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방학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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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이네스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남장을 한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게 떠올랐다.
사이가 나빠도 자매는 자매인듯 카르멘과 영주가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남장이 아닙니다. 진짜 남자에요."
"그럴리가. 우리 딸은 남자 공포증이 있는 걸."
뭐야, 미네타 아직도 엄마한테 말 안 해 놨어?
너 그거 고친지 한참 됐잖아.
미네타가 빠르게 영주에게 붙어서 소근소근 거렸다.
나한테 안 들키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했던 것 같은데 영주가 사당히 짓궃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미네타의 도움은 아무런 영향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 플레아가 잘 생겨서 남자 공포증이 사라졌다고? 역시 우리 딸도 잘 생긴 남자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나."
"어머니! 그걸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요?"
"크게 말하면 안되니? 네 치부를 친구한테 들키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죠!"
모녀간의 티키나카는 나름 지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딸 키워봤자 아무런 의미 없다더니, 결국 잘 생긴 남자애가 나타니까 엄마는 신경도 안 쓰는 구나."
영주가 흑흑 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닦는 모션을 취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플레아가 저를 어떻게 보겠어요!"
"나랑 조금 대화한 것 가지고 너에 대한 시선이 달라질 정도면 지금까지 딸이 친구를 잘 못 대하고 있던 게 아닐까? 아무리 부끄러워도 친구 사이엔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는 법이란다 딸아."
나는 완전히 있는 취급도 안 하는 군.
"우리딸이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니 더 말하진 않을게. 친구랑 놀고 싶은데 내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지? 돌아가서 즐겁게 놀렴. 다른 친구도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친구들도 오면 나한테 한 번 찾아오고."
"알았어요."
퉁명스래 대답하는 미네타의 옆에서 영주를 향해 허리를 한 번 숙이고 인사 한 뒤 밖으로 나갔다.
평소랑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미네타를 따라서 잠시 걷다보니 아까 봤던 미네타의 방이 나왔는데 그 방 앞에는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플레아, 오랜 만이다?"
'생각 해 보니 선배도 하이네스 가였지?'
지금까지 크게 생각을 안 하고 있어서 여기서 나올줄은 생각도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무리 3학년 1학기의 방항이라 하더라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것 보다는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효율이 좋으니 당연히 하이네스 성에 하이네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지만, 나는 내가 하이네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생각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역시 상상력 갓겜.'
"그 동안 잘 지냈냐?"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선배는 어떻게 지냈는데요?"
"나야 뭐, 재밌게 지냈지. 마법을 공부하는 시간 빼고는 방 안 처박혀서 만화만 읽는 미네타랑은 다르게 나는 매일 밖에서 노다니면서 인생을 즐긴다고."
왜 어디를 가든 미네타는 딜을 받는 걸까?
"뭐하고 노시는 데요?"
"글쎄? 뭐하고 놀까?"
하이네스가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나에게 자신이 19딱지가 붙은 업소를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저런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나는 이 정도 거짓말에 넘어갈 정도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제 알 바에요?"
이럴 땐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면 상대쪽에서 할 말을 잃기 마련이다.
내가 좀 궁금해야 사기도 치고 나에게 두려움을 심든 혐오감을 심든 하면서 장난을 칠덴데 아예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장난이 진행이 안된다.
"내가 어떻게 노는 지 안 궁금해?"
"미네타는 친구라서 어떻게 노는 지 궁금한데, 솔직히 선배는 어떻게 노시는 지 하나도 안 궁금해요. 알아서 잘 노시겠죠. 그걸 제가 신경써야 하나요?"
"나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
"네! 하나도 안 궁금해요."
하이네스의 간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즉답했다.
"저 보려고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오랜만에 미네타랑 회포를 좀 풀고 싶어서요."
"나보고 꺼지라는 거지?"
"에이, 그렇게 험악한 말은 아니죠.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자는 의미에요."
하이네스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가만 보면 너는 말을 너무 돌려서 한단말이지. 그런데 너무 속이 뻔하게 보이잖아. 그럴 거면 도대체 왜 돌려 말하는 거야?"
왜 돌려 말하기는. 직설적으로 말하면 명분을 주니까 그렇지.
이곳은 하이네스 성이다.
아무리 미네타의 친구라고 해도 이곳에서 하이네스를 욕했다가는 손해 볼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도 훈장을 가지고 있어서 즉결 처분 까지는 당하지 않겠지만 돈을 상당히 많이 뜯길 수 있겠지.
하이네스는 친구의 언니임과 동시에 프레스티아의 부하다. 언제 무슨 수를 써올 지 모르니까 늘 긴장하고 있는 게 맞겠지.
"돌려 말한다뇨. 저는 제 진심을 말하는 것 뿐인걸요?"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우리 플레아씨는 정말 결백해서 좋겠네요."
대답을 하지 않고 웃고만 있으니 하이네스가 혀를 한 번 찬 뒤 뒤로 돌았다.
"아마 저녁은 우리 가족이랑 다 같이 먹을 것 같으니까 그 때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
"우리집인데 조심히 들어가긴 뭘 조심히 들어가. 여기서 내가 위험해 질리는 없으니까 너나 조심하셔. 미네타가 아무리 소심해도 남자애랑 단 둘 이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여자들은 전부 늑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명심할게요."
장난 삼아 미네타에게 살짝 멀어지면서 거리를 벌렸다.
"푸하하하! 역시 너는 재밌단 말이야. 그럼 이 누나는 진짜로 가본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미래바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후 미네타를 바라봤다.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내 장난 정도는 쉽게 구분할 수 있게돼서 그런지 크게 동요하는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면 들어가서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애들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고 하니까."
미네타가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도 나도 모르는 잠금 장치가 되어 있겠지'
미네타가 만져야만 열린 다던가 하는 고급진 기술이 달려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미네타의 방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변 성에 찾아가서 남작의 딸에게 아카데미 이야기도 해주고 마을에서 애들이랑 놀아준 이야기도 꺼내는 등 할 말이 많았지만 미네타는 진짜로 집에서 만화책만 읽었는지 달리 입을 열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미네타는 무슨 만화책을 주로 읽어?"
"... 미안 그건 비밀이야."
처음 봤을 때는 로맨스 만화로 추정되는 걸 읽고 있던 것 같은데, 그게 숨길 정도로 큰 비밀인가?
'하긴 여자애가 로맨스 만화를 읽는 다고 말하기엔 창피할 수도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
"진짜 못 알려줘?"
"어... 진짜 못 알려줘."
미네타 특유의 여린 목소리면서도 나름 단호함이 가득 들어찬 말이었다.
작정하고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주긴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내 얘기만 계속하고 있다보니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다른 애들은 오후가 돼야 온다 하니 슬슬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친구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나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진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시에린 이었다.
아무리 친구집이라도 하이네스 가에 오는 거라서 나름 고급진 옷을 입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시에린도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세련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아니 쟤는 왜 피부가 저렇게 탔어?'
시에린의 모습 중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게 피부색이었다.
한 여름에 많이 돌아다닌 건지 아니면 따로 피부를 태우려고 노력한건지 상당히 구릿빛이 도는 피부를 가진 채 우리에게 찾아갔다.
'이게 금발 태닝 양아치라는 건가?'
물론 시에린은 금발도 아니고 양아치도 아니지만.
"하이! 다들 오랜만이야!"
시에린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와 미네타를 한 번에 안았다.
"보고 싶었어 얘들아!"
"나도 보고 싶었어."
"잠깐... 아파."
버둥버둥 거리는 미네타를 무시한채 시에린은 우리를 더 꽉 끌어 안았다.
"제도에 친구 없이 나만 남으니까 되게 심심하더라, 할 건 많은 데 정신적인 피로를 해소할 때가 없으니까 진짜 엄청 지치는 거 있지. 그런데 너희를 보는 순간 피로가 싹 풀리잖아.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너희는 모를 거야."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일찍 찾아오지 그랬어. 제도에서 하이네스까지 오는 데에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어제까지 딱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두 번 설명하기는 싫으니까 라이넬이 오면 말해줄 거지만, 최근에 제도에, 정확히는 아카데미에 재밌는 일이 생겼어. 물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 루나라가 프레스티아 밑으로 완전히 들어갔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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