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방학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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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계절에 따라서는 저녁이라고 봐도 무방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름이었다.
그것도 학교에서 여름방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제대로된 여름.
아직 날은 쨍쨍하니 밝았고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규칙은 둘 다 알고 있지?"
"어."
"바로 시작해도 돼."
5시라고 해도 나름 더운 날에 밖에 나와있는 이유는 라이넬과 루나라의 대련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시에린이 '헬링 최측근들과 친해지기' 라는 유치한 이름의 작전의 일환으로서 진행된 대련인데, 라이넬이 아카데미 탑급 실력자들과의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련이었다.
'시에린은 가든 옆에 붙어있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에린은 계속 재잘 거리고 가든은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시에린을 밀어내진 않는 걸 보면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미네타는 자기 언니 옆에 앉아서 떠들고 있고.
나는 누구랑 있냐고? 벨리아는 심판 보고 있으니까 당연히 프레스티아 옆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지.
대련에 집중해야 하는 데 자꾸 옆에 있는 프레스티아에게 눈길이 간 다는 것 빼고는 아주 행복했다.
늘 서서 이야기 하고 제대로 같이 앉아있던건 저번에 프레스티아가 나한테 점심 대접을 해줬을 때 빼고는 없었는데 이렇게 같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누가 이길 것 같으신가요?"
"루나라 경이 승리하실 것 같은데요? 라이넬도 충분히 뛰어나긴 하지만 루나라경은 벨리아 경과의 결투에서도 승리하신 아카데미 기사반의 최강자시잖아요."
"플레아씨는 아직 무인을 보는 눈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칭찬인가? 칭찬이겠지? 내 눈이 나쁘다고 욕할 이유는 없으니까 아마 라이넬의 실력을 치켜주기 위한 칭찬일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라이넬이 이긴다고?'
말이 안되는 소리는 아니다. 무력 스텟 자체는 루나라가 더 높을 확률이 높았지만 라이넬은 여기 오기 전까지 위대한 기사한테 구르다가 왔고 루나라는 자기를 둘러싼 암투를 헤쳐나가고 있다가 끌려왔을 테니까 아마 폼 자체는 라이넬이 더 높게 올라와 있겠지.
내 예상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듯 초반 싸움은 라이넬이 유리하게 가져가는 듯 보였다.
"라이넬경, 폼이 굉장히 좋네요. 저런 기사분이랑 친하시다니, 부럽습니다."
이거 내가 라이넬을 빼온 것에 대한 뒤끝이겠지?
"헬링님은 벨리아 경과 루나라경을 둘 다 데리고 계시잖아요?"
"저는 욕심꾸러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준다고 했잖아. 설마 내가 헬링한테 충성한다고 하면 애들이 다 빠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내가 여리고 만만해 보여도 부하관리 조차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거든?
"힘이 있는 건 언제나 좋으니까요. 어지러운 난세를 헤쳐나가려면 강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헬링이 나를 슥 내려다 봤다.
"지금은 아카데미 속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졸업하면 야생으로 던져지게 될테니까요. 모을 수 있는 인재는 최대한 모아 두는 게 좋죠."
보호 받지 못한다라... 나를 겨냥한 말인가?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해, 내가 중앙파 귀족의 시선을 피하는 건 아카데미생 신분으로서 조용히 있기 때문이니까. 제대로 세력을 키우려고 하면 모두가 달려들어서 나를 물어뜯겠지.
"플레아씨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말씀 드린걸로 압니다."
헬링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말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헬링 파벌에 들어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었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 우리 졸업식 못해.'
그리고 나도 졸업하기 전에 세력을 쌓아놓을 거고 말이야.
사람 몇명이 세력에 들어가는 거랑,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영주가 세력에 들어가는 난이도는 차원이 다르지.
시간을 질질 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야.
"승부가 난 것 같군요."
헬링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라이넬이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서 있었고, 루나라는 쓰러져 있었다.
라이넬이 근래에 아무리 수련을 열심히 했어도 루나라를 이길 정도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확실히 무인간의 싸움에선 폼의 차이가 크긴 한가보다.
'루나라는 많이 열 받겠는걸?'
벨리아한테 꺾인 것도 모자라서, 라이넬에게도 졌으니까.
아무리 자신의 폼이 떨어져 있고, 상대는 최상의 상태에서 싸운 거긴 해도, 자존심이 많이 상할 거다.
"수고 하셨습니다."
봐봐 이 꽉 깨물었잖아. 루나라 성격상 라이넬에게 빡친건 아닐테고 자기 자신한테 엄청 화나 있는 거겠지.
방금까지 전력으로 싸운 라이넬과 벨리아를 싸움 붙일 수도 없었고 가든과 시에린간의 두뇌대결을 진행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후끈 달아오른 열기는 빠르게 식는 듯 보였다.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쉽지 않나요?"
그 때 가든이 가벼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피차 다른 파벌이고, 서로의 힘을 비교해 보고 싶기도 할텐데, 마법사끼리 대련을 하는 건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굉장히 무례한 말이었다.
아무리 같은 파벌이라도 자기 파벌의 마법사가 상대 파벌의 마법사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 다른 사람이 대련을 제안한 거니까.
아마 내가 사모아였다면 빡쳐가지고 돌이라도 하나 주워서 던졌을 거다.
'사모아도 그 정도까지 막장은 아니려나?'
하지만 우리들의 관계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일단 우리 세력의 수장인 내가 헬링에게 충성을 약속했으며 당사자인 마법사들도 자매들이다.
무례하긴 하지만, 엄청 화를 낼 정도는 아닌, 딱 그정도였다.
'근데 대련할 필요가 있나? 서클이 다른데.'
하이네스는 5서클, 그것도 5서클에 들어선지 2년은 지나서 자기 서클에 익숙해진 고위 마법사인데 미네타는 아직 4서클이다.
익스퍼드의 기사와 그 이하의 기사가 싸우면 전자가 무조건 이기는 것 처럼 마법사 간의 서클 차이가 나면 높은 쪽이 무조건 이긴다.
물론 전장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지만 이건 대련이니까. 변수 따위는 없다.
'지도 대련 느낌으로 흘러가려나?'
그런데 그건 하이네스가 반대하겠지.
아무리 자기 파벌에서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1서클이나 낮은 동생과 놀아주는 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긴 싫을 테니까.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하이네스는 빠르게 대련장으로 나왔다.
"덤벼라 동생아."
미네타도 비장한 눈빛으로 운동장에 섰다.
'뭐지? 지도 대련에 저렇게 비장할 필요가 있나?'
재빨리 미네타의 상태창을 열어서 마나 부분만 확인했봤더니, 51이라는 수치가 찍혀 있었다.
'뭐야 미네타 언제 5서클을 찍은 거냐구!'
우리 앞에서 기세를 들어낸 적도 없었고 자신의 서클이 올라간 것도 말하지 않았기에 5서클에 올라섰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1학년 때 5서클이라니...'
이론적으로 기사의 익스퍼드와 마법사의 5서클이 비슷하긴 했지만, 두 개념이 가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지금 시점에선 기사보다 마법사가 훨씬 적기도 하고 아무리 재능있는 인재도 빠르게 올라가지는 못하는 게 마법이라는 분야라. 1학년, 그러니까 16살에 때 5서클을 찍은 인재는 난세 전체를 통틀어도 10명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대단한 인재시라는 거지.'
백작은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렸겠네. 자신의 두 딸이 어마어마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니까.
"나 너 봐줄 생각 없어. 진심으로 덤벼."
"나도 마찬가지야."
두 자매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하이네스 자매는 사이가 엄청 좋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 싸우기라도 했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가 보네요."
"네?"
"미네타씨의 눈에서 비장함이 옅보입니다. 아마 자신의 언니에게 인정 받고 싶은 거겠죠. 진심으로 이기려고 덤비고 부딪히고, 결국 깨진 다음에, 미래바언니의 칭찬을 받을 겁니다. 미네타씨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니까요."
아까 라이넬을 언급했을 때와 같은 눈빛으로 헬링이 나를 내려다 봤다.
"정말 부럽습니다. 저런 인재를 데리고 있으셔서 말입니다."
"헬링님도 하이네스 선배를 데리고 계시지 잖아요."
"미래바 언니가 늘 저에게 말하죠. 자신의 재능은 자기 동생에 비하면 미약하다고요. 자기는 졸업하기 전에 6서클을 찍지 못할 거라고 2년 전 부터 계속 말했지만, 자기 동생이 마음만 먹는다면 졸업 전에 6서클을 찍는 다고 굳게 믿는 다고 했습니다."
"근데 왜 그 때 영입을 안 하셨어요?"
"그 때는 미네타씨의 성격이 너무 여렸거든요. 미래바 언니가 말했던 그 '마음 먹는' 상황이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와버렸죠."
바로 당신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헬링의 시선에는 질투와 비슷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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