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방학17
* * *
잠깐 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백작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왜들 그러니? 내가 못할 얘기 했나?"
'고의로 말한 건가 보네.'
하이네스백작가의 가주급 되는 여자가 이 정도 사안의 중요성을 모를리가 없었다.
헬링파벌에서도 되도록이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였겠지.
그런데 갑자기 백작이 난입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쥐어준다라...
'왜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이네스 백작과 나는 초면이었고, 성별이 바뀐 만큼 난세의 지식또한 이용할 수 없었으니까.
"아직 1학년인 너희에겐 먼 이야기 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격변하는 제국 정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줄을 잘 타는 것도 능력이란다. 3학년 선배가 1학년 후배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건 없어. 물론 우리 프레스티아 정도가 되지 못한다면 내 딸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야."
백작이 나를 슬쩍 바라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내가 너무 딱딱한 이야기를 했나? 괜히 친구들끼리 식사하는 데에 방해가 된 것 같아서 미안하네."
하이네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시발, 아니죠?'
내 간절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작은 그대로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 너희들끼리 편하게 먹으렴."
쿵
백작이 식당을 나가자마자 어색한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상황이 잠깐 지속되다가 상대쪽에서 먼저 움직임이 있었다.
"하아, 하이네스 백작님도 참, 장난이 심하시네요."
가장 끝쪽에서 밥을 먹고 있던 가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쪽이나 저희쪽이나 머리 겁나게 굴리고 있었을 텐데 그걸 한 번에 깨버리신 거잖아요? 아주 화끈하신 분이야."
"야, 가든, 아무리 그래도 선배 어머니한테 말 뽄새가 그게 뭐냐?"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제가 얼마나 머리를 굴려서 작전을 세워놨는데 그게 다 무의미해 졌다고요."
작전이 무의미해졌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라 가든이 세운 작전이?
'지랄하네, 작전은 현재 진행 중이겠지,'
가든은 난세에도 존재하는 뛰어난 참모다.
벨리아가 최종 수문장과 같은 존재고 미래바로 이름 날리던 미레타가 마법군단으로 플레이어를 괴롭히던 주축이었다면, 가든은 프레스티아 세력의 머리와도 같았다.
대전략은 프레스티아가 세우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모두 그녀의 손에서 완성된다.
잠시 한눈 팔면 계락에 성 하나둘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던 인재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세운 작전이, 고작 백작의 변심에 무너졌다고.
웃기는 소리다. 아마 저년은 여기까지 상정해 두고 작전을 짰을 거다.
저 쪽은 우리보다 시간이 훨씬 많고, 가든이 부릴 수 있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어떡해야 하냐...'
지들끼리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걸 보니 자기들이 대화를 주도 하고 싶은가 본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주도권을 먹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헬링 파벌보다 명확한 약자였으니까. 괜히 말을 끊고 들어갔다가 프레스티아의 수하들에게 악감정이라도 박히면 일이 힘들어진다.
"뭐야, 아무말 없이 다들 밥만 먹고 있어서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말해도 되는 거였어? 하긴, 가장 큰 어른이 사라진 셈이니까..."
라이넬이 갑자기 입을 열고 시선을 루나라쪽으로 돌렸다.
"여기서 네가 나올지 몰랐다. 너 사모아 파벌 아니었어?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라이넬의 어투는 지극히 평범한 어투였다.
그러니까 친구를 대하듯 평범한 말투라서 지금 상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라는 뜻이다.
시에린이 '내가 설명해 줬잖아!' 라는 표정으로 라이넬을 바라봤지만 라이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 그냥 일이 그렇게 됐어."
"네가 원해서 들어간 거 맞지?"
"그렇지, 사모아 파벌보다는 헬링 파벌이 나를 훨씬 잘 대우해 주니까."
"잘 됐다야, 파벌 바꾼거 축하하고 앞으로는 헬링 파벌의 검으로서 잘 활동할 수 있길 바랄게."
"고마워."
라이넬이 루나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훈훈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자 식당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하이네스와 가든의 대화가 끊기고 라이넬과 루나라의 대화에 모두가 집중하다 보니 상대가 기껏 잡았던 대화의 주도권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툭
재빨리 미네타의 허리를 콕콕 찌르니 바로 미네타가 움직였다.
"언니도 축하해, 어릴 때 부터 헬링님이랑 친하게 지네더니 결국 밑으로 들어갔구나."
"어, 그렇지..."
이후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쪼개졌다.
라이넬은 벨리아와 루나라와 함께 기사반의 이야기를 했고, 미네타는 하이네스를 집요하게 끌어들여서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까지 예상하진 못했는지 멍한 가든의 눈동자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정작 프레스티아한테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헬링 파벌에 한 방 먹여줬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
그렇게 평온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계속 되고 있을 때 가든이 하이네스를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아, 다 먹은 것 같으면 슬슬 돌아갈까? 다들 배부른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밥만 먹을 순 없잖아."
"저는 찬성이에요!"
"저희도 괜찮아요."
다들 원하고 있던 것 처럼 빠르게 자리가 파해졌다.
"플레아씨. 한 시간 뒤에 정원에서 볼 수 있을 까요?"
올게 왔구나.
"네, 괜찮습니다."
두근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추가로 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나는 친구들 사이로, 프레스티아는 헬링 파벌 사이로 이동했다.
서로에게 대화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는지, 헬링 파벌은 하이네스의 방으로, 우리는 미네타의 방으로 이동했다.
"라이넬! 나이스 플레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시에린이 라이넬의 등짝을 짝! 하고 내리쳤다.
"아주 완벽한 대처였어. 너 치고는 너무 대처가 훌륭해서 네 눈에 무슨 성좌라도 보이나 의심했었다니까?"
"그렇게 잘한 거야?"
"당연히 잘했지. 네 한 마디 덕분에 일단 지고 시작할 첫 대면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라이넬은 자신이 한 행동의 위력을 알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평소처럼 행동하라며? 아무도 말 안하고 있다가 좀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것 같아서 친한 애들이랑 떠들었을 뿐인데?"
"그래 어떻게 걷든 쥐만 잘 잡았으면 됐지,"
시에린이 라이넬을 꽉 껴안았다.
"씨발년아! 역겹게 뭐하는 짓이야!"
내 눈에는 귀여운 여자애들 둘이 꼭 안고 있는 귀여운 장면이었지만 라이넬입장에서는 충분히 역겨웠겠지... 동성의 친구가 갑자기 안겨온거니까.
벽까지 날아가서 세게 부딪힌 것 같긴 한데, 저 정도면 정당방위라고 생각한다.
"아우, 너무 한 거 아니야?"
"귀여운 남자애가 안아주는 것도 아니고 너같은 여자애가 안아오는 건 사실상 선전포고로 밖에 안 받아들여 지거든?"
이거 안아달라는 이야기인가?
조심히 다가가서 라이넬을 꼭 안았다.
"잘했어, 우리 라이넬."
얼굴이 시뻘게 지는 게 아주 볼만하군.
"그래도 조금 아쉽네, 나도 나름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완전 지고 들어가는 모양세는 안 날 정도로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좀 아쉬워."
역시 우리 참모도 생각이라는 게 있었구나?
"너희들이 있으니까 마음이 참 든든하다."
"우리가 누군지 알잖아. 꼬마 영웅님이랑 같이 흑마법사를 무찌른 사람들이란 말이지. 그리고 플레아 네가 직접 간택해준 사람들이기도 하고. 조금 더 마음껏 자랑스러워 해도 돼."
"그래 너희 자랑스럽다!"
"근데 이걸 어떡하나. 이제 우리 플레아는 우리 도움을 못 받는 일기토를 하러 가셔야 하는 데."
한 대 때려도 무죄겠지?
나를 보고 실실 웃고 있는 시에린의 얼굴에 주먹 한 대 박아 놓지 않으면 프레스티아와의 대화도 집중 못할 것 같은데.
망설임 없이 시에린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지만 시에린은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 실실 웃기만 했다.
"놀린건 미안하지만, 사실이잖아? 우리는 너랑 헬링의 관계를 몰라. 가끔 둘이서 만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세한 관계는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조언할 수 있는 내용은 없어. 헬링이 어느 부분에서 너를 공격 해 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공격이라니."
우리 프레스티아가 얼마나 숙녀적인데. 저번에 나 때리는 척하고 겁줄 때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공격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단말야.
'지금이라면 프레스티아가 눈앞에서 주먹을 휘두른다고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진짜로 주먹을 휘두르진 않겠지.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위치가 다른 데다가 여기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하이네스 성이니까.
굉장히 온건하고 날카로운 말의 대화가 오갈뿐 둔탁하고 아픈 몸의 대화는 오가지 않을 거다.
"혼자서 머리 굴리다가 갔다 와. 이득 볼 수 있는 건 최대한 이득보고, 양보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양보해."
"조언 못 한다더니, 잘만 하는 구만."
"이런 원론적인 조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시에린의 웃음을 뒤로 하고 침대에 앉아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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