아 준다.
자기 주인을 만나기 위해선 목숨 정도는 걸어야 인정해 주는 걸 보면 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을은 나였으니까.
"너를 걸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지면 네 노예가 된다는 뜻이잖아."
"그래,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어야 레베나님을 만나고 싶다 말할 수 있는거다."
레나가 체스판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깔았다.
"내 실력은 알고 있나?"
"세번째 말하고 있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내 노예가 될 거라는 게 중요한 거지."
레나가 음산하게 웃으며 체스말을 세팅했다.
"먼저하겠나?"
"아니, 네가 먼저 해."
레나는 체스를 정말 잘한다.
아마 난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에서도 100위 안에는 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방법이 있었다.
'내가 너를 한 두번 상대해 보는 줄 알아?'
난세에서 그녀를 상대 해본 게 백번이 넘었다.
게임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똑같이 응수하면 그녀는 늘 같은 수를 뒀고 항상 무난하게 이길 수 있었다.
만약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래도 상관없어.'
지금까지 많이 연습해서 순수한 내 실력도 더욱 상승했으니까.
탁!
레나의 손이 거칠게 움직였다.
***
"... 졌다..."
승부의 결과는 당연히 나의 승리였다.
레나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확실하지 않은 것에 승부를 걸지 말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당장이라도 내가 그녀의 노예가 될 것처럼 나를 대하던 그녀의 태도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녀가 수를 두자마자 바로바로 응수해서 레나를 압박했으니까.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승부를 걸지 말라고?
"확실하니까 승부를 걸었겠지?"
"... 내 생각보다 더 뛰어난 고수였군..."
"그래서, 약속은 지킬 거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레베나님께 이야기는 해볼테니."
레나가 확실치 않다는 투로 이야기 하긴 했지만 레베나라면 자신의 충직한 심복인 레나가 패배했다고 하는 데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라도 나와의 만남을 승인해 줄 확률이 높았다.
'만약 안나오면... 좀 더 돌아가긴 해야 겠네.'
다만 이 경우에도 레나가 나와의 내기에서 져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니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0분 정도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별의 별일이 다 있었다.
테이블 단위로 싸우다가 주인장한테 끌려나가기도 하고 바닥에 토를 했더니 토 한 사람의 옷으로 바닥을 닦는 진풍경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사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봐 형씨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서 왔어?"
그녀의 덩치는 상당히 컸고 또 상당히 험상궃게 생겼는데 나름 이곳에서 힘을 좀 쓰는 사람인지 이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멀리서."
내가 작게 한 마디 하자 주변의 분위기가 훅하고 달아올랐다.
'음성변조라도 할 걸 그랬나?'
체형은 숨기기 쉬워도 목소리를 숨기려면 아티팩트를 따로 사야해서 그냥 온 게 화근인 모양이다.
내 목소리만으로 로브와 가면안에 있는 내 모습까지 전부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엄청난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뭐야 오라버니였어? 남자가 혼자서 이런데는 무슨 일로 왔어?"
"네가 알 거 없잖아. 꺼져."
목소리를 착 깔고 말하니 여자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크으, 짜릿하군."
'미친년...'
아무래도 마조끼가 있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더 소란스러워 질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레나가 밑 층에서 올라왔다.
"뭐하고 있냐?"
"아, 레나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수고해라."
그녀는 올라오자마자 현 상황을 눈치챘는지 한숨 한 번 푹 쉬고는 내 손목을 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뭐야, 레나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다! 멍청한 년들아!"
그녀가 크게 호통쳤음에도 여자들은 낄낄대며 웃을 뿐이었다.
그런 여자들의 모습이 익숙한지 레나는 한숨 한 번 깊게 쉬고 아래로 내려갔다.
"레베나님과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래, 레베나님이 친히 너와의 독대를 허락해 주셨다."
"말은 제대로 해야지. 정당한 내기를 통해서 얻은 거였잖아. 선심쓰듯 말하면 안되지."
"... 하아..."
레나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층을 내려온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한층을 내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