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삼고초려2
* * *
"뭐여? 어떻게 한겨?"
무너져 내린 바위를 보며 한참을 굳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구수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마법이라도 부렸어?"
"네 마법 썼어요."
"어쩐지 힘도 없어보이는 청년이 너무 자신만만해 한다 했어. 다 생각이 있었구만?"
"아무 생각 없이 오진 않았죠."
금세 어색함을 푼 할머니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실히 달라진 게 느껴졌다.
멀끔하게 생긴 정신병자에서 뛰어난 마법사님 정도로 바뀐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뭐하냐, 얘들아 돌덩이들 안 옮기냐. 마법사님이 큰 일을 해주셨는데 작은 일은 우리가 해야지."
"알겠습니다. 어르신!"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산산조각난 돌맹이들을 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어르신, 달리 도와드릴만한 일들은 없어요?"
"어휴 마법사님이 나서서 도와주실만한 일은 없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좋아요.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거든요."
방긋하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최대한 예의바르고 어두운 마음을 품은 것 같지 않아 보이기 위해서.
***
내가 이 마을에서 지낸지도 벌써 3일이 다 돼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일동안 마을에선 많은 일이 있었다.
손이 많이 간다고 내버려 두던 논두렁 공사를 하기도 했고 쓰러져 버린 기둥들을 다시 세우기도 했다.
이는 모두 플레아 아이데스라는 마법사가 와서 가능했던 일들이었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눈빛은 아주 호의적으로 변했다.
평범한 마법사가 갑자기 마을에 찾아와서 마을의 일을 해결해 주면 의심을 해볼법도 한데 내가 워낙 잘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은색 청십자가 훈장을 믿어서 그런지 마을 주민들은 나에게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역시 훈장이 좋긴 좋다니까.'
하나 장만해 두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어르신 하나 제가 여기서 지낸지도 벌써 3일이 됐잖아요?"
"아직 3일밖에 안 됐어? 한참은 여기서 지낸 것 같은 데 말이여."
"네 벌써 3일 됐어요."
마을사람들과의 호감도 작은 슬슬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마을 구석에 있는 기와집 말이에요. 거기엔 누가 사는 거에요?"
"기와집 말이여? 거기엔 아주 귀한 분들이 살지."
"어떤 분들인데요?"
"나도 잘 몰러 한 때 잘나가던 집안이라는 데 지금은 높으신 분들 눈에 찍혀서 여기까지 내려오신 모양인디, 하인만 가끔 나오고 집주인은 얼굴 비추는 일이 잘 없어."
"혹시 그분들이랑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요?"
"귀족나으리들이랑 말여? 잘 모르겄는디."
어르신이 머리를 긁적이셨다.
"일단 말씀은 한 번 들여볼근디 만날 수 있게 될거라는 확신은 없어. 일단 우리 마을에 많은 도움을 둔 청년이라고 소개를 할테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봐."
"바로 가시게요?"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것이여 바로가서 이야기 해 볼테니께 기다리고 있어."
멀찍히 떨어진 기와집으로 바로 걸어가시는 데 그 엄청난 행동력에 속으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리스펙!'
어르신이 이야기를 나누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기에 마을의 애들이랑 좀 놀아주기로 했다.
어른들이 나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애들도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얘들아 뭐하고 놀고 있어?"
"아, 오빠!"
"형!"
조심히 다가가보니 땅에다가 격자무늬를 그려놓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처음에 이 이벤트가 떴을 때는 엄청 놀랐지.'
인재를 영입하려 왔는데 마을의 아이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마시던 콜라를 뿜어버렸다.
애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 이벤트 자체가 중요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내가 영입하려 하는 인재가 마을사람들, 특히 어린애들과는 접촉한다는 걸 알리기 위한 복선 역할의 이벤트였다.
"이봐! 청년!"
"네?"
본격적으로 구경하려고 무릎을 접자마자 어르신이 돌아오셨다.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하셨어."
"지금 당장이요?"
"어, 지금 당장."
이게 왠떡이냐.
처음 만날 때까지 적어도 닷새는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얼굴을 내 보인다고?
'한 번 만난 이후로는 일사천리지.'
난세를 진행하면서 정말 많이 영입해 본 인재라서 공략법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내 위치가 그녀를 영입하기 가장 적절한 상황이기도 하고.'
"넵! 얘들아 이따가 놀자!"
애들을 뒤로 하고 어르신을 따라서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넓어 보이는 기와집을 내버려두고 마당에 있는 정자를 향해 갔는데 정자에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내린 여성 하나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어르신."
여성의 인상과 말투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동시에 기품이 넘치면서도 강인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역시 분위기 하나는 압권이란 말이지.'
"청년과 둘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르신이 빠른 뒷걸음질로 사라지셨다.
"성함이 플레아 아이데스라고 하셨나요?"
"네, 플레아 아이데스입니다."
"정자로 올라오시죠. 서로 다른 높낮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으니."
천천히 정자로 올라가니 여성이 자신의 앞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알겠습니다."
내가 그녀의 앞에 앉으니 그녀와 나 사이에 머리 하나 정도 되는 키 차이가 났다.
서로 앉아있다는 걸 생각하면 상체의 길이만 따져도 머리 하나가 작다는 뜻인데 만약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적어도 머리 두개 반이 넘는 키차이가 났겠지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이레아 한 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신 선배님이시니 말이죠."
그녀와 나 사이의 동질감을 형성하기 위해 일부러 선배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레아 한은 황실파로서 황제에게 강한 충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황실파인 주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중앙파 세력들의 견제로 이런 시골동네에 유배되어 있긴 했지만 그녀가 가진 능력과 지혜를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영입할 수 있는 인재는 아니지만.'
그녀는 이미 황실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가 유배된 몸이었다.
이미 뛰어난 인물로서 이름을 날린 그녀를 나 같은 하꼬가 등용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유배된 몸으로 내 밑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자는 또 다른 이야기지.'
하다못해 딸이었다면 유배의 포함 대상이 돼서 내가 영입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제자는 이야기가 또 달랐다.
영입하려고 작정하고 덤벼들면 영입하지 못할 것도 없다.
"선배님이라뇨. 저는 이미 유배당한 몸, 선배라는 호칭은 저에게는 과분할 뿐입니다."
그러면 아줌마라고 불러드릴까요? 라는 문장이 목 끝까지 찼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반응을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겠지만 제자를 영입하러 와서 시비를 걸었다가는 절대 좋은 꼴은 못보겠지.
"이레아 한님은 저에게 선배님이 맞습니다. 같은 하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니까요."
"저는 이미 사특한 자들에 의하여 하늘을 섬길 수 없는 몸이 되버렸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제자분은 다르겠죠."
이레아 한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녀는 무술을 배우지 않았지만 한 분야에서 지고한 경지에 이른 이의 눈빛을 견뎌내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저는 제자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착각을 하신 모양이군요."
"그러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건 누구인가요? 설마 이레아 한 선배님이 직접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신 건 아니실 거 아닙니까."
"제가 가르쳐 줬을 수도 있죠. 유배당한 몸으로는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집밖으로 안 나가신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레아 한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말랬거늘..."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배님의 제자분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이레아한의 시선이 내 가슴팍에 고정됐다.
정확히 말하면 내 가슴팍에 달린 은빛 청십자가 훈장을 보고 있었다.
"꼬마영웅에 대한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대 정도의 나이에 은빛 청십자가 훈장을 받았다는 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고 요즘엔 황실파에 정식으로 가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황녀님이 저를 받아 주셨죠."
"당신 정도라면 충분히 제 제자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마 제어하시기 힘들 겁니다. 황실에 모든 걸 바친 저와는 다르게 제 제자는 야망이 아주 큰 아이거든요."
"만나게만 해주십쇼.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이레아 한이 일어나서 안쪽 별채로 나를 안내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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