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캐를 꼬시는 법-79화 (79/312)

〈 79화 〉 방학­8

* * *

쿨리온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어떤 포지션을 잡을 지는 알 수 없었다.

내년이 되면 아카데미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질 테고 쿨리온이 노력한다고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금세 바닥까지 처 박힐 테니까.

"크흠, 좋은 조언 고맙네."

남작이 우리의 대화를 끊었다.

아무리 좋은 조언이라도 너무 현실성이 넘쳐서 그런걸까?

이대로 뒀다가는 아카데미에 대한 딸아이의 동경심이 사라질 게 분명했기에 내 말을 빠르게 끊어낸 것 같았다.

이후의 식사는 정말 재미없게 진행됐다.

겉치레 같은 칭찬과 친분을 위한 얘기만 몇 마디 나누다가 헤어졌는데, 남작이 나를 돌려보내려고 하는 듯한 명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온김에 전부 처리하고 싶었는데...'

쿨리온 뿐만아니라 남작한테도 조언할 내용이 있었다.

한 번에 처리하고 다시는 안 오려고 했는데 상대가 듣기 싫어하니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따로 시간을 내도록 해보자.

***

집무실에 들어와 앉았다.

나 외의 아무도 없는 공간에 들어서자 흥분됐던 마음이 침착해지는 것 만같았다.

'꼬마 영웅이라...'

오늘 소년과 만나기 전에 미리 정보를 좀 캤다.

제도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기에 내 충직한 심복인 카밀레를 보냈다.

제도 아카데미의 졸업식 3일 전에 도착한 카밀레는 내가 제도의 상황에 대해 얼추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을 가져다 줬다.

"확실히 난 놈이긴하군."

눈빛 부터가 보통의 남자애와는 달랐다.

자기 고향의 지배자를 만나면 주눅이 들 법도 했는데도 소년은 올곧은 눈빛을 유지했고, 나를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청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왔다.

솔직히 직접 만나기 전까진 많이 저평가 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흑마법사들을 무찌른 영웅으로 칭송받다니. 그것도 힘이라곤 전혀 없는 행정반아이가.

카밀레가 정보를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닐테니 그에 대해 과장되게 소문이 퍼져있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기지와 용기만으로 모든 일을 해쳐나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소년을 직접 만나니 생각이 변했다.

아무리 과장된 소문이라고 해도, 소문이 날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가 최소한의 대단함은 소유했기 때문에 과분한 칭호라도 붙게 된 것이겠지.

'애 치고는 생각이 깊어.'

뭐? 아카데미에서 1등을 하는 평민이라고?

소년에 대한 정보가 없는 딸은 속아 넘길 수 있더라도 카밀레를 통해 정볼를 얻은 나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소년이 헬링가의 차녀와 친하고 하이네스가의 차녀와 마디안가의 장녀, 그리고 위대한 기사 데안느의 제자와 친한 것을 알고 있다.

'약하게 태어났으나 큰 세력을 얻고 싶어하는 야망가라고 했던가?'

완전히 자기 소개가 아닌가.

평민으로 태어난 이상 제대로 된 세력을 세우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라면 다를 것 같았다.

'절대로 작게 끝날 놈은 아니야. 딸아이도 그놈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니 미리 접점을 만들어 두는 게 좋겠어.'

내년에 딸아이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면 자연스럽게 그와 접점이 생기겠지.

***

쿨리온 성에 갔다 온지도 벌써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 평생 느껴 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무료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심심해...'

현대에선 아무리 긴 휴식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문제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컴퓨터로 난세를 하면 몇시간은 우습게 워프했고 컴퓨터가 없더라도 핸드폰이 있으니 어디에서든 시간을 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세계는 할 게 너무 없었다.

쉬는 시간이 나면 잠을 자면서 피로를 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방학이 시작되고 내내 잠만 자다보니 이젠 누워도 잠이 안왔다.

'게임이었으면 이런 시간은 전부 스킵해 버리는 건데...'

이곳은 현실이니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아쉬웠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시계를 봐도 고작 10분밖에 흘러있지 않으니 내가 시간과 공간에 방에 갖힌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조차 밀려왔다.

"심심해!!"

집에 아무도 없는김에 소리 쳐봤다.

어머니는 일 가셨고, 동생은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니 이 정도면 가정 내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흑흑, 나는 왕따야.'

배라고 고팠으면 점심을 만들고 먹는데 시간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시간만 보내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보자.'

일단 방학 동안에 변경백과 한 번 만나야 하는데 이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천천히 나에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다가 변경백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변경백의 요청으로 내가 변경백과 만나야 일이 스무스 하게 진행된다.

변경백과 헤어진 후에 쿨리온 남작이 나를 한 번 만나고자 할 테니 조언은 그 때 해주면 되고.

그렇다고 소문을 빨리 퍼뜨리기 위해 많이 움직이자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나를 이미 알고 있어서 정보 전달력이 느리고, 그렇다고 쿨리온 성에 가서 움직이자니 이동수단이 없다.

마차를 타고 가니까 20분만에 가는 거지 걸어가면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에 도착 할 정도의 거리다.

'상단도 잘 안 들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편지나 돌리자.'

심심함을 가득 담아서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내용의 대부분이 심심함이었지만 친한 친구니까 이렇게 써보내도 이해해 주겠지?

편지를 다 쓰니 무려 한 시간이 지났다.

슬슬 출출해 져서 밥을 챙기려고 할때쯤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강하게 두두렸다.

"플레아 형! 여자애들 싸워!"

"뭐?"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뛰쳐나왔다.

다른 어른들도 많은 데 왜 굳이 우리집에 찾아왔을까 하는 의문은 금방 해결 됐다.

여자애들은 우리 집 마당 바로 앞에서 싸우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 거리면 다른 무서운 어른들을 데리고 오는 것 보다 나를 데리고 오는 게 빠르긴 하겠지.

"얘들아! 너희 뭐해?"

"플레아 오빠? 그게..."

여자애들이 싸움을 멈추고 시선을 피했다.

'본격적으로 싸운 모양인데?'

옷은 먼지가 가득 묻었고 겉으로 들어난 팔다리에도 상처가 많이 보였다.

"왜 싸운 거야."

엄한 눈빛을 하고 아이들을 내려다 봤다.

지금은 강한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니, 약간의 기세까지 담아서 애들을 바라보자 애들이 금방 주눅들었다.

"... 얘가 자꾸 호랑이랑 사자랑 싸우면 사자가 싸운다고 우기잖아!"

"우기다니! 진짜로 사자가 이기거든!"

"아냐! 호랑이가 이겨!"

애들답다고 해야할까? 참으로 유치한 이유였다.

'나는 서로 감정상해서 싸우는 줄 알았지.'

내가 앞에 서있었지만 애들은 다시 감정이 격양됐는지 사자파와 호랑이파로 나눠서 싸우고 있었다.

"형은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여자애들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히 구경하고 있어."

몇 안되는 남자애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뒤 긴팔과 긴바지를 입고 다시 나왔다.

그 짧은 사이에 싸움이 더 심화됐는지 볼꼬집고 발로차고 난리도 아니었다.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거지.'

감정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때리는 것도 아닌 듯 하니 대판 싸우게 내버려 두고 화해 시키면 오히려 싸우기 전 보다 더 친해질거다.

"형... 안 말려도 되는거야?"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원래 여자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란다."

"형도 남자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

"형은 나이가 많잖아. 여자애들이 싸우면서 친해지는 걸 많이 봐와서 알지. 진짜 서로가 싫어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한 번 싸우고 화해하면 다시 잘 놀거야."

여자애들의 싸움이 한참 지속되다가 체력이 떨어진 애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지게 됐다.

'슬슬 나서볼까?'

"다 싸웠어?"

엄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하자, 애들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오빠, 그게 아니라..."

"나는 너희가 싸우다가도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 너희들은 친구잖아?"

애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 순간을 넘기려고 하는 걸까?

"사자랑 호랑이 중에 누가 더 세냐는 게 너희를 이렇게까지 싸우게 할 만큼 중요한 일이야? 진짜로 중요하다고 해도, 친구를 그렇게 함부로 때리면 안되는 거야."

"미안..."

"사과는 나한테 하는 게 아니고 친구들 한테 해야겠지? 다들 꼭 끌어안고 친구야 미안해 해."

기존에 사이가 나쁘던 애들이 아니라 원래 상당히 친한 애들이라서 조금 유치한 내 명령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 뒤에서 남자애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앞으론 쟤네들이 나 대신에 알아서 중재를 하겠지.

"근데 형, 사자랑 호랑이랑 싸우면 진짜로 누가 이겨요?"

뒤에 있던 남자애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여자애들도 사과를 하다말고 내쪽으로 몰래몰래 시선을 돌리며 내 입이 걸리기 만을 기다렸다.

"컨디션 좋은 놈이 이기겄지.'

둘이 싸워서 누가 이길지 내가 알게 뭐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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