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황실 연회2
* * *
연회는 초대장을 받고 3일 후에 개최됐다.
먼 지역에 사는 인물들에게는 그만큼 미리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에 각자가 가진 여유 시간의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애들이랑 같이 옷도 사러 가고, 누가 초대될지 예상도 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들 준비 됐어?"
"어, 준비 됐으."
아무리 다 무너져 가는 황실이라고 해도 황실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평범한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청기사단의 제복을 아주 잘 써먹고 있었지만 여자애들은 각자 옷을 한 벌씩 새로 맞췄다.
'여자가 드레스를 입는 세상이라 정말 다행이야.'
라이넬은 기사다 보니 정장을 입었지만 시에린이랑 미네타는 적당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고심해서 고른 보람이 있네, 둘 다 잘 어울려."
"진짜 잘 어울리는 거 맞지?"
세가 약한 귀족가에서 자라서 드레스 같은 옷은 입어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시에린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잘 어울린다니까 그러네."
"너무 화려한 거 아니야? 나는 딱히 이름을 날린 것도 아니고 그냥 너희 한테 낑겨서 들어가는 건데 너무 튄다고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진 않을까?"
"시에린, 그 정도는 별로 화려한 것도 아니라니까? 그 정도가지고 화려하다고 그러면 우리 언니가 입은 드레스보면 아주 기함을 하겠네."
"정장 입은 게 차라리 다행이네."
서로 옷 매무새를 만져준 뒤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초대장을 보여주니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내가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워낙유명했고, 내 신체 사이즈에 맞는 청기사단 제복이 몇 벌 없어서인지 굳이 가면 안쪽을 확인 하지 않고 통과될 수 있었다.
"엄청 넓네."
"많은 사람을 불러왔으니까."
적어도 백 명 단위가 넘을 거다.
황녀입장에선 불러 모은 모든 사람을 영입하려는 게 아니라 일단 데려와 놓고 몇 명만 걸려라 라는 마인드로 영입을 시작하겠지.
"너 이따가 춤 누구랑 출거야? 역시 헬링이랑 추려나?"
"요즘 헬링님이랑 사이 안 좋아."
"밀당한다더니 밀다가 그냥 날아가 버린 거 아니야?"
시에린이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오늘은 춤출 생각 없어, 배운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랑 춤을 추고 싶지도 않거든."
"나도 안 출란다. 나같은 쩌리 귀족이 뭔 춤을 배웠겠니, 미네타 정도는 돼야 춤을 배웠겠지."
"나도 안 배웠어... 나는 언니랑 다르게 늘 방에만 박혀있는 인간이었단 말이야."
어째 우리는 하나같이 다 아싸냐.
'그래서 친구가 된 건가?'
일단 연회장을 한 번 쓱 훑어봤다.
3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회장이었는데 2층과 3층으로 올라가면 1층이 훤히 보였다.
'황녀님은 3층에서 나타나시려나?'
1층에서 이야기 하는 게 더 잘 보이고, 애초에 사회자는 1층에서 이야기 하라고 설계된 건물인 것 같지만 황녀 입장에서 위로 올려다 보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런 세세한 것에서 황실이 얼마나 쇠약해 졌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황실이 제대로 살아있었더라면 이번 연회를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이야기 하기 불편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회장을 개조하든, 새로짓든 했을 거라는 거였다.
'사람 참 많아.'
넓찍한 연회장이라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도 티가 안났지만 얼추 살펴봐도 1층에만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아닛! 잠깜만!"
"누군데 다가오십니까?"
"플레아 친구야 친구!"
애들이랑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라이트형?"
"그래, 라이트 형이다."
라이넬이 재빨리 라이트 형을 풀어줬다.
"우와, 아무리 자기 주인한테 장난치려고 했어도 그렇지 남자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라이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이 형은 좀 맞아도 싸."
"뭐? 요놈이..."
"그런데 형네 파벌 사람들은 어딨어? 형 혼자만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이미 2층에 자리 잡아 놨지, 1층 구경하다가 네가 보여서 내려온 거야."
"겨울 방학에나 볼줄 알았는데 벌써 다시 보내."
"그러게 말이야."
계속되는 우리 둘의 대화에 친구들이 갈피를 못잡고 멍하게 서 있었다.
"네 수하들이야?"
"친구들이지."
"네, 수하들입니다."
시에린이 대표로 말했다.
"흐음..."
한명 한명 훑어보던 라이트의 시선이 미네타를 보고 딱 굳었다.
"실례지만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미... 미네타 하이네스라고 합니다."
라이트형이 인지 부조화가 온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미네타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이 분이 네 수하라고? 네가 이 분 수하가 아니라?"
"그렇게 됐어."
"허... 하이네스가의 차녀를 수하로 두다니..."
라이트가 정말 부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줬다.
"일단 위층으로 올라가자, 세력대 세력으로는 처음 만나는 거니까 인사는 해야지."
라이트 형이 앞서서 걸어갔기에 나도 따라갔다.
"누구야?"
"우리 지역 근처에 있는 백작가의 후계자야."
"설마 리쿠르트 변경백 말하는 거야?"
"응, 거기 말하는 거야."
시에린이 입을 떡하고 벌렸다.
"거기 후계자가 야망이 장난아니라던데? 황실에 충성하는 입장에서 저런 사람이랑 친해도 되는 거야?"
"개인적인 친분일 뿐이야."
"지금이야 아직 연회 시작 전이니까 편하게 대해도 이따가 연회 시작한 이후부터는 선 그어야 한다. 주변에 앉으라고 해도 절대 앉지 말고."
"내가 어린앤 줄 아냐?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천천히 걸어서 위로 올라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마이테스랑 필리엣은 안 보이네.'
"마이테스랑 필리엣은 초대장을 못받았어, 아마 일정 나이 이하의 익스퍼드 들한테는 다 보낸 것 같은데, 걔네들은 아직 익스퍼드가 아니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수련했으면 너를 다시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하던데?"
"안타깝게 됐네."
세일런이 우리를 쓱 훑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장난 아닌데? 최측근으로만 따지고 보면 라이트 너보다 잘나가는 거 아니야?"
"내 말이, 16살 나이에 익스퍼드에 오른 애도 있고... 왜 여기 계시는 지 모르겠는 하이네스님도 계시고 말이야."
"가장 제일인 건 나 아냐? 제도에 올라왔으니까 내 소문을 들었을 거 아냐."
"그래, 너 유명하다 꼬마영웅아."
히네스가 그 사이에 어디갔나 싶어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니 세일런의 뒤에 숨어있는 히네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인간은 왜 숨어 있어?'
"히네스 언니는 딴 데 갔어?"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얘 지금 내 뒤에 숨어있어, 본가 사람이라 무섭다나 뭐라나."
히네스랑 하이네스가 갈라진지는 꽤 된걸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연결점이 더 있나?
'맘 놓고 떨어질 수 있는 명분이 생겨서 나야 좋긴 한데...'
"히네스 언니가 무서워 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도 이제 우리 자리 찾아서 앉을게."
"응? 벌써 가게?"
"회포는 이따가 연회 끝나고도 나눌 수 있잖아."
라이트가 대꾸하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서 최대한 먼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회 시작하면 음식들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거지?"
"너는 황녀님이 개최하신 연회에 와서 먹을 생각밖에 안해?"
"난 기사란 말이야, 연회장에서 일하는 건 군주랑 참모지 기사는 호위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되는 거 아냐?"
"... 그렇게 얘기하니까 또 할 말은 없네."
가만히 앉아서 연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목이 말라서 물을 뜨러 이동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인데 물 떠다주는 웨이터도 없네.'
동네 식당도 물이랑 물컵정도는 제공해 주는 데 말이야.
컵 하나를 들어서 물을 담아 자리로 돌아오는 내 시야에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프레스티아, 역시 왔구나?'
워낙 야먕이 강하고 다른 세력과 연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안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오긴 온 모양이다.
넋이 나간 채 프레스티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프레스티아도 나를 마주 바라봤다.
씨익,
3초 간의 아이컨택이 끝나고 프레스티아가 씩 하고 웃으며 나를 지나쳐갔다.
그녀의 파벌에 속한 사람들 중 특히 뛰어난 이들이 뒤를 따라서 지나갔다.
'벨리아가 아무런 반응 없는 걸 보니, 미리 언질을 줬나봐?'
연회에서 나를 만났을때의 행동 방침이라도 있었나보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래 기분이 좋아졌다.
들뜬 기분으로 테이블에 돌아가 앉았다.
그러면 지금 부터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방송기기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이첼라 황녀님이 입장하십니다.
3층에서 거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설계된 연회장이라면 3층의 공간을 좁게 해서 모두가 황녀를 볼 수 있게 설계했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건물이 아니었기에 황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 없다. 우리는 황녀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다른 세력들간의 연합을 구경하러 온 거니까.
그렇게 2박 3일간의 연회의 막이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