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방학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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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아카데미에서만 있어서 그렇지 제도에는 수많은 암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흑마법사들도 음지에서 힘을 기르고 있다.
모든 세력이 제국이 약해진 걸 뻔히 알고 있다.
저번에 언급했던 동부 제국도 호심탐탐 제국을 노리고 있고, 북부의 야만족들이 침공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물론 제국이 그렇게 만만하진 않지.'
외세의 침략 정도는 충분히 막아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충격이 차근차근 누적돼서 결국 산산히 조각 나고 말겠지.
3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미래의 일이다.
"남은 6년간 열심히 노력하면 꼭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어린 친구들의 동심의 깨뜨릴 순 없겠지.
아이들에게 희망을 잔뜩 심어준 후 자리를 떻다.
마을 한 바퀴를 크게 돌고 돌아오자 플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자시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나가면 어떡해!"
"밥 먹기 전에 산책 좀 할 수 도 있지 뭐가 문제야."
잔뜩 뚱해져 있는 플린이었지만 부드럽게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니 천천히 표정이 풀어져 갔다.
"오빠가 밥 해줄까?"
"이미 내가 했어. 오빠는 늘 뒷붕을 치더라."
화난 거 풀려면 이런 거짓말도 섞어줘야 하지 않겠니.
"그러면 밥 먹으러 가자."
플린을 들어올린 채로 이동했다.
내가 아무리 근력이 약해도 아직 13살 밖에 안된 어린애 정도는 들고 움직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그렇게 힘들어 할 거면 들지마!"
"미안하다..."
5발자국도 움직이긴 한거야!
플린이 만든 밥은 꽤 맛있었다. 나중에 군대 가면 취사병으로 들어가라.
***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안 돼 아들, 남작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잖니. 최대한 예쁘게 하고 가야지."
예쁘장 하게 생긴 정장을 입고 팔자에도 없는 화장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게 다 어머니의 아들 자랑 때문에 그렇지.'
내가 온 다음날 출근 하자마자 내 자랑을 엄청 하고 다니셨다고 한다.
아들이 제도에서 훈장을 받아왔으니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너무 빠르게 일이 커져 버렸다.
'어차피 한 번 정도는 만나는 게 좋아서 상관 없긴 한데...'
자기 아들이 훈장을 받았다고 상사한테 보고 한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하다가 남작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나름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큰 일이 있으면 주군한테 보고부터 해야지 왜 자랑을 하고 다니냐고!
"가면 쓰면 안돼요?"
"우리 아들 잘생긴 얼굴을 왜 가려?"
너무 과하게 잘 생겨서 그렇지.
나는 군주가 되고 싶은 사람인데 얼굴 팔아먹고 다녀서 뭐해.
내 얼굴은 내 사람한테만 보여주면서 사기를 올리고 충성도를 높이는데 사용하면 족하다.
'이상한데 코 꽤이는 거 아냐?'
남녀역전 세계의 쿨리온 남작을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괜히 내 미모에 관심을 가지고 소유욕을 보이면 어떻게 해?
'자기 기사의 아들이니 건드리기도 쉬울 테고...'
아냐, 괜찮겠지.
나한테는 만능 방어막인 은급 훈장이 있으니까. 속으로는 엄청난 소유욕을 가져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거야.
단순히 얼굴만 보고 바로 나에게 손을 뻗을 정도로 멍청이라면 오히려 이권을 뜯어낼 수 있고 생각을 하면서 은연하게 압박을 가해온다면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 전에 내가 커져버리면 그만이다.
'근데 진짜 미치도록 잘생겼네.'
거울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잘생긴 소년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히려 화장을 해서 괜찮을 수도?'
원판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화장을 해서 강화되는 효과가 아주 미미했다.
조금 정도는 더 나은 것 같았지만 화장한 티가 많이 나서 내 원래의 외모를 가리는 방법으로 써도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화장을 해서 잘생겨 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들이 너무 잘생겨서 화장이 안 먹는다."
"적당히 격식 차리는 정도만 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요?"
"안돼! 남작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
아카데미에선 백작가 딸래미랑 반말하고 공작가 후계자랑 적대적이고 후작가 딸래미를 꼬시려고 하고 있는 데 남작이 무슨 대수라고.
중앙파가 강세인 현재로 서는 마디안 남작가가 쿨리온 남작가 보다 위명이 더 높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손길이 내 등에 부딪히겠지.
'이게 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거지 뭐.'
여기가 난세였어봐. 적당히 깔끔하게만 가도 충분할텐데 여기선 남자라고 이렇게 까지 단장을 시키는 거잖아?
"이러다가 약속 시간에 늦겟어요..."
"늦진 않을 거야. 쿨리온 성이 여기서 먼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내가 어머니에게 풀려난 건 10시가 넘어서였다.
6시 부터 일어나서 준비했으니 4시간을 꼴아박았다고 볼 수 있지.
'4시간의 결과물 치고는 너무 미약한 것 같지만 말이야...'
솔직히 화장한 피부보다 원래 피부가 더 예쁘다.
역시 매력 97의 위력.
"자 그러면 출발하자."
어머니는 말을 타고 출근하시지만 오늘도 말을 타고 출근했다가는 4시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어머니가 어제 미리 빌려온 마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쿨리온 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서 간단한 검수가 있었지만, 우리 어머니가 누구인가, 구성원이 20명도 안되긴 하지만 나름 쿨리온 기사단의 단장 이시다. 얼굴만 보고 쓱 하고 통과됐다.
"점심 약속이었죠?"
"그래, 아마 샤티렌 아가씨도 같이 드실 거야."
샤티렌이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오빠쪽은 나름 아카데미 선배고, 난세에서도 간간히 등장해서 들어봤는데, 샤티렌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들어본적이 없다.
쿨리온의 장남이 여동생이있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설마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인가? 의심이 들뻔 했다.
'오빠쪽은 정말로 무난한 군주였는 데 말이지.'
여동생은 어떨까? 오빠보다 뛰어날까? 아니면 무능할까?
어느 쪽이든 대세에 영향은 없었다. 뛰어나면 뛰어난대로, 무능하면 무능한대로 굴릴 수 있었으니까.
"저희는 그동안 뭐하고 있어요?"
"아들은 화장이랑 옷차림이 망가지지 않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아무런 거리낌 없는 어머니의 말에 내가 남녀역전 세계의 남성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남자라는 성이 강조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애들을 영입할 때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신경 쓸 세도 없이 몰아 붙혔다.
훈장을 받을 때에는 영웅의 입장으로 받은 거라서 마찬가지로 성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인 나를 자신의 군주에게 소개시키는 상황이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외에는 아무런 신분도 없었고 따라서 남자라는 성별이 많이 부각됐다.
화장을 한 뒤 옷을 예쁘게 입고, 옷이 흐뜨리지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군주로서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헛웃음 마저 나왔다.
어머니한테 화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입장에선 지극히 상식적으로 행동하신 것 뿐일 테니까.
"어머니, 혹시 옷 좀 사주실 수 있어요?"
"옷? 지금은 입어보지도 못할 텐데? 이따가 남작님이랑 식사를 마친 후에 사줄게."
"어머니, 지금 저를 남작님께 저를 소개해 주시려고 가는 거죠?"
무거운 분위기로 어머니를 올려다 보니, 살짝 움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남작님은 제가 훈장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고자 하시는 거고요."
"그렇지?"
"그런 남작님이 제가 남자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싶어 하실까요? 제도에서 꼬마 영웅이라고 불렸던, 저라는 사람 자체를 보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요?"
어머니는 착하신 분이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 할 줄 알며 아들의 말을 그냥 넘어가시는 분도 아니지.
"... 엄마가 잘 못 생각했네. 엄마는 아들이 남작님이랑 만나는 첫 자리니까 최대한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어서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시키고, 예쁜 옷을 입혔어. 엄마가 미안해."
"괜찮아요. 실수 하실 수도 있죠."
"그러면 무슨 옷을 입고 싶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저희 마을에 갔다와도 될까요? 입고 싶은 옷이 있어서요."
"그래 갔다오자."
아직 시간은 10시 반 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했다.
"우리 아들 많이 변한 것 같아."
집으로 향하는 마차안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들이 처음 아카데미에 갔을 땐 많이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의젓하게 자란 아들을 보면 마음이 좀 혼란스러워."
묵묵히 듣고있기만 했다.
"언제나 엄마한테 의지하던 아들이 스스로 의견을 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견한데, 마음 속에서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거든, 이렇게 자라다가 어느순간 내 손을 떠나가는가 싶기도 해."
"저는 어디 안가요. 어딜 가더라도 어머니한테는 자주 연락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카데미 다니더니 애늙은이가 다됐네."
그렇게 말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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