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방학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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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완벽하게 지운 후 다시 쿨리온 성으로 움직였다.
11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었지만 점심 약속인데다가 어머니의 상사분을 찾아가는 것이었기에 신속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우리 아들 멋진데? 그런 옷 있었으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저도 깜빡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나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복장을 고른다고 해도 평상복을 입고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귀족을 찾아가는 것이니 만큼 최소한 정장, 제복 같은 격식 있는 옷을 입고 가야했는데 다행이 적절한 옷이 있었다.
똑똑
"남작님, 아이데스 경과 플레아 군이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도록 하게."
집사가 안내해준 문 안쪽에서 낮고 침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점심약속이라고 해서 식당에서 만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남작님의 집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당으로 이동하겠지.
집사가 문을 열자 방금 전 까지 일하고 있었는지 만연필을 내려놓는 여성이 보였다.
'이쪽이 쿨리온 남작인가?'
나이대는 대충 30대 후반정도? 우리 어머니랑 나이대가 비슷해 보였다.
"흠?"
쿨리온 남작이 나를 보고 놀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떻다.
'당연히 놀라겠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청기사단의 제복이었으니까.
저번에 훈장 수여식 때 빌렸던 건데, 단장이 나를 명예 청기사단원으로 임명한다면서 떠넘긴 옷이었다.
'명예 단원은 무슨 사이즈 맞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선물로 준 거겠지.'
얻게 된 경위가 어떠하든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간지나고 멋있는 옷이었다.
자그마치 청기사단의 제목이라서 어그로도 많이 끌리고 말이야.
"아직 16살에 행정반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옷을 입고 있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의례차 인사도 안하고 바로 물어볼까.
"제도에서 흑마법사에 대한 일을 처리하면서 청기사단장님께 명예 기사단원으로 임명됐습니다."
나는 거짓말 안했어. 장난기가 섞여있었지만 단장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진 않겠지.
"꼬마 영웅이라니, 그 말이 과연 사실인듯 하군."
쿨리온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놀라서 나를 소개하는 것도 있었군, 이 성의 통치하고 있는 쿨리온 남작이다."
"플레아 아이데스라고 합니다. 늦은 감사인사지만, 아카데미에 저를 추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하고 숙였다.
"그리 감사할 건 없다. 그대가 능력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내가 제일 아끼는 기사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아카데미에 추천해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성적을 내고 흑마법사들을 무찌른 건 자네의 공이야. 오히려 자네 같은 인재에게 미리 눈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고맙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
쿨리온 남작이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일단 점심부터 들러가지, 집사. 내 딸아이를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식당으로 향하는 남작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도움을 주실 생각이 없으신지 꽤 먼 거리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계셨다.
"내 딸아이도 내년이면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갈 예정이야. 아마 자네와 같은 행정반으로 들어갈 것 같은데 딸아이를 부탁해도 되겠나?"
"제가 할 수 있을 만큼은 도와주겠습니다."
집무실에서 식당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물론 진짜로 얼마 안 걸린다는 의미는 아니고 영주성의 크기에 비해서 짧게 느껴졌다는 의미다.
"딸아이를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지."
"네, 남작님."
확실히 어른이라 그런걸까?
겉으로 느껴지는 노련함이 아카데미의 학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금방 오는군."
남작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리니 여자애 한명이 잔뜩 긴장한 채 우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왔느냐."
"네, 어머니."
"이쪽은 플레아 아이데스다. 라일라 아이데스 경의 아들이자 제도에서 꼬마 영웅이라 불리는 대단한 소년이지."
"이분이 그 영웅님이시군요."
나에 대해서 들은 게 있던 것일까?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은 굉장히 차갑고, 말투도 상당히 차가운 편인데도 불구하고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그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
"이쪽은 샤티렌 쿨리온 내 하나뿐인 딸이다."
"반갑습니다."
쿨리온이 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단순한 인사뿐이었지만 나에대한 존경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인사였다.
'아닌가, 원래도 이렇게 완벽하게 인사하는 사람인가?'
자의식 과잉은 그만두도록 하자.
"그러면 들어가지."
남작을 따라 안으로 식당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건 큰 식탁위에 펼쳐진 수많은 음식들이었다.
남작은 당연히 상석에 앉았고, 어머니가 나보다 높이신 분이긴 했지만 남작이 초대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식탁의 왼쪽에, 내 맞은 편엔 남작의 딸인 쿨리온이 앉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딸에게 아카데미 생활을 알려 줄 수있나? 아직 들어가려면 반 년도 넘게 남았건만 매일 설레어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거든."
"그런적 없습니다."
"아카데미 생활 말씀이시죠?"
가감없이 그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쿨리온이 입학 할 때쯤이면 아카데미의 분위기도 엄청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정말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행정 과정은 물론이고, 역사, 회계, 수학 등 많은 분야의 지식을 배워요."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 아카데미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의지가 대단한데?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많이 가고 싶나봐?
"일단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하는 건 평민들, 그리고 중앙파귀족 중 세력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아가씨와 비슷한 지방 출신 분들은 상대적으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죠."
굳이 쿨리온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아카데미의 분위기와 쿨리온은 별개였으니까.
쿨리온의 입장에선 내가 쿨리온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
'근데 원래 대화엔 반전이 중요한 거거든.'
반전까지 가지 못하고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아니고 어린애를 속여 넘기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반전이 준비 되어있기도 하니 쿨리온에게 시비를 거는 데 아무런 부담감이 없었다.
"... 왜 그들은 공부를 소홀히 하죠?"
한 성깔 하는 아가씨인가 본데? 살짝 시비를 걸었다고 동경어린 눈빛은 갖다 버리고 노려보는 걸 보면 말이야.
"그분들은 저 같은 평민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물려 받을 땅이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높은 성적을 받아서 관직을 얻어내야 하는 평민과, 하위 중앙파 귀족들과는 출발 선이 다르죠.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 않고 적당한 지식만 가져와도 영지를 운영하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으니까 말이에요."
사나운 눈빛이 조금 사그라 들긴 했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찬 얼굴이었다.
'슬슬 달래줘 볼까?'
"하지만 역으로 아카데미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게 지방파 귀족분들이에요."
"네? 아까는 공부에 소홀히 하는 집단이라면서요?"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은 맞지만 단지 그 역할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무슨 역할을 하는 데요?"
"갈 곳 없는 뛰어난 인재와, 그 인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엮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죠."
파벌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파벌은 졸업과 동시에 최소한의 인연의 끈과 함께 사라지는 게 보통이지만 최측근이라 불리는 핵심 인력들은 아카데미 졸업 후에도 정식적으로 밑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다.
"세가 큰 중앙파 귀족들은 굳이 다른 사람을 신경쓸 필요가 적습니다. 중앙파 귀족 중 가장 큰 귀족인 사모아 공작가 정도가 아니라면 어차피 졸업후 부모님의 관직에 따라 자신도 승승장구 하며 사회에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 텐데 굳이 아카데미에서 힘을 쓸 필요가 없죠."
"지방파 귀족들은요?"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없는 중앙과 달리 지방은 살벌한 곳이니까요. 약소한 세력은 약소한 세력대로 자신을 지켜줄 우군을 찾아서 친분을 쌓고 강한 세력은 강한 세력대로 자신의 힘이 되어줄 약한 세력과 친분을 쌓습니다."
그리고 쿨리온 남작가는 약한 세력에 포함되는 곳이지.
"하지만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누구죠?"
"약하게 태어났으나 큰 세력을 얻고 싶어하는, 이른 바 야망가들이죠. 어떻게든 자신의 세력을 키워야 하기에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상대적으로 영입이 쉬운 약소 귀족가나 평민들에게 발품을 팔며, 수하들에게 무엇 하나 쥐어 줄 수 없지만 미래에 성장할 자신을 믿고 따라 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게 나야, 빠 둠빠 두비두바.'
"아가씨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어떤 집단에 들어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에게 제일 중요한 건 다른 세력과의 관계라는 걸 명심해 두세요. 최대한 강한 세력의 파벌과 친해져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절대 척을 져서는 안됩니다."
이렇게까지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올지는 몰랐는지 남작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은 어느 집단에 들어가시나요?"
"저는 평민이니까요.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죠."
"아,"
쿨리온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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