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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캐를 꼬시는 법-119화 (119/312)

〈 119화 〉 청 십자가 연맹­1

* * *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나는 지금 제도에 있는 한 세력가의 집에 와있다.

아카데미 안에서 할만한 일은 전부 다 했으니 외부로 눈을 돌린 건데, 아직 아무런 세력기반을 쌓아두지 않았음에도 꼬마영웅이라는 이름 값 때문인지 생각보다 쉽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곱게 늙으신 할머니 한분이 앉아 계셨다.

아주 늙으신 분은 아니고 대략 60대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셨다.

"미안하네, 괜히 기다리게했지?"

"아닙니다. 제가 약속시간보다 너무 빨리 온게 문제죠."

제도에는 수많은 세력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모아 공작가 같이 큰 가문부터 상대적으로 작은 가문들까지 정말 많은 귀족가문들이 존재했는데 내가 오늘 찾아온 곳은 그렇게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크지는 않은, 적당한 세력이었다.

'복잡한 제도에서 가장 확실하게 황실을 지지하는 세력이기도 하지.'

이제 슬슬 내가 황실에 충성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니 아카데미 외 외교의 시작점으로 가장 알맞은 상대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적당한 세력이어서 찾아온 건 아니짐나.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나."

할머니, 그러니까 리트레이브의 눈에는 상당한 중압감이 담겨 있었다.

독대를 신청할 때는 흔쾌히 허락 해주더니 왜 이제 와서 노려봐?

"제국의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러 왔습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제국의 미래인데 그걸 왜 나와 대화하려 하지?"

"그런 말장난을 하러 온게 아닙니다."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리트레이브의 눈도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는 알겠다. 안그래도 황실에 충성하고 싶다는 소문은 익히 들던 참이었어. 지금 제국에서 가장 핫하신 꼬마 영웅님이 황실파에 들어와준다고 하면, 우리야 고맙지."

"저는 황실파에 들어가고 싶은 게 아닙니다."

말이 황실파지 황실의 권력을 쪼개서 자기들이 이득을 보려는 세력이잖아?

"저는 청 십자가 연맹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 정보력이 뛰어나군,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저도 귀가 있습니다. 들어서 알았죠."

청십자가 연맹.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제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자에게 주는 청십자가 훈장에서 따서 만들어진 연맹으로 제국과 황실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이들이 모인 연맹이다.

극비리에 운영되며 연맹에 들어가 있는 자들을 제외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집단이지만 내가 누구인가, 플레이어 아닌가. 인터넷 한 번 치면 다 나오는 정보다.

'다른 누군가의 추천으로만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의 추천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 룰이지.'

아마 리트레이브 입장에선 크리스틴이 나를 추천해서 이쪽으로 보낸 줄 알거다.

어차피 최소 두 명의 동의를 얻어야 들어갈 수 있는 집단이니까.

"누구 추천으로 왔지?"

"그걸 비밀로 하라고 하던데요."

"깐깐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리트레이트가 혀를 찼다.

"청십자가 연맹이 뭐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나?"

"황실에 충성하고 제국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 아닙니까."

"맞다.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는 만큼, 큰 일이 아니면 서로 도움도 주지 않지, 가끔 회의가 열려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빼고는 하는 게 많지 않은 연맹이야. 애초에 청 십자가 연맹에 들어 와 있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세력을 잘 유지시킬 수 있는 사람이거든, 근데 자네는..."

"확실히 세력이 약하죠. 아직 아카데미 학생이니까요."

"자네 말이 맞다. 우리가 왜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아카데미생을 청 십자가 연맹에 받아들여야 하지?"

영감님, 튕기지 마세요. 나 데려가면 좋잖아. 내가 얼마나 이름값이 높은데.

"네임밸류로는 최상 아닙니까. 그리고 어차피 서로 도와주지도 않는 곳이면 아직 세력이 약한 제가 들어가도 큰 문제 없잖아요?"

"자네가 얼마나 제국에 충성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수가 없네, 늘 말로만 충성충성 하지 아직 보여준 결과물이 없으니까. 설마 흑마법사를 한 번 물리친 것 가지고 자네의 충성심을 믿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방긋하고 웃어보였다.

"무언가 보여줄게 있는 모양이군?"

"약소하지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미리 가져왔던 돈주머니를 꺼내서 내밀었다.

"허, 자네 지금 잘못 선택한 걸세, 나는 청십자가 연맹 건으로는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아."

"일단 열어보시죠."

리트레이트가 나를 험악하게 째려봤지만 마냥 웃고만 있으니 그녀도 어쩔 수 없었는지 일단 돈주머니를 열었다.

"돈이 아니군?"

"애초에 드릴 돈도 없습니다."

리트레이트가 주머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무엇인가?"

"오늘 밤 8시에 중앙파 세력들이 어디서 회담을 나눌지에 대한 정보입니다."

리트레이트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어떻게 알긴요. 게임으로 경험해 봤으니까 알지.

예전에 플레아로 시작하자마자 자퇴하는 루트를 타봤을 때 일어났던 일인데, 대충 3일쯤 뒤면 저기서 일이 하나 크게 터진다.

중앙파 귀족들이 죄없는 평민을 잡아다가 성폭행하고 죽이는데 꼬리가 잡혀 버렸거든.

잡히는 건 3일 뒤지만 오늘 부터 광란의 파티가 시작되기 때문에 지금가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아카데미 플레이를 할 때는 알 수 없는 정보 였지만 제도에서 돌아다니는 플레이를 하니까 알게 되더라.

"그게 중요합니까?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거지."

"생각보다 정보력이 뛰어난 친구였군... 근데 자네의 말이 진실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지?"

"첩자 한 명만 거기로 보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만약 제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 때가서 저를 처벌하시면 되는 일이고요."

"일단은 알겠네, 일이 해결되면 따로 사람을 보내지. 자네의 말이 사실이고 우리에게 충분히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 접신 장소를 따로 알려줄걸세."

"네, 오늘은 그냥 플레아 아이데스가 리트레이트의 가주님께 뇌물을 드리러 온걸로 하죠."

"왜 굳이 돈 주머니 안에 넣어왔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당연하지, 당신이랑 나랑 만났다는 것 정도는 조금만 조사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인데 아무 이유 없이 만난 걸로 할 순 없잖아?

"이왕 뇌물을 주는 척 할 거라면 진짜 돈을 가져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까는 뇌물 안 받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농일세 농,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의 농담도 받아주지 않는 건가?"

"농담을 하실거면 표정을 풀고 하시죠. 너무 진지하셔서 진심인 줄 알았잖습니까."

리트레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꼬마 영웅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능글맞은 성격인줄 알았다면, 아마 온 제국이 너를 띄워주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래서, 다른데에서 제 성격을 말하실 건가요? 내가 꼬마영웅을 만나 봤는데, 성격이 아주 뱀 같더라, 이렇게요."

"그럴 일 없다. 나는 내 살 깍아 먹기 싫으니."

"저도 같은 편 취급해 주시는 겁니까?"

츤데레시네.

"자네의 정보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한 말이야. 자네의 말이 진실이라면 청 십자가 연맹에 들어오는 것과는 별개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싶거든. 어차피 일반인들에게는 자네가 나에게 조언을 요청하러 온것으로 발표되고 다른 세력들에게는 자네가 나에게 뇌물을 주러 온 것으로 알려지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협력을 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점은 없지."

"그렇죠. 저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리트레이트가 무겁게 웃었다.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그 방향성 마저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 그냥 나는 나대로, 자네는 자네대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갈 뿐이지, 지금의 청 십자가 연맹처럼, 진짜 위험한 순간에만 도움을 주는 걸로 충분해."

"알겠습니다. 리트레이트님."

"이제 돌아갈 건가?"

"그렇죠. 할 일은 다 했고, 아직 제가 학생의 신분인지라 공부를 더 해야 하거든요."

"헬링을 조심하게, 위험한 년이야. 지방 세력이 중앙파 귀족보다는 훨씬 약한 편이지만 헬링 후작가를 무시할 순 없지, 언니나 동생이나 요즘 움직이는 걸 보면 아주 매서워. 서로 싸우고 있기에 망정이지 둘이서 손을 잡았다면 정말 위협적인 적이 됐을거야."

그 둘이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헬링 자매는 생물학적으로만 자매지 실제로는 앙숙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면 이제 진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몸 조리 잘하시고 다음엔 청 십자가 연맹에서 봅시다."

"다른 곳에서 그 연맹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게."

"제가 그런 당연한 것도 못 할 것 같으세요?"

한 번 웃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리트레이트의 저택밖으로 나오니 벌써 5시가 넘어있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공부하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중앙파의 고위귀족들이 평민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가지고 놀았다는 소식이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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