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캐를 꼬시는 법-76화 (76/312)

〈 76화 〉 방학­5

* * *

아이데스 마을에서의 일과는 아카데미에서의 일과와 비교하면 천국과 같았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점심시간에야 친구들이랑 좀 놀고 다시 공부하다가 친구들이랑 가벼운 잡답 후 전략 회의를 진행한 다음 방과후를 진행한 뒤 기숙사에 돌아와서 과제까지 진행해야하는 아카데미와는 다르게 이곳에선 늦잠도 자도 되고 당장 할일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뒹굴뒹굴 굴러도 되고.

심지어 아름다운 어머니와 귀여운 여동생도 있으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오빠 일어나!"

누군가가 내 몸에 떨어져 왔다.

누군가가 어떤 이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플레아의 하나뿐인 동생 플린 아이데스였다.

자라면서 망나니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여동생이었지만 아직은 변태끼가 보이지 않았다.

난세에서도 플린이 제대로 망나니 짓을 시작하는 건 본격적으로 검을 배우고 아카데미까지 들어갈 나이가 돼서야 조금씩 기세가 들어오는 정도니까, 지금시점에서는 아주 순수한 동생이었다.

"윽, 그냥 흔들어서 깨우면 되지 이렇게 과격하게 오빠를 깨워야 겠어?"

"아까부터 계속 깨웠는데 5분만, 하면서 계속 미뤘잖아! 그래서 충격요법으로 오빠를 깨우려고 한거지!"

"그래? 그러면 2시간만 더 잘 테니까 깨우지 마."

"일어나아!"

하나 뿐인 오빠의 귀에다 괴성을 내지르는 여동생의 집녑에 결국 이불을 날리고 일어났다.

"하아암, 오빠 아직 졸린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떴어! 엄마도 일 가시고 우리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까지 잘 거야!"

"플린은 모르겠지만 오빠가 아카데미에서 엄청 고생하면서 지냈어. 모처럼 집에 와서 편하게 쉬고 싶을 뿐인데 플린은 오빠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은 거야?"

가족이라도 플레아의 미모쯤 되면 효과가 굉장한 걸까?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고 플린을 바라보니 플린이 흠칫 굳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바라보지마! 내가 잘못 한 것 같잖아."

"흑흑, 오빠는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손등으로 눈 주변을 비비며 우는 척을 하니 플린이 당황한 기색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게... 아무리 방학이라도 제대로된 생활 습관을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오늘 딱 하루만 편히 쉬겠다는 건데 그것도 안돼?"

플린을 빤히 바라봤다.

요즘엔 너무 자주써먹어서 시에린은 커녕 미네타나 라이넬에게도 잘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플린은 이런 공격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다보니 표정이 쑥쑥 바뀌었다.

'볼만하네.'

이제 슬슬 그만 둘까?

"장난이야. 잠 좀 깨려고 우리 플린가지고 장난 좀 쳐봤어. 덕분에 잠 다 깼다."

"... 뭐?"

플린의 화가 터지기 직전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탄을 해체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금방 안정화 됐다.

"그러면 오빠는 마을 한 바퀴 돌고 올게."

잠옷 위에 옷을 입고 가면을 썼다.

길게 나갔다 올게 아니니까 이렇게 입어도 괜찮다.

더운 여름이라서 잠옷은 반팔, 반바지인데, 외출복은 남자라고 긴팔에 긴 바지를 입고 다니까, 다른 사람이 눈치 챌 일도 없다.

'어디를 가볼까.'

참고로 말하면 아이데스 마을엔 아무것도 없다.

흔히 주인공의 초기 성장 요소로 사용되는 던전도 없고, 숨겨진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재라고 해봤자 아이데스 일가가 전부고 심지어 주변에 몬스터를 비롯한 위협이 없어서 용병들 조차 드르지 않는다.

'게다가 적대국가의 국경 근처라서 상인들 조차 별로 안 다니지.'

게임을 플레이 하는 입장에선 저주 받은 땅이라고 평가 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나쁜 땅이지만 플레아 아이데스에게는 아주 중요한 땅이다.

'고향이라는 굉장히 강력한 명분이니까.'

예를 들어 제국의 동부 건너 편에 있는 적대 국가가 제국을 공격해 왔다고 하자.

아무리 제국이 망해가고 있어도 저력 자체는 있는 국가기 때문에 동부 왕국이 총력을 기울여도 결국 제국이 승리하게 돼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다들 전공을 얻겠다고 동부로 몰리겠지.

최종적으로 파병을 결정하는 건 중앙파의 귀족들이 정하게 될테고.

하지만 동부에 자신의 고향이 있으면 어떨까?

'고향을 지킨다.' 정도의 명분이면 아무리 중앙파라도 무시 못 한다.

로비 없이 그냥 넘어가 준다는 뜻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적은 돈과 노력으로 파병권을 얻을 수 있겠지.

따라서 아이데스 마을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마을이다.

'그렇다고 크게 할 게 있는 마을은 아니지만.'

동부왕국이 제국의 동부를 침공하기 전까지 망해 버릴 정도로 작은 마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병력을 뽑아 낼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시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라일라 라는 대단한 기사가 짱 박혀 있는 마을이라서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질 정도로 저력이 적은 도시도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초 훈련을 진행 해 놓으라고 부탁드려 놓으면 훨씬 더 잘 버틸겠지.'

어쩌면 내가 병력을 이끌고 왔을 때도 유의미한 병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지만, 대국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한다.

때문에 내가 방학이라고 우리 마을에 내려왔을 때 상당히 편한 마음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고 할 일이 아예 없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거든?'

어디를 가든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존재한다.

시간 대비 성과가 딸리는 게 문제지 아이데스 마을에서 있는 모든 시간을 아무런 의미없이 멍때리면서 보내진 않을 것이다.

'일단 쿨리온 남작가쪽이랑도 친분을 쌓아야 하고, 될 수 있으면 변경백이랑도 친분을 쌓으면 좋지.'

쿨리온 남작가는 전쟁쪽으로는 영 답이 없는 남작가였지만 변경백은 동부 왕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다.

그쪽과 협업해서 내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서든 아니면 공을 가로채기 위해서든 변경백과는 친분을 쌓는 게 좋다.

'그렇다고 꼭 필요 한 건 아니고. 보너스의 의미 정도가 있는거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마을을 돌고 있을 때 나를 알아 본 주민들이 나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아카데미 생활을 괜찮으셨어요?"

형식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다시 걷다보니 이번엔 애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플레아 오빠! 오랜만이야!"

"형! 그동안 잘 지냈어?"

플레아는 기본적으로 착한 놈이다.

내가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나 이전에 이 몸을 차지하고 있었던 플레아 아이데스는 상당히 착한 놈이었다.

그리고 애들을 좋아하고 잘 놀아주기도 했지.

이는 난세를 진행함에 있어서 은근히 크게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린애들에게 호감을 쉽게 쌓았는데 쓸만한 인재 중에선 어른들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 6살 짜리 어린애도 10년이 지나면 16살이다.

16살 정도면 뭐, 전쟁에 데려가도 괜찮은 나이 아니겠어? 그것도 소녀병이 아니라 기사로 끌고 갈 건데.

'안타깝게도 아이데스 마을엔 쓸만한 아이가 없지.'

어릴 때 부터 각 잡고 키우면 그럭저럭 쓸만한 기사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고작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괜히 재능 떨어지는 애들을 키우느니 그 시간에 재대로 된 기사들을 육성하고 어중간 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정예병 정도로만 키워내는 게 나았다.

"응, 나는 잘 지냈지. 너희는 어떻게 지냈어?"

속으로는 이렇게 차가운 생각을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답하는 나에게 약간의 혐오감이 들었다.

어차피 이 애들을 병사로 키울 생각은 아니잖아?

이 애들이랑 내 생각은 별개라고.

억지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애들이랑 즐겁게 떠들었다.

내가 플레아 처럼 착하고 애들이랑 친화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순수한 아이들의 눈망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자 아카데미를 다니며 쌓여왔던 피로감들이 눈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애들이 진짜 순하네.'

애들이라고 하면 빽빽 거리고 말 안 듣고 뛰댕기는 장난 꾸러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오빠! 나도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당연히 들어갈 수 있지. 에이아는 우리 어머니 밑에서 수련 받고 있지?"

"응! 매일매일 열심히 수련받고 있어!"

"열심히 수련해서 아카데미의 입학 심사를 통과하면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을거야."

예상했겠지만 시뻘건 거짓말이다.

꼬마아이의 이상을 지켜주기 위한 착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소녀의 재능이 충분하고 어머니 밑에서 충분히 실력을 끌어올린다면 아카데미 시험에 합격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에이아가 올해 몇 살이었지?"

"열살!"

미안 에이아,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16살이 되기 전에 제국 아카데미는 사라질 거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