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삼고초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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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차게 까였다.
계속 앉아있는다고 내 제안을 수락할 것 같지도 않아서 이레아 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와집을 빠져나왔다.
미쳐 쓰지 못한 가면속의 내 얼굴을 본 이레아한의 입이 살짝 벌어진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큰 문제 없겠지.
어차피 어디가서 소문을 낼 법한 작자도 아니고.
'라일라 이년, 튕기는 거 봐.'
한 번에 들어오면 자존심이 상하는 건지 자기도 내 세력에 들어올 마음이 있으면서 안 들어온다고 잡아때는 모습이 상당히 꼴사나웠다.
설령 내 세력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다 하더라고 이 좁은 시골마을을 벗어나려면 나를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을텐데 계속 안간다고 우기는 걸 보면 자존심을 지키고자 밀당을 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녀가 필요한 건 나였으니까.
'괘씸하다고 영입을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녀의 지력 잠재력은 100에 달했고 지금 시점에서도 지력이 89나 되는 엄청난 인재였으니까.
89라는 수치는 기사로 따지면 소드 마스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만큼 뛰어난 인재라는 뜻이고 그만큼 희소하기도 하지.
'무관은 넘쳐나도 문관은 부족한 난세의 특성상 지력 100이라는 미친 인재를 놓친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되기도 하고.'
처음 방문한 오늘 저렇게 대차게 까는 걸 보니 한 두번 더 오는 걸로는 어림도 없어 보이고 앞으로 꾸준히 방문하다가 상단이 도착하면 나도 마지막이라는 티를 팍팍내고 도전해야 할 듯 싶다.
한 번만 더 밀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밀당한답시고 더 밀지는 않겠지.
제대로 말도 못해보고 까이긴 했지만 괜찮다.
이미 첫 단추는 뀄으니까.
"얘기는 잘 마치고 온겨? 나으리가 뭐라고 하시디?"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온거에요. 앞으로 며칠 정도는 여기에 머무를 건데 마을에서 가장 높으신 분께 인사는 드려야죠."
"그냥 인사만 드렸다고 하기엔 표정이 굉장히 후련해 보이는디?"
눈치가 빠르시네.
"이레아 한님은 황실파의 선배님이시니까요. 얘기로만 듣던 선배님을 직접마주하니 기뻐서 그래요. 한님에 대힌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제가 더 도울일 없어요."
"읎어. 이미 다 했잖혀."
"아쉽네요."
속에는 전혀 없는 말을 하며 차분히 걸었다.
***
처음 라일라를 만난 날 부터 매일 한 번씩 라일라의 별채에 찾아갔다.
이 세계가 남녀역전 세계가 아니었다면 남자가 하루에 한 번씩 여자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겠지만 남녀역전으로 관대해진 사회에선 이 정도는 큰문제 없었다.
이레아 한도 라일라를 어떻게든 독립시키고 싶었는지 내가 갈 때마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었다.
"또 오셨습니까?"
"이제는 익숙치 않으십니까. 매일 찾아오는 데 말이죠."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린들 아이데스님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시니까요. 그런 약소한 세력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라일라가 내 제안을 반대하는 이유도 처음에 비해선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스승님의 뜻대로 제국에 충성하는 이의 밑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도 변명을 하더니 차차 내가 약해서 들어가기 싫다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쪽에 훨씬 설명하기 간단한 이유가 내가 반박하기도 힘든 이유니 만큼 처음부터 내가 약하다는 걸 강조하면 됐을 텐데 왜 굳이 처음에 다른 이유를 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라일라님을 영입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오신거죠? 혹시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러 오셨나요? 아이데스님의 세력에 들어가긴 싫지만 아이데스님처럼 잘생긴 미소년과 데이트를 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아니요. 내일 이 마을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라일라가 눈을 얇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느냐는 듯 담담한 눈초리였지만 속으로는 엄청 당황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표정관리를 잘해서 겉으로 들어나지 않을 뿐 이제 밀당을 끝낼 때가 왔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테니까.
'지금 영입한다고 하면 아마 받아들일거야.'
그러면 내가 지고 들어가는 거지.
내가 더 불리한 상황에서 협상에 들어가면 라일라에게 지불할 재화나 서비스의 양이 늘어나게 될테니까.
"그래서요?"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지금까지 방해해서 죄송했고 앞으로는 편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바로 일어나니 라일라가 차분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언제 가실 예정이신가요?"
"내일 오후 2시면 떠날 듯 합니다. 그러면 이만, 다음에 연이 닿으면 만나죠."
라일라가 갑자기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말하기 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금 협상테이블을 올리는 것 보다는 내일 급하게 따라온 라일라에게 협상을 벌이는 편이 나에게 훨씬 유리할 테니까.
뒤에서 나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봤지만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라일라가 안 따라오면 어떡하지?'
감히 나한테 밀당을 걸어? 나를 밀었다 이거지? 그래 밀려서 평생 안 다가가주마 하면서 안찾아오면 그건 그것나름대로 문제였다.
마차의 머리를 돌려서 다시 라일라를 영입하러 가야 하는 데 그러면 일단 내가 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그래도 어지간하면 따라오겠지. 당장 나를 따를 생각은 없다고 하더라도 내 맨얼굴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라일라의 표정은 내 머리에 명확하게 남아있으니까.
아무리 내 세력이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세력을 구하는 동안 체류하기에 우리 세력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딨어.
다음 지붕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와중에 이런 미소년을 매일 볼 수 있으면 나라도 당장 들어가겠다.
'진짜 문제는 라일라를 완전히 꼬득이는 거지.'
내 외모라는 미끼로 라일라를 낚았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 야망과 실력을 라일라에게 보여주고 그녀에게 충성을 얻어내야 했으니까.
라일라는 난세의 대표적인 철밥통 캐릭터였기 때문에 한번 제대로 영입해 놓으면 배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엄청 박하게 굴어도 투정만 많이 하지 절대로 군주를 배신하지 않는다.
군주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프레스티아 같은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면 진짜 무서운 전략가가 된다.
실제로 플레이어가 라일라를 선점하지 않으면 헬링가쪽으로 가장 많이 가기도 하니 두 사람의 시너지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지.
프레스티아 정도로 잔혹한 사람의 밑에서도 멀쩡히 군략가를 하는 캐릭터니 만큼 나같이 온건하고 착한 군주의 말을 듣지 못하겠다고 세력을 빠져나가는 일은 없겠지.
***
시간이 지나서 아이데스상단의 마차가 다시 마을에 도착했다.
마차에있던 생필품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파는 동안 애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디 다친데는 없지? 마을 사람들이 너를 끈적한 눈빛으로 보진 않았어? 강제로 끌려갔다거나 한적은 없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런 일 일어난 적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셔."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한테 네 얼굴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저지르거나 하진 않았지? 조금 조사를 해보니까 저 기와집에 대단한 사람들이 살고 있던데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한것도 그것때문아니야?"
역시 시에린 애가 눈치가 참 빨라요.
"그것 때문이긴 하지. 영입해야 할 인재가 있었거든."
"유배중이신 이레아 한님을 영입하려고 온 건 아닐테고 제자를 영입하러 온거야?"
"어, 그 제자가 아주 대단하신 분이시거든."
"그래서 그 대단한 제자분 영입엔 성공했어?"
라이넬이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밀당만 한참하다가 오늘 간다고 통보한 게 어제거든, 2시에 떠난다고 말했으니까 그 때가되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안 오면 버리고 가는 거야?"
"천만에, 당장 라일라님한테 가서 머리 박고 빌어야지 제발 따라와 달라고."
"크윽 플레아가 머리박고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 알았으면 나도 좀 튕길걸 그랬어. 왜 나는 너한테 빠져서 인생에 단 한 번 있는 기회를 그렇게 헛되이 날린 걸까."
"네가 멍청해서 그렇지 뭐."
"그러는 너도 놓친 주제에!"
라이넬과 시에린이 투닥 거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애들 투닥거리는 것도 구경하고 장사도 도와주고 하다보니 벌써 2시가 됐다.
"짐 정리 다 끝났는데 오는 거 맞지?"
"올 거야."
호언 장담해서 말했지만 짐을 다 싸고 말이 움직일 때까지 오지 라일라는 오지 않았다.
"안 갈거야?"
"가고 있잖아."
"아니 가서 제자분 데려와야지."
한숨을 푹쉬며 뒤를 돌아본 내 눈에 자기 몸만한 가방을 메고 있는 라일라가 보였다.
'오케이!'
아무래도 밀당은 내가 이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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