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방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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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모 게임의 유명한 대사를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로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여자들의 싸움에 내가 끼었다간 고래 사이에 끼인 새우마냥 펑! 하고 등이 터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구경 정도는 쉽게 가능했다.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두 여자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으니 나하나 낀 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꽤 이름 날리는 용병단인 모양인데?'
아까도 말했다 시피 이곳은 고급 여관이었다.
용병들 보다는 상단의 고위 인력들이나 머무를 것 같이 생긴 곳이었는데,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걸 보니 규모가 엄청난 용병단이 큰 의뢰를 성공하기라도 했나보다.
'지금 시점이면... 오우거를 잡았나본데?'
시드에 따라서는 내가 지나갈 때 까지 안 잡혀서 오우거에게 습격 받은 적도 몇 번 있었기 때문에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무리 규모가 큰 용병단이라도 이런 고급 여관으로 올 돈이 항상 남아도는 건 아닐 테니까, 아마 오늘 오우거를 잡아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이데스님, 오늘 용병단 하나가 여관에서 묵는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조차싸움을 할 정도로 생각이 없는 것들일지는 몰랐습니다."
카밀레 경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괜찮은 데.'
좋은 구경 거리가 생겼으니까. 오히려 기쁘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른 손님들이 힘들시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기본적으로 가격대가 높은 여관이다 보니 용병들이 행패를 부리는 걸 본 적이 없었는지 종업원이고 손님들이고 얼어붙어서 용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압할까요?"
"그게 가능해요?"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용병단이지만 저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카밀레경이 용병들을 향해 걸어갔다.
절재된 걸음걸이,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포스,
누가봐도 간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이봐, 다른 손님들이 불안해 하는 거 안 보여? 저급한 쌈박질은 여관 밖에서 하는 거 어때?"
"당신이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들어!"
술에 단단히 취한 듯 용병이 카밀레 경에게 삿대질 했다.
"하아... 퇴역기사야. 은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현장감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너희들 전부 쓱싹 해 버리는 수가 있어."
오, 세게 나가시는데?
아무래도 진짜 싸우기는 싫으셔서 평화로운 협박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시는 모양이다.
"뭐 기사?"
"아니 기사가 왜 여깄어?"
여긴 고급여관이니까 있을 법도 하지.
용병들이 당황해 하면서도 주춤주춤 하는 걸 보니까. 카밀레 경이 블루아이라도 발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 싸우는 거 안 말려. 싸울 거면 밖에 나가서 싸우면 되지 굳이 안에서 싸워서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받을 필요가 없잖아?"
용병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역시 강자 앞에선 다들 분노조절 잘해가 되는 구만.'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긴 시간의 침묵 후 어떤 용병하나에게 나온 사과의 말로 분위기가 풀렸다.
카밀레 경도 분위기를 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투기장이 끝난 것 까지는 괜찮은 데 문제는 우리에게 관심이 집중됐다는 것이다.
"저기 저 사람, 귀족이려나?"
"귀족이지 않을까? 아무리 은퇴했다고 해도 기사의 호위를 받고 있잖아. 게다가 저년, 기세가 장난 아니었다고. 은퇴했다는 말도 거짓말일지도 몰라."
"왜 자기 실력을 낮추려고 거짓말을 해?"
"저 기사가 지키는 저 남자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지. 과한 관심을 받기 싫어서 퇴역기사라고 거짓말을 친거야!"
이런 류의 지레짐작이면 차라리 나았다.
"근데 얼굴 장난 아닌데? 어떻게 하관만 가지고 저런 분위기를 내지?"
"오늘 밤은 저거다."
음담패설도 어마어마하게 흘러나왔다.
솔직히 미간이 찌푸려 질만큼 수위높은 발언들이 계속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신경써봤자 나만 피곤해 질테니까.
그런데 우리 카밀레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너희들,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는 것이냐?"
묵직한 분위기가 여관을 짓눌렀다.
제대로 단련 된 기사는 아무리 많은 병사가 달려들어도 상대 할 수 없다.
일반 병사가 기사를 쓰러뜨리는 법은 기사의 마력이 전부 소진 될 때까지 달려드는 것 뿐.
용병들도 그걸 알아서인지 순식간에 침묵했다.
"다시 한 번 도련님을 향해 망발을 내뱉는 년이 있다면 내 즉시 너희의 목을 전부 쳐버리도록 하겠다."
의미 없는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놀랍게도 명분은 충분했다.
실제로 카밀레 경이 용병단 전원의 목을 베어 버린다고 해도 도의적으로 비난 받을 뿐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은급 훈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훈장의 위력이 이렇게 강력하다.
딱딱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을 때 여관안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단장!"
용병들이 입을 모아 입구를 바라봤다.
"넌 큰일났다. 우리 단장은 무려 훈장까지 받으신 몸이라고! 아무리 기사라도 우리 단장님을 건들 순 없을걸?"
"그리고 익스퍼드의 경지에 다다르신 분이시기도 하지!"
설명충 고마워.
'근데 용병이 훈장까지 받아? 도대체 무슨짓을 했길래.'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니 나름 익숙한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뭔일이여?"
"당신이 이 용병단의 단장입니까?"
"예, 제가 이것들 대장이긴 합니다만, 혹시 이것들이 사고라도 쳤습니까?"
"예, 제가 호위하는 분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내뱉더군요."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붉은매 용병단의 단장의 표정이 덜컥하고 굳었다.
단장도 익스퍼드의 경지에 오른 만큼 카밀레 경의 실력을 알아차렸을 텐데, 기사가 호위할 정도의 사람이면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 대충 감이 잡혀오는 것이겠지.
"죄송합니다! 이년들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단장이 고개를 팍 숙였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도련님께 하시죠. 당신들을 용서할지 말지는 도련님이 정해주실 겁니다."
카밀레 경이 나를 바라봤고 단장의 시선도 카밀레경을 따라 나에게 도착했다.
"...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너 아카데미 학생 아니었어?"
단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학해서 저희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죠. 오랜만이에요."
'운명의 장난인 모양이네.'
난세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될 정도의 확률의 일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말도 안될정도로 낮은 확률이어도 대세에 큰 차이가 없다면 게임이 스스로 판단해서 스토리 중 나타나는 상대를 멋대로 바꿔버려서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운명적인 만남, 이라는 걸 유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제작사의 장치인데 개발자들은 이를 운명의 장난이라 불렀다.
집에 가는 도중에 만난 용병단이 하필 붉은 매 용병단이다? 말이 안되는 확률이지만 여기서 붉은 매 용병단을 만나든 검은 발굽 용병단을 만나든 큰 차이가 없으니 운명의 장난이 발동해서 굳이 붉은 매 용병단을 내 앞에 대령한 거겠지.
"미안하다! 우리 애들이 높으신 분들을 뵌 적이 없어서 너무 멍청하게 행동했어."
"제도 근처에서 활동하시는데 귀족들을 뵌 적이 없다고요?"
"의뢰 받을 때는 나랑 부 단장만 움직이니까. 아무튼 진짜로 미안해!"
단장이 고개를 팍 숙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뜯어 내도 되고 흔쾌히 용서해 줘도 된다.
'작정하고 뜯어내면 진짜 장난 아닐텐데.'
몬스터를 잡은 걸로 훈장까지 받아낼 정도로 정예 용병단이다.
작정하고 덤비면 짭짤하게 이득을 챙길 수 있겠지.
'그런데 나는 용병단 전체가 탐난단 말이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필요가 없잖아.
"저는 괜찮아요. 나름 동업자기도 하고, 단장님이랑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니까, 그냥 용서해 드릴게요."
"고맙다 꼬맹아! 앞으로 너희 상단 호위 비용은 무료로 해줄게!"
...?
'월척이다!'
아마 너무 기뻐서, 그리고 잭스펠의 저력을 알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한 것 같은데 각오하고 있어. 지금은 마차 한대짜리 소규모 상단이지만 몇년안에 수십개의 마차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한 상단이 될테니까.
하나도 안 뜯어 내고 아량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상대가 알아서 갔다 바쳤다.
"대신 앞으로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리 들리면 용서 못 해드려요."
"당연하지! 우리 애들이 그렇게 까지 빡대가리는 아니야."
"그런데 여기까지는 왠일이에요? 수도 근처에서 활동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 도시 근처에서 오우거가 나타났다고 해서 말이야. 이 근처 용병단 다 모아도 오우거를 잡을 만한 병력은 안 나와서 성주가 우리 용병단에게 의뢰했어. 오늘 막 잡고 온 참이지."
단장이 썰을 풀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봤다.
미래의 주인으로서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게 좋겠지?
"그 때 내가 말이야, 이 대검으로 오우거 모가지를 콱!"
그녀의 오우거 썰을 계속 듣고 있다보니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오냐, 내일 보자."
"아침 일찍 출발할 건데 보긴 뭘 봐요."
"집까지 호위해주려고 그러지. 받은 것도 있으니까."
"가는데 16시간은 꼬박 걸리는 먼 곳이에요. 괜히 저 호위하려면 3일은 낭비할 테니까 그냥 푹 주무시기나 하세요."
아무리 고마워도 3일의 시간을 통째로 날리는 건 부담이 있었는지 단장의 모습이 굳었다.
"카밀레 경의 실력도 뛰어나니까 괜찮아요. 그럼 그렇게 알고 들어가 봅니다!"
재빠르게 지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벌써 달이 밤하늘 정중앙에 걸려있었다.
'오늘은 꽤 재밌게 논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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