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삼고초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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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는 하루하루가 너무 따분했다.
스승님이 유배당해서 시골에 박힌 이후로는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래 애들은 다 어른들 일 도와준다고 시간이 없는데다가 가끔 시간이 난다고 해도 자신이랑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애들이 배운 게 없어서 더 통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몰래 빠져나가서 바둑같은 거라도 가르쳐 주고 있으면 재미가 쏠쏠했다.
문제는 마을사람들과의 만남을 스승님이 제한하셨기 때문에 가끔 몰래 빠져나가서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스승님이 유배된 첫날에는 슬프다는 감정밖에 없었다.
존경해 마지 않던 스승님이 그 능력을 제대로 피워내기도 전에 시골에 박히게 되었으니까.
스승님의 유배는 매우 슬픈 일이었지만 동시에 기쁜일이기도 했다.
스승님이 온전히 그녀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하루에 3시간씩 짬을 내서 가르치던 스승님이 하루의 3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셨다.
투자하는 시간이 달라지니 그녀의 지혜는 빠르게 올라갔고 더 이상 말로만 들어서는 성장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미 배울 것을 다 배운 라일라에게 무한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말이 자유시간이지 마을사람들이랑 이야기도 못하는 라일라의 입장에선 심심함의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거면 하산을 시켜달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스승님은 요지 부동이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황실을 돌아다니다가 유배를 당한 것에 한이 맺히셨는지 든든한 지붕을 구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선 안된다고 못을 박으셨다.
'그 지붕을 구하려면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요.'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세력을 만나봐야 적합한 지붕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애초에 밖에 나가지 않으니 지붕도 고를 수 없었다.
스승님이 적당한 세력하나를 찾아서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라일라는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승님은 황실파지만 자신은 황실파가 아니었다.
다 무너져가는 황실을 억지로 일으키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적어도 제국을 집어삼킬 야망을 가진 사람이랑 함께 하고 싶어.'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다는 헬링의 자매도 좋았고 탄탄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모아 공작가도 좋았다.
스승님에게 말씀 드렸다가는 바로 회초리로 두들겨 맞을게 분명했지만 라일라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나 정도 되는 인재를 영입해 간 사람이라면 제국을 먹어치운다는 야망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만약 스승님이 황실파의 세력을 소개시켜 준다고 해도 3개월만에 다른 세력으로 갈아탈 자신이 있었다.
적당히 지혜를 뽐내고 능력을 과시하면 자신을 영입하려 하지 않는 세력이 없을테니까.
군략에 있어서는 라일라를 따라올자가 없다.
그녀의 스승이 라일라에게 했던 말이었다.
칭찬에 인색한 이레아한이 그렇게 말할 정도이니 모든 세력이 그녀를 노리게 되겠지.
"라일라, 들어가도 되겠니?"
"네, 들어오셔요."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를 숨겼다.
별채로 다가오는 발걸음은 두개였다.
하나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발걸음소리였지만 다른 하나의 발걸음 소리는 달랐다.
'마을에 꼬마영웅이라는 작자가 찾아왔다고 했었지?'
꼬마영웅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익히 들어왔다.
흑마법사들의 손에서 시민들을 지켜낸 황실파의 인물이라지? 황녀의 총애까지 받는 다고 들었느데 아마 스승의 눈에는 그 정도면 나를 막아줄 충분한 지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냉큼 달려가는 건 이상하지.'
이레아 한 또한 그녀가 황실파의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분명 의심할 게 분명했다.
'적당히 튕기다가 들어가면 되겠지.'
상대가 중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단한 인재였으니까.
상대가 자신의 대단함을 모르더라도 이레아 한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신을 포기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끼익
나무로 이루어진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앞장서서 들어온 스승의 모습에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가려졌지만 스승님이 완전히 들어오고 남자가 뒤따라 들어오자 그의 모습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눈호강 좀 하겠는데?'
꼬마영웅이라는 남자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하관만 봐도 잘생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꼬마영웅이 천하제일미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하관만으로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주면 얼굴 전체를 보면 확실히 이보다 잘생겼으리라.
"스승님과 함께 오신 남성분의 정체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알면서 무얼 묻느냐. 라일라 네가 나 몰래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건 뻔히 알고 있다. 꼬마영웅이라 불리는 귀인이 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반갑습니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가 치명적이게 아름다워서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라면 야망이 없어도 충성할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까지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곧바로 접어뒀다.
라일라는 다 무너져가는 황가를 위해 충성하다가 죽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을 세운 황제의 충신으로 죽고싶었으니까.
황실파 나부랭이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래도 다른 세력으로 갈아타기 전까지는 눈호강 좀 하겠네.'
"여기까진 왠 일로 오셨는지요?"
"네가 그토록 바랬던 세상으로 너를 데리고 나가주실 분이시다. 황실파에 소속되셨고 황녀님의 총애를 받는 분이신 만큼 충분히 너를 지켜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스승님 저는 황실파로 들어가기 싫습니다."
이레아 한의 얼굴에 노기가 끼기 시작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아가씨랑 단 둘이서만 이야기해도 될까요?"
"안 됩니다. 아무리 이년이 육체적으로는 잼병이라고 해도 여자입니다. 여자와 남자 단 둘이서 둘 순 없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리고 라일라님을 제가 영입하게 되면 허구한날 둘이 있을 텐데요."
'우리 스승님이 저런말에 넘어갈리가 없지.'
얼마나 엄격하신 분인데.
남자가 이레아 한을 빤히 바라보자 빙빙돌려말하는 거절대신 승낙의 표현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대신 10분만입니다."
그러더니 진짜로 일어나서 나가셨다.
이레아 한을 잘 알고 있는 라일라로서는 말도 안되는 현상에 입을 쩍 벌릴 뻔했지만 손님, 그것도 남자 손님이 온 와중에 추태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억지로 입을 꽉 문 채 남자를 바라봤다.
'일단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가야지.'
아무리 영웅이라도 상대는 남자다 여자가 강하게 나가면 꼼짝도 못하겠지.
"저를 영입하러 오신 분이 가면을 쓰고 계시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아닌가요?"
"아,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투는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당당하고 의연했으며 여자인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도 전혀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른 남자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가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그의 모습에 분노따위는 가볍게 날아갈 수 밖에 없었다.
'미친미친미친미친! 진짜 미쳤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까지 잘생겼지?'
천하제일미? 그런 수식어 조차 모자랐다.
고금 제일미 정도되는 수식어 정도는 달아줘야 그를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플레아 아이데스라고 합니다."
"라일라라고 합니다."
겨우겨우 마음을 다 잡고 이야기했다.
라일라입장에선 충분히 정재된 말투였지만 플레아가 보기에는 당황해서 어쩔 몰라하는 귀여운 말투일 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라일라님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황실에 충성하시는 분이 저 같은 군략가는 왜 필요로 하시는 거죠? 세력을 운영하는 내정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대로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군략입니다."
"저는 제국을 집어삼킬 거니까요. 제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적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라일라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거지?
얼굴에 빠져서 해벌쭉해진 정신을 바로 잡았다.
"제국을 집어삼킨다니요. 그게 무슨 의미시죠?"
"저는 현제국의 멸망이후 새로 새워질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겁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라일라님이 도와주신다면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황실에 반역이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요. 제국은 스스로 무너질겁니다."
남자는 당당했다.
자신의 말이 무조건 이루어질 것이라는 듯 그의 눈에는 일말의 의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제가 이를 황녀님께 말씀드린다면 참 볼만하겠네요."
"그러시지 않을 분이라는 건 압니다."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라일라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황제를 보필한 군략가의 자리, 탐나시지 않으십니까?"
남자의 웃음은 가시가 돋힌 장미와 같았다.
라일라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다.
플레아의 눈에 담겨 있는 확실하고 거대한 야망을 엿봤다.
그 야망만으로도 그녀가 플레아를 따를 가치는 충분했다.
"탐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해야 할 때였다.
밀당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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