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황녀님의 음습한 시선을 피하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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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황녀님께서 말씀하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혹시 저를 가리키는 단어인가요?"
"직설적으로 물어보지 말라 남자는 순수해야 더 맛이 있는 법이니 알아차렸다고 해도 모르는 척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라뇨?' 하면서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거지?
'아쉽지만 내 성격에 그런 건 꿈도 못 꾸지.'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싶으면 나만큼 잘 생기고 평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셨어야죠.
나 같이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남자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으면 그럴 만한 상황을 만들어 줘야지.
"거절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황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름과 얼굴을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 황녀인 자기 말을 무시한 셈이 됐으니 황녀가 저리 화나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무리 1 황녀가 중앙파 귀족들에 의해 억압당하면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황족들에게는 그 특유의 프라이드가 있었으니까.
내가 황녀의 총애를 받는 게 아니라 그냥 길다던 평민 1이었다면 거절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간다고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대가 없었다.
신은 죽었지만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면 황족한테 거역했다? 충분히 죽을 만 했군.
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죄를 물어서 지옥에 보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였다.
이런 세계에서 황녀의 명에 거역한 나를 즉결처분하지 않은 시점에서 황녀가 나한테 얼마나 큰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겠지.
"거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제 몸을 황녀님께 바칠 수 있다면 기쁘기 그지없겠지만 저는 세 가지 이유로 황녀님께 제 몸을 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준비한 이유들을 다 들어 주긴 할까?
좆 까라 그러고 갑자기 덮쳐오면 답도 없는데.
'이 세게에서 여자가 남자가 좆 까라고 하는 건 문자의그대로 좆을 까라고 말하는 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좆을 까고 나에게 동정을 넘기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거지.
"말해 보거라."
갑자기 덮쳐 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불안과는 다르게 다행히 황녀는 얼굴을 계속 찌푸리면서도 나한테 말할 기회를 줬다.
"첫 번째로 황녀님이 저와 몸을 섞으시면 황녀님의 몸에 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모아 공작가가 키우는 강아지도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는 하찮은 평민입니다. 제국에게 충성하고 나름 꼬마 영웅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평민입니다. 황녀님 같이 고귀하신 분이 저 같은 천한 것과 몸을 섞으시면 황녀님의 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너무나 걱정됩니다."
황녀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한 사람은 귀한 사람과 몸을 섞어야만 한다는 건 평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미신 같은 것인데 대부분의 평민들은 황녀쯤 되는 높으신 분은 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평민들을 탐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해서 평민을 겁탈하는 자는 고귀한 자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미신이지만 상당히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고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단 첫 번째로 이 이유를 대며 간을 봤다.
"하아, 그래 알았다. 두 번째 이유는 뭐지?"
황녀도 평민들 사이에서 도는 헛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다음 이유를 말하라고 재촉했다.
'이제부터 설득에 들어가야지.'
첫 번째 이유는 황녀를 방심시키기 위한 페이크였고 두 번째 부터가 황녀를 설득시키기 위한 진지한 내용들이었다.
"제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집니다."
"뭐?"
"저는 제국에 충성하는 신하로서 제가 뛰어난 가치를 발하길 바랍니다. 꼬마영웅이라는 칭호는 저에게는 과분한 칭호지만 그 덕분에 제국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대의 몸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냐?"
"여성 영웅의 성생활에 집중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남성 영웅의 성생활에는 집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순수하고 청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제가 동정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과연 다른 이들이 이전과 같이 저를 대해 줄까요?"
당연히 아니지 이 시대의 남 영웅은 아이돌의 역할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성생활이 여성에게는 관대한 것과는 다르게 남성에게는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사람이 결혼도 하기 전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하면 내 인기가 나락으로 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녀님께 제 몸을 바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저는 제국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온몸을 불살라 중앙파 귀족들을 없애고 황녀님이 오롯하게 통치하는 제국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국을 위해서, 그리고 황녀를 위해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동정을 주기 싫은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해서다. 나는 너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내 동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암시 시켰다.
내가 평범한 평민이면 이런 말을 지껄이기도 전에 황녀의 밑에 깔려 버렸겠지만 나는 꼬마영웅이며 정치적 용도가 상당한 인재다.
덕분에 황녀가 은연중에 걸어오는 명령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황녀가 뚱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세 번째 이유는 저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황녀님과 독대한 것이 2번 밖에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황녀님과 관계를 갖는 것보다는 조금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이유를 먼저 말했다면 '뭐? 저흰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하며 앵앵거리는 미소년이 있다고? 개꿀' 하면서 따 먹혔겠지만 두 번째 이유를 듣고 내가 얘를 따먹는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을 가진 타이밍에 세 번째 이유를 말하자 그래 아직 나갈 진도 많잖아. 황녀가 돼서 섹스섹스 거리는 것도 천한 일이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았다.
황녀가 나를 향한 성욕을 완전히 접었다고 100% 자신할 순 없었지만 아쉽다는 표정과 깊게 내쉬는 한숨을 보면 오늘 당장은 더 이상 섹무새가 될 확률은 없어 보였다.
"알겠다. 그대가 그렇게 나랑 몸을 합치기 싫다고 하니 오늘은 내가 넘어가 주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아니다 죄송할 것 없다. 그대도 그대만의 신념이 있어서 내 말을 거부한 것이고 그 신념이 나를 위한 것이니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내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겠지."
황녀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제 돌아갈 것인가?"
"황녀님의 뜻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이만 돌아가거라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으니."
괜히 기분 풀어 준다고 남아 있다가 호감도가 팍하고 튀어 버리거나 황녀의 눈깔이 돌아가서 나를 다시 덮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또 안대를 쓰고 또 신발을 신고 또 빙빙 돈 다음에야 제도의 어느 곳에서 안대를 벗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까지 호위해 주시는 거죠?"
"네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기사의 호위를 받고 아카데미에 도착하니 어느새 밤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네 기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무사히 기숙사로 귀가했다.
어두운 제도 보다 성욕에 잡아 먹힌 황녀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긴 했지만 제도라는 곳이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곳임은 당연했기 때문에 별생각은 없었다.
'일단 일차적인 문제는 전부 해결했어.'
사모아랑은 나름 친해졌다.
계속 나를 거부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처음에 비해서 그 수위가 확연히 낮아진대다가 내가 가 버린다고 하면 살짝 울상을 짓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는 것이 나를 향한 험악한 감정들은 어느 정도 해소 된 듯 보였다.
프레스티아가 나에 대한 의심을 차근차근 키우고 사모아와 만나려고 하는 나를 견제하려 했으면 나도 다른 방안을 찾아봤을 텐데 프레스티아가 알아서 마음을 다잡은 것 같으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면 청십자가 연맹 정도?'
그런데 그 연맹은 기본적으로 다른 연맹원들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는 편이 아니라서 내가 사모아랑 떡을 칠 정도로 친해지는 게 아니라면 크게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기말고사에만 집중할 수 있겠네.'
흑마법사들 때문에 4일 정도를 날리고 사모아랑 친해진다고 붙어 다니면서 쉬는 시간을 손해 본 마당에 오늘 오후의 공부 시간도 통째로 날렸다.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는 꽤 뼈아픈 시간 손해였는데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도 마음이 조금 아파 왔다.
'내일부터는 빡세게 공부하자.'
그런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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