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남부로!1
* * *
활달하게 출발하긴 했지만 마차의 이동속도는 굉장히 느렸다.
무거운 짐들을 가득 싣고 있었기도 했고 용병들의 걸음 걸이에도 맞춰야 했기 때문에 평범하게 걷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그 덕에 진동도 훨씬 덜했다.
'잠이나 좀 잘까?'
유니콘의 대가리를 받혀주고 있는 동안 쪽잠을 자긴 했지만 편한 자세에서 푹 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의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어제 유니콘이 나타난것도 졸려서 좀 자려던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었던 만큼 갑자기 피곤함이 훅하고 밀려왔다.
"나 잠 좀 잘게. 마을 도착하면 깨워줘..."
그렇게 눈을 잠깐 감았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흔들었다.
"으으... 마을 도착하면 깨워달라니까..."
누가 장난 치는 거라는 생각에 몸을 움츠렸지만 나를 흔드는 손길은 더 강해질 뿐이었다.
"으으... 왜 그래..."
눈을 끔뻑끔뻑 뜨니 라이넬이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도착했어. 일어나."
"뭐? 벌써 도착했다고?"
이건 라이넬의 장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는 데 확실히 마을의 모습이었다.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건물도 많이 세워져 있는 분명한 마을이었다.
'쉑.... 분명 눈만 잠깐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아무리 피곤했어도 시간이 이렇게 까지 빨리 간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
"와... 눈 감았다가 떴는데 도착해 있네... 나 진짜 피곤했나보구나..."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는데 미네타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네타? 갑자기 왜 그래? 누가 보면 찔리는 거라도 있는 줄 알겠어?"
"찌...찔리다니? 그런거 없어!"
"진짜로 없어?"
"어! 없어!"
얼굴도 붉어져 있고 눈에는 당황이 차 있는 걸 보면 분명 뭐가 있는데...
'군주된 자로서 수하의 수치를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나한테 말해야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미네타가 나한테 먼저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면 말해 줬겠지.
"없기는 무슨, 네가 플레아 푹 자라고 슬립 마법 걸었잖아."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구만?
피로에 더해서 마법으로 깊게 재워버렸으니 눈을 감자 마자 뜬것 처럼 느껴지지.
"말하면 안 될이유 있어? 네가 잘 못한 것도 아니잖아."
"... 시에린 너무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조용히 선행을 하고 싶었나 보지."
라이넬이 작은 목소리로 시에린에게 말했다.
"고마워 미네타."
밝게 웃으면서 미네타를 치하해 주니 미네타의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큼큼."
우리끼리 놀고 있는 모습이 질투가 났던 걸까?
안나가 헛기침 하며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기서 물건을 좀 채우고 갈거에요. 마을 특산품 위주로 채울 거긴 한데 협상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 각자 알아서 노시면 돼요. 시에린 언니만 저를 따라와 주세요."
"너 아직도 남이랑 말 잘 못하니?"
"이젠 좀 할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제대로 협상하려면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앞에 나가있는 게 나아요."
'나는 잠이나 좀 잘까?'
그런 생각으로 의자에 축늘어졌는데 마법으로 아주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서 인지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앤간한 상황에선 다 잘 수 있는 것이 나였는데 그런 나조차 잠이 오지 않다니, 역시 마법은 마법인 듯 싶었다.
"나랑 같이 마을 구경할 사람?"
내 말에 정적이 돌았다.
생각해 보니 나만 편하게 자고 왔지 다른 애들은 유니콘때문에 야영하고 여기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걸어왔다는 걸 떠올렸다.
분명 많이 피곤할텐데 괜히 더 피곤하게 애들을 데리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지.
"다들 피곤하려나... 그러면 나 혼자 돌아다닐게."
"아냐, 나도 따라갈게."
그러고는 바로 라이넬이 뒤 따라 붙었는데 왠지 미안해 져서 다시 마차에 앉았다.
"마을 구경 가려고 한 거 아니였어?"
"갈려고 했는데 네가 피곤한 것 같아서 참으려고, 나는 수하들 피곤하게 만드는 군주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마을 구경하는 게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별로 안피곤 한데..."
"거짓말 하지 말고 푹 쉬셔요."
용병들은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 있었지만 내 수하들은 마차에 기대서 쉬고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애들과 다르게 나는 쌩쌩했기 때문에 내 자리를 다른애들에게 양보하려 했다.
"나는 서 있어도 되는 데 내가 앉던 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 있어?"
"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일라가 빠르게 손을 들었다.
기사인 라이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 걸 보면 어지간히 앉아있고 싶었던 모양이다.
"네, 그러면 앉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밑으로 내려가니 라일라가 빠르게 일어나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하흐... 따뜻한 온기가 기분이 좋네요."
저렇게 보니까 왜 저렇게 변태갔지?
어제 굳이 내 동정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사내놈이 남겨놓은 온기에 몸을 떨면서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라일라에게는 확실히 변태끼가 있는 듯 했다.
'다 감수하고 갈 사항이지.'
수하 성격 이상한 게 한 두번이 아니고...
막말로 내 여동생인 플린은 크면 남자 엄청 밝힌다.
난세에서는 그나마 여자여서 큰 소문이 안났지만 지금은 망나니라고 소문이 쫙 퍼지지 않을까 걱정됐다.
아무튼 바닥에 앉아서 마차에 기대고 있으니 파란 하늘이 상공에 펼쳐져 있었다.
아직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파란색의 하늘이 왠지 더 춥게 느껴졌다.
'겨울이 끝나면 전쟁이 오려나.'
전쟁이 당장 벌어지진 않는다.
아카데미가 개강을 하고도 한 달은 지나야 북부에서 아이작이 내려올 테고 중앙파 특유의 늦은 처리 방식 때문에 전선이 밀릴 대로 밀린 상태에서 지방파 귀족들이 투입되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프레스티아는 눈부신 활약을 할거야.'
그냥 눈부신 활약이 아니고 아주 미친 활약을 할거다.
아이작의 침공을 막아낸 강력한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거지.
아이작은 해내지 못한 개선식의 선봉으로 걸어 제도로 들어올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녀의 전성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녀의 밑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인재들이 그녀의 밑에 속속히 들어올 것이다.
황제가 자신에게 하사한 영지에서 헬링가의 세력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력을 키울 것이다.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그녀를 지배하기 위해선 그녀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일구어야만 했다.
'당연히 따라가야지.'
나에게 프레스티아는 이제 단순한 최애캐가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 어투, 성격,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쾌감을 줬다.
누가 들으면 마조히스트 변태로 들리겠지만 내가 그녀에게 욕을 먹는 상황이 좋다는 게 아니라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좋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이 세계에 던져진 나에게 그녀는 내가 달려갈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군주가 되고자 결심하지 않았을 것이며.
황제가 되고자 꿈꾸지도 않았을 테니까.
"다들 일어나세요! 물건 옮겨 담아야죠!"
혼자서 깊은 사색에 빠져 있을 때 안나의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옆에는 축처져 있는 시에린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협상과정이 상당히 격렬했던 듯 보였다.
용병들이 빠르게 움직여서 물건들을 옮겨 담았다.
시에린과 안나는 축저질 정도로 힘들게 협상을 한 탓인지 물건을 나르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우리 중에서 가장 몸이 튼튼한 라이넬이 양 어깨에 상자 하나씩을 올려가며 물건을 날랐고 미네타 역시 여자는 여자인듯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가볍게 들어날랐다.
'쟤는 그냥 마법을 쓰면 되지 왜 잘 쓰지도 못하는 몸을 쓰고 있는 거여?'
마법사라서 귀한 몸이라 이런 잡일에 마법을 쓰지 않는 설정이면 몸도 움직이지 말아야지 왜 저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일라, 너는 안 움직일거야?"
"내가 몸이 약해서."
"하긴 딱 보기에도 약해 보이긴 한다. 플레아랑 싸워도 질 것 같이 비실비실해 보이는 데?"
자기가 일하기 싫어서 몸이 약하다고 해놓고 자기 몸 욕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는지 라일라의 눈빛이 따끔하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왜? 네가 약하다고 해서 맞장구 쳐준 것 뿐인데? 불만있어?"
라일라가 눈을 치켜세워서 시에린을 한 번 노려보고는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두고 봐."
그러고는 상자하나를 온몸으로 힘겹게 들었는데 내가봐도 자세가 엉망이었다.
'저렇게 들다가 허리 나가지.'
"꺄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라일라가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용병들이 다가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그냥 갑자기 힘이 들어가서 근육이 놀란거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허리가 많이 아픈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때문에 이후 움직일 때는 라일라를 빈 자리에 앉히는 걸로 결정이 났다.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제... 제가 든 게 우연히 무거운 상자였을 뿐이에요!"
누가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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