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마탑2
* * *
"전부 제 탓이죠 뭐, 처음부터 훈장을 달고 왔으면 마법사님이 착각하실리도 없고,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일어날 일도 없었는 데 말이에요."
"아닙니다! 제가 플레아 님을 못알아 봐서..."
"아니에요. 한낯 평민 남성이 가면까지 쓰고 다니고 있으니까 충분히 노예로 착각할만 하죠. 다음 부터는 알아서 훈장을 달고 다닐 테니까, 너무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마법사 소녀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내 눈치를 봤다.
"저는 진짜 괜찮아요. 살다보면 친구 노예 취급도 당해보고 하는 거죠."
"차라리 화를 내주세요."
"화를 내다뇨? 마법사님이 잘 못하신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제가 화를 내죠? 처음부터 끝까지 제 잘못이라니까요?"
스읍, 옛날만큼 각이 잘 안 사네.
소녀가 다시 머리를 박았다.
"제 잘못 맞습니다 영웅님... 제발 노여움을 풀어주세요."
"저 진짜 화 안 났어요."
진짜로 화 안났다. 그냥 놀려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 뿐이지.
"큼큼, 아무리 꼬마 용사님이 화가 나시지 않으셨다고 해도, 제 제자가 잘못 한 건 맞으니, 제가 대신 배상하겠습니다."
"배상이요?"
"네."
역시,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과는 한 번에 받아들이는 게 아니야. 한 번 튕기니까 이렇게 떡이 들어오잖아.
"알았어요. 저는 화도 안나고 별로 기분나쁘지도 않았지만, 탑주님이 굳이 배상을 하신다니 감사하게 받을게요."
"야, 일어나."
탑주가 소녀를 발로 툭 밀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마탑의 배상이라... 별로 큰 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름 퀄리티 있는 배상을 주겠지?
"근데 뭘로 배상할 생각이야?"
내 궁금증을 미네타가 먼저 물어봐 줬다.
"30층 아래에 있는 물품 중, 아무거나 하나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약하지 않냐? 목이 날아갈 수 있을 정도의 큰 죄를 용서해준건데 그 정도로 퉁치려고? 탑주, 네 제자의 가치가 그것 밖에 안 해?"
"31층 이후부터는 제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말이죠..."
"플레아, 너는 만족해?"
"나는 상관 없는데?"
어차피 뜯어내는 거 한 번에 많이 뜯어내는 게 좋겠지만, 내가 여기서 더 큰 보상을 요구하면 괜히 시간도 길어지고 쓸데 없는 반감도 살 것 같으니까 이 쯤에서 용서해주도록 하자.
"그러면, 클레티, 마탑 한 번 안내해봐, 내 친구들은 마탑에 처음 오는 애들이니까. 구석구석 빠짐 없이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미네타가 이렇게 아랫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친구나, 낯선 사람들 한테나 소심하지, 자기 보다 약한 사람들한테는 당당하다는 건가?
'이것도 어찌보면 강약약강인가?'
클레티라 불린 마법사를 따라 마탑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마탑의 입구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데스크에서 출입을 관리하는 명부를 작성하고 마탑 내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쓴 다음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요."
"우리는 필요 없지?"
"당연한 말씀이죠. 아가씨와 친구분들이니까요. 편히 이용하셔도 됍니다요."
클레티, 너 생각보다 사회생활 잘하는 구나. 어떻게 얼굴에 불평이 하나도 안 보이냐.
"1층엔 달리 볼게 없습니다. 제대로 된 볼거리는 2층 부터죠."
클레티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가니 수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부터 5층까지는 평민들을 위한 마법 도구들을 파는 곳입니다. 많은 마석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실생활에 유용한 제품들이 다량 포진해 있죠."
"저 같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군요?"
"물론 우리 꼬마영웅님도 이용하실 수 있죠. 영웅이라고 생필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클레티가 내 비꼼을 가볍게 피해냈다.
"나 이거 가지고 싶어!"
시에린이 미네타의 뒤쪽에 서서 만연필 하나를 가르켰다.
"하하, 이거 말입니까?"
"별로 비싸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냥 가져가도 되지?"
역시 시에린이야, 사람 열불 받게 하는 데는 도가 텄단 말이지.
"네, 그냥 가져가셔도 됩니다. 저희가 잘 못한 것도 있고, 아가씨 친구분이시기도 하니까요."
클레티의 말에 시에린이 만 연필 세 개를 한 번에 들었다.
'진상이 따로 없네.'
내가 모욕당한것에 화나서 저런짓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미네타의 등에 올라타서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있는 걸까.
시에린이 워낙 미친 애라서, 어떤 생각으로 저러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다음 층으로 안내 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클레티가 이를 꽉 깨물었다.
다음층도 마찬가지로 평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2층보다는 가격대가 꽤 높았다.
"나 이거!"
이번에도 시에린은 공책하나를 골라 쥐고 클레티를 바라봤다.
"네, 편하게 가져가시죠."
"그럼 고맙게 받을게."
어쩜 저렇게 얄미울까. 내가 클레티였으면, 오늘밤에 저주 인형을 만들어서 시에린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을 거다.
그렇게 4층, 5층을 올라오면서 시에린의 손에는 물건이 하나 둘 씩 추가 되기 시작했다.
"6층은 어떤 곳이야?"
"기본적인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작동이 어려운 마법 물품을 발동 시키는 걸 알려주는 곳이야."
"작동이 어려운 마법 물품이라니?"
"다음 층 올라가면 나올거야."
미네타가 클레티를 보고 턱짓하자. 바로 다음층으로 안내해 줬다.
"7층부터 10층은 크기가 꽤 있는 고급 마법 물품을 파는 곳입니다."
"기숙사에 있는 샤워기냐, 에어컨 같은 거 파는 데야. 간단한 조작은 설명서만 봐도 할 수 있는데,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마법적 지식이 어느정도 필요해서 6층 같은 공간이 있는 거고,"
현대로 치면 ㅇㅇ플라자 같은 곳인가? 아니면 백화점?
게임 속에서는 이런 곳은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 새로웠다.
"나 이거 갖고 싶어!"
"시에린... 여기서 부터는 그러면 안돼."
"왜?"
"하나에 수십 골드 이상 나가는 물품들이 있는 곳이거든."
"쳇, 아깝다."
다행히 시에린의 혐성은 이제 종식을 맞이한 모양이다.
"그러면 여기는 구경해 봤자 의미 없는 거 아니야? 어차피 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의미가 없진 않지. 내가 사줄 수도 있는 거고, 플레아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순 없어. 가정 물품 같은 거에 기회를 써버리고 싶진 않거든,"
"그러면 바로 11층으로 올라갈까요?"
클레티를 따라서 11층으로 올라오니, 이 전 층과는 다른 분위기가 맴돌았다.
10층까지는 그래도 사람이 꽤 많았는데 11층으로 올라오면서 부터 사람 수가 확 줄었다.
"11층 부터는 저희 마탑이 허용하신 분만 들어올 수 있으십니다. 11층 부터 20층 까지는 마도서를 판매하고, 주로 마탑의 제자들이 많이 사가죠. 사실상 마탑의 전용공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도서라..."
어지간하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는 마법을 배워봤자 큰 의미가 없고, 미네타는 부잣집 딸래미니 알아서 잘 성장할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샅샅히 뒤져봐야 하나?'
난세에는 ~의 마도서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템이 있다.
평범한 마도서와는 다르게 주인과 같이 성장하며, 다양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인데, 그 정도면 미네타에게도 큰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근데, 그런 마도서는 골동품 방 같은데서나 튀어나오지 이런 마탑에선 안 튀어나올텐데...'
마탑의 마법사들이 뛰어난 마도서를 못 알아 볼리가 없으니까.
내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뒤져봐도 ~의 마도서 스러운 기운을 하나도 느끼지 못한 채 21층으로 올라갔다.
"21층 부터 30층 까지는 전투에 관련된 물품을 파는 곳입니다. 뛰어난 물약도 있고, 스크롤 도 있죠. 마법처리가 된 갑옷도 있습니다. 아마 꼬마 영웅님의 눈에 드는 물건이 가장 많이 있을 곳일 것 같네요."
클레티의 말이 맞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층인 21층의 물건들 조차도 내 눈을 호강시키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일단 30층으로 가서 구경하고 싶네요."
"네, 따라오시죠."
30층은 굉장히 넓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시되어 있는 아이템이 적어서 굉장히 넓어 보였다.
"플레아님이 사용하실 만한게..."
클레티를 따라 이동하니, 망토 하나가 나타났다.
"존재감을 줄여주는 망토입니다. 일반인들 상대로는 은신과 다를 바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상대가 익스퍼드 이하라면 마나를 조금 투자하는 걸로 충분히 은신을 유지 할 수 있죠. 그외에 온습도 조절도 해주고 클린 마법이 부여되어 있어 더러워지지도 않습니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굳이 내가 입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당장은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저쪽의 갑옷 좀 설명해 줄래요?"
"갑옷이요?"
클레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갑옷은 딱 봐도 나랑 맞지 않게 크기가 큰 데다가, 남자가 갑옷을 본 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상황이었으니까.
"플레아님이 갑옷은 왜..."
"설명해 달라니까요?"
"알겠습니다."
내 확고한 요청에 클레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갑옷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