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방학16
* * *
헬링파벌과 척을 질 것이냐, 아니면 굽히고 들어갈 것이냐,
시에린이 물어오긴 했지만 답은 명확했다.
'굳이 따지면 일단 굽히고 들어가야지.'
프레스티아를 공략하려면 그녀와 적이 되어선 안된다.
그녀의 우군을 표방하며 조용히 힘을 기르다가 단 한 번 기회를 노려서 목을 물어 뜯어야 한다.
"일단 굽히고 들어가긴 할 건데, 아직은 아니야."
근데 그건 미래의 이야기고 지금은 그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수는 아니다.
아직 아카데미의 보호를 받기도 하고 있고 아직은 프레스티아가 확실한 기틀을 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지금부터 우리는 헬링파벌에게 복종하겠다는 스탠스를 보여도 되지만 어느 정도의 밀당은 건전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필수적인 것이겠지.
"그러면 당장은 헬링파벌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것 처럼 굴라는 거지?"
"나랑 헬링님 둘이서 있을 땐 나중에 헬링 파벌의 밑으로 들어갈거라고 떡밥을 던질건데, 너희는 우리가 헬링파벌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걸 아예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면 돼."
"알았어. 그러면 본격적으로 작전을 짜볼까?"
시에린의 눈빛이 빛났다.
역시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 가장 멋있는 법, 오랜 만에 보는 시에린의 멋진 모습에 마음이 흡족해 졌다.
그렇게 밤새 대비책을 짠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
헬링파벌이 오늘 도착할 예정이긴 하지만 아침 일찍 도착하진 않았다.
제도에서 출발한 시에린이 점심 먹기 조금 전 정도의 시간에 도착했으니까 아마 헬링 파벌도 그쯤에 도착할 확률이 높겠지.
아직 여유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알겠지? 절대로 헬링 파벌에 날을 세워선 안돼, 일단 헬링파벌의 각 구성원을 평소처럼 대하다가 혹시라도 영입 제안 같은데 들어오면 왼곡한 표현으로 돌려서 거절해. 알겠지?"
"이렇게 까지 해야 해? 어차피 위장으로 들어갈 거면, 최대한 일찍 들어가는 게 좋은 거 아냐?"
"언제 들어가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란다 라이넬아, 지금같이 평화로울 때 들어가는 것 보다는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들어가는 게 훨씬 좋아."
시에린이 말한 이유 하나 때문에 헬링파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단 암묵적으로라도 헬링파벌의 밑에 들어가게 된다면 자유가 상당부분 제한될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벌려놓은 것 까지 건드리진 않겠지만 앞으로 일을 벌리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제약이 뒤따르겠지.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가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프레스티아가 빡칠 정도가 되어서야 헬링 파벌 밑으로 들어갈 거다.
"나는 잘 모르겠어. 헬링파벌이 우리 하나 견제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할 문제야?"
"네가 대규모 파벌의 탐욕을 몰라서 그래, 여기 와서 우리를 보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넘어갈 애들이 절대 아니야. 분명 무슨짓을 해올 게 분명하니까 대비를 하고 있는 거라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미네타가 눈을 떴다.
"온 것 같은데?"
"후우, 드디어 왔구만."
아마 당장 만나진 않을 거다.
일단 하이네스와 만나서 회포를 좀 푼 다음 백작을 만나서 인사 한 번 하겠지.
상황에 따라서는 하이네스의 충성맹세를 그곳에서 진행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관계 였다면 자기 딸이 다른 가문의 가신으로 들어간 다는 이야기는 가주 입장에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말임이 분명했지만 헬링후작가와 하이네스 백작가는 원래 부터 교류가 많았다.
아마 백작도 흔쾌히 허락해 줄 확률이 높겠지.
"아마 처음 부딪히는 곳은 점심식사 때려나?"
"그렇겠지. 지금까지 우리가 있는 걸 모르고 있다고 해도, 하이네스가 우리의 존재를 이야기 해줄 테니까. 그쪽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입장이니까 점심을 먹을 때 만나려고 할거야. 그게 가장 깔끔하니까."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오랜만에 프레스티아를 만나는 거라 설레는 마음도 있고 약간의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지금 잘 못 보이면 공들여 세운 탑이 무너져 버릴 테니까.
세세한 작전을 세우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미네타가 어마니가 부르신다며 밖으로 나갔다.
잠깐 동안 앉아있으니 미네타가 다시 돌아왔다.
"언니가 자기 친구들이랑 다 같이 밥을 먹는 게 어떻냐고 물었데, 일단 너희한테 물어보고 말해드린다고 했어."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준비한 건데."
"그러면 그렇게 말씀 드릴게 10분 정도 후에 바로 이동할 거니까. 다들 준비 해놔."
오늘 부터는 좀 편하게 입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제랑 같은 옷을 입고 옷 매무새를 어루 만졌다.
움직이기 좀 불편해도 초반부터 밀리면 안되니까.
"가자."
미네타를 따라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 안에는 백작과 하이네스, 그리고 헬링 파벌의 인물들이 미리 모여있었다.
'하이네스를 포함해서 5명인가?'
누가 모였는지 면면을 읽어봤다.
일단 파벌의 수장인 프레스티아는 당연히 있었고, 벨리아도 같이 있었다. 헬링 파벌에서 가장 뛰어난 참모라고 알려져 있는 가든이 있는 것 까지는 예상했는데 다른 한 명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인원이었다.
'쟤가 왜 여깄어.'
나머지 한 명은 최근에 사모아 파벌에서 헬링 파벌로 넘어간 루나라였다.
식탁으로 다가가는 동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일단 우리가 올걸 몰랐다는 가정은 폐기다. 우리의 존재를 몰랐다면 루나라의 자리에 하이네스와 좀 더 친한 이가 앉아있을 테니까.
아마 자기 팍벌이 루나라를 데려 왔다는 걸 우리에게 한 번 더 어필하기 위해서 굳이 루나라를 데리고 온 거겠지.
"후우,"
아무한테도 안 들리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 프레스티아의 앞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플레아씨."
프레스티아의 미소는 매우 부드러웠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가식어린 미소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때? 놀랐지? 하고 나를 놀리는 듯한 어투가 부드러운 말 속 안에 숨어있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헬링님."
"두 사람이 아는 관계인가봐?"
"아카데미에서는 둘이 사귄다고 말이 나돌 정도로 친한 사이에요. 그렇다고 진짜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요."
글쎄? 친한 사이일까?
하이네스의 말 처럼,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프레스티아와 친한 거면 좋겠는데 나도 군주를 꿈꾸는 몸이다.
우리 둘이 친해진다는 건 내가 프레스티아의 밑으로 완전히 들어가거나, 반대로 프레스티아가 나에게 지배를 당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전자는 절대 하지 않을 거고 후자는 한참 뒤에야 될까 말까한 일이다.
"그런 헛소문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플레아씨에게 비하면 굉장히 모자란 사람인데 말이죠."
그 헛소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사람이라서 굳이 죄송하게 생각할 필요 없는 데 말야.
게다가 가끔은 진짜 프레스티아랑 사귀는 기분도 들어서 좋고.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싱긋 하고 웃으며 프레스티아를 바라봤다.
괜히 머리만 굴리고 있느라 못 알아 봤는데 방학식 때 비해서 키가 꽤 큰 느낌이다. 못해도 2~3센티는 큰 게 아닐까?
"그러면 일단 밥을들지."
백작이 그리 말하자 다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묘한 정적이 식탁을 지배했다.
우리는 헬링파벌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고 헬링파벌은 굳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친한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조용한데."
보다 못한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저희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식탁에서 할 순 없으니까요. 플레아씨와는 이따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하고 뛰었다.
프레스티아와 독대하는 건가?
단 둘이서 만나는 게 얼마만이지?
아마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는 시추에이션 보다는 서로 칼을 숨기고 대화할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오랜만에 프레스티아와 둘이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엄청나게 업 됐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다시 고요한 정적이 식탁을 뒤덮었다.
이대로 밥만 먹고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
최소한 하이네스가 헬링에게 충성 맹세를 했는지 정도는 알아내야지.
팔꿈치로 미네타를 톡톡 건드리자 미네타가 바로 입을 열었다.
"언니, 친구들 부른 다면서 온 사람들은 전부 후배네?"
"나이가 어리다고 친구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니잖니 우리 딸? 그리고 미내바는 이미 프레스티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인걸?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이와 친해질 줄도 알고, 때로는 굽히고 들어갈 줄 알아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란다."
설마 백작이 노빠꾸로 전부 말해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벨리아와 루나라의 얼굴이 덜컥하고 굳었다.
하이네스와 프레스티아, 그리고 가든은 멀쩡히 표정을 유지했지만 이런 팀전에선 한 명만 잘못해도 바로 정보를 넘겨준다.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미네타와 라이넬을 확인하니 자연스럽게 놀란 연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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