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마디안 남작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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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있던 짐을 꺼낸 뒤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보니 익숙한 모습에 어색한 차림을 한 시에린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일찍 나왔네?"
"되도록이면 일찍 짐을 빼달라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거든."
잭스펠 애들이 돌아오는 잠깐의 시간 동안 어디서 지낼까를 한참 고민했는데 결국 시에린의 집에서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여관에 웃돈을 주고 낮시간에도 짐을 보관할 수 있겠지만 여관주인이 내 짐을 털지 않을까 계속 걱정해야 했기 때문에 여관은 일단 넘겨 버렸고,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잤다가는 정치적으로 엮일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리가 나올리 없는 내 충직한 심복, 시에린의 집에서 자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약 황녀한테 찾아가서 재워달라고 하면...'
이번엔 내가 유혹한거라면서 저항도 못하고 따먹혀 버리겠지.
"이게 끝이야?"
"어, 이게 끝이야."
짐의 양이 아주 많진 않았다.
둘이서 나눠들고가면 충분히 들고 갈 수 있는 양이었고 여름도 아니고 겨울이라서 들고가는 데 힘들고 지치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우리 집에 놀러오는 건 처음이지?"
"정확히 말하면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일단 너희집에 가는 것 자체가 처음이긴하지."
미네타의 별장에도 가봤지만 시에린의 집에는 가본적이 없었다.
"미네타 집 같은 곳을 기대하지 마 몰락 귀족까지는 아닌데 세력이 워낙 약한 가문이라서 미네타 만큼 으리으리한 집은 구경 못시켜줘."
"내가 네 도움을 받는 입장인데 이것저것 따지겠냐?"
시에린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대충 30분 쯤 걸으니 시에린의 집이 나왔는데 평범하게 좋은 주택가에 지어진 평범한 집이었다.
"집이 많이 작지?"
집 크기에 대해서 열등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시에린이 굉장히 부끄러운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크지 않아?"
"어디가서 귀족의 집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잖아."
확실히 제도에 있는 미네타의 별장보다도 크기가 더 작아보였다.
"안에 들어가면 누구 있어?"
"지금은 아무도 없어. 가족들 전부다 출근했거든."
저번에 시에린의 오빠가 연회장에서 발견된 걸 보면 일단 시에린의 오빠분은 황실에서 일하는 모양이다.
'난세에서는 세가 약한 귀족가의 여식이 메이드로 쓰이는 일이 왕왕 있던 것 처럼 여기선 남자가 황실의 집사 노릇을 하는 건가?'
덜컥
시에린이 문을 가볍게 열고 들어가니 굉장히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실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오오, 멋진데?'
복도를 지나서 거실을 쓱 살펴보니 모든 게 전부 가지런했다.
"이쪽 방 쓰면 돼."
거실을 훑어보고 있던 나를 시에린이 가볍게 잡아끌어서 손님방으로 보이는 곳 앞에 나를 옮겨놨다.
"손님방 안 쓴지 꽤 돼서 정리하는 데 꽤 걸렸어."
시에린이 열어준 손님방의 모습은 상당히 깔끔했다.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생필품으로 추정되는 물건들도 상당히 많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좋은 방을 써도 되는 거야?"
"어차피 쓸 일도 없는 손님방이야. 한참동안 쓴 적 없는 곳인데 갑자기 다르게 쓸일이 생긱겠어? 엄마랑 아빠도 허락하셨으니까 마음 편히 써."
"그러면 사양안하지."
오래 지낼것도 아니라서 짐도 안 풀고 일단 침대에 날아가서 누웠다.
푹신푹신한 침대의 감각이 내 등을 받혀 주었다.
"으아아아, 좋다."
"방에만 있을 거야?"
"내가 너희집 돌아다녀서 뭐해 괜히 민폐만 되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밖에 나가서 안 놀거냐고 물은 거야. 라이넬은 선배따라서 졸업식 같지만 우리는 시간 널널하잖아."
"오늘은 별로 놀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하품을 쩍 하면서 대답하고 침대에 편안하게 누웠다.
"그러면 나랑 수다라도 떨어."
시에린이 침대위에 가볍게 앉아왔다.
"수다? 좋지."
나도 슬 일어나서 침대에 앉으니 시에린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가면 좀 벗어봐 오랜만에 내 친구 맨 얼굴 좀 보고 싶다."
"알았어."
이제는 내 신체의 일부인 것 처럼 익숙한 가면을 벗고 시에린을 바라보니 시에린이 굉장히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귀엽냐?"
"어머니를 닮든 아버지를 닮든 했겠지."
아마 아버지쪽을 닮을 건 거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설정이라서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어머니쪽은 성격은 귀여워도 얼굴이 엄청 귀여운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너 처음 봤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진짜 천사가 강림한 거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지금보면 천사가 아니라 소악마지, 하는 짓이 아주 악랄해, 꼬마영웅운 무슨 꼬마 간웅이지."
"간웅이라..."
좋은 호칭이네.
"어두운 얘기는 됐고 즐거운 이야기 좀 하자, 우리끼리 모일 때 마다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데 둘만 있을 때도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 할거야?"
"대화주제가 한 번 튀어서 그쪽으로 향한 거 가지고 난리냐?"
시에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즐거운 이야기 하자. 방학 숙제 이야기 어때?"
내가 미간을 지푸리자 시에린이 즐거운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너 얼굴 진짜... 예쁘다."
놀리는 것 처럼 말하다가 꺾니?
시에린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네 얼굴 이뻐서 쳐다본다. 예술작품 감상하는 느낌으로 보고 있는 거야."
"예술 작품이라니 내 미모가 더 뛰어나지."
매력이 98이란 말이야. 어중간한 예술 작품 보다는 내가 훨씬 아름다울걸?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기억하지. 교양마법에서 만났잖아. 네 친구들이랑 나 보러 교양마법 신청했다면서?"
"그 때는 너랑은 절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친한 걸 보면 인생사 어떻게 될지 모른 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그래."
시에린 네가 그렇게 뛰어난 인재인지는 몰랐다.
'마디안가가 그렇게 유명한 이름도 아니었는데 거의 모든 시험에서 올백을 맞아왔으니까.'
나로 인한 각성 때문일까?
아니면 저번의 유니콘 사태때 큰 일을 당할 운명이었을까?
"너희 가문에서는 공부 빡세게 시켜? 너 공부 엄청 잘하잖아."
"빡세게 시키는 편이긴 하지. 어머니의 교육철학도 명확하시고, 오빠랑 나 둘 다 공부를 엄청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거든, 그리고 높은 직위를 얻어내야 우리가문을 다시 살릴 수 있기도 하고."
"너희 부모님은 내가 싫으시겠다. 벼슬 해야 하는 딸내미가 하찮은 평민의 밑으로 들어간 셈이잖아."
시에린이 세차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 우리 엄마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 데 좀 무뚝뚝해서 잘 느껴지진 않는데 네 광팬이야. 우리 어머니도 화일을 엄청 지지하시거든, 덕분에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중아파 귀족들인 윗 사람들한테 공을 다 뺏기는 말단 신세지만 그래도 자기는 황실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바꾸지는 않으셔."
"황실파 소속이셔?"
시에린이 고갤르 저었다.
"우리 가문이 세력이 약해서, 황실파도 딱히 안 받아주더라."
"아아..."
마디안 가문이 유명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 자체가 가진 저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대로된 줄을 잡지 못했다면 비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시에린은 정말 줄을 잘 잡았지.'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내 줄을 잡은 거니까.
"그래도 내 다음세대 부터는 떵떵 거리며 살거야 새로운 제국의 후작 이상은 먹고 들어갈테니까 게다가 황제가 처음 세력을 세웠을 때 부터 함께 했던 개국공신이니까. 크으, 적어도 천년은 네 자손들한테 충성을 바치면서 잘 살아가겠지."
시에린이 김치국을 들이킨 말투로 말했다.
자기가 뽕에 차듯 말하면서도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듯한 자조가 섞여 있는 말투였다.
"나를 믿어. 너는 적어도 후작이 될거고 높은 확률로 공작이 될거야."
아주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니까 시에린이 나를 바라보고 옅게 웃었다.
"그래, 마디안 공작가라는 말을 언젠간 들을 수 있을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지?"
"그래, 반드시 마디안 공작가의 자리에 올려줄게."
지금 기준으로도 앞으로도 공작위에 어울리는 사람은 마디안 밖에 없다.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능력도 빵빵하니까.
시에린의 말 처럼 아주 초기부터 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지연도 단단히 먹고 들어가기도 하고.
프레스티아는 어디에 내버려 두냐고?
헬링가는 멸문시킬거다.
프레스티아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멸문시키거나 성을 바꿔서 새 가무을 세우게 한다음 프레스티아에게 아이데스라는 성을 붙이고 황비로 삼을 거다.
프레스티아는 황비가 될 사람이지 공작이 될 사람이 절대 아니다.
"... 볼 때마다 느끼는 데 너는 진짜로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덤비지 않으면 불가능한 업적이야. 무조건 가능할거라고 믿고 달려야지."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의심하고 같이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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