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사모아12
* * *
"일곱!"
"서... 선배... 힘들어요."
듀플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야, 고작 7번 했어. 내가 뭐 대단한 걸 시켰어? 그냥 맨몸 스쿼트 시킨건데 이것도 못 버티는 건 좀 너무 하지 않아?"
육체가 쓰레기인걸 어떡해요!
내가 운동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운동을 안 해서, 나태해서 가 아니다.
무력 잠재력이 너무 낮아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자리 걸음인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돼요?"
"안돼, 열 번 채우고 쉬어."
개 같은 년 자기는 무력도 높고 운동할때마다 힘이 쑥쑥 늘어서 모르겠지만 나같은 약골한텐 스쿼트 열 번도 힘들다고.
그래도 억지로 다리를 굽히니 앉아지긴 했다.
힘들다 보니 듀플이 알려준 자세와 어긋난 것 같긴 했지만 어떡하겠어. 이렇게라도 횟수를 채워야지.
'시발 개 힘드네.'
땀이 주르륵 흘렀다.
망할 육체를 저주하며 다시 일어나니 나에게로 쏠리는 2학년 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 괴로워 하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나?'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2학년 선배들이 나를 바라 보는 시선 속에 숨겨진 성욕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들 눈깔 돌려라."
듀플의 한 마디에 모든 선배들의 시선이 사라졌다.
이럴 때 보면 든든 하긴 해.
"미안하다. 위치를 잘 못 잡은 것 같다."
"괜찮아요. 선배들이 궁금해 할 수도 있죠."
"여기 말고 달리 장소도 없는데..."
"그러면 그만하죠!"
당연히 안 된다는 대답이 튀어 나올지 알았는데 듀플은 고민 하듯 턱에 손을 올려놨다.
"그래, 그만해야겠다. 괜히 2학년애들의 음흉한 시선에 노출 될 필요는 없으니까."
아, 2학년 선배들이 그래서 나를 봤구나?
하긴 이렇게 작고 귀여운 후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
"그러면 정리하고 들어가자."
"네."
기숙사로 돌아가려 할 때 2학년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운데 두 명을 두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보니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무슨일인지 구경 좀 하다 갈까?"
"좋아요!"
나나 듀플이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당장 2학년 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야, 네가 사모아 공녀님 밑에 있다고 뭐라도 된 줄 알아?"
중심에 있던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숲을 연상케 하는 짙은 초록 색 머리에 무심하면서도 차가운 눈빛, 사모아의 1검 루나라였다.
'오오, 투기장이다.'
"벨리아 그년을 이겼다고 의기양양 해졌나 본데 그렇다고 선배의 말에 반항하는 게 말이나 돼?"
2학년 선배가 루나라의 이마를 톡톡 밀었다.
루나라의 얼굴에서 순간의 짜증이 지나갔지만 2학년들한테 둘러 쌓인 상태에서 분노를 들어낼 수는 없었는지 차분히 화를 가라 앉히듯 짜증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말을 해보라고 개새끼야!"
"야, 너희 뭐하냐?"
상황이 점점 달아오를 무렵 듀플이 개입했다.
돌아갔을 줄 알았던 듀플이 돌아오자 당황했는지 2학년 선배들의 몸이 굳었다.
"왜 대답을 안해? 내가 만만해?"
듀플이 루나라 앞에 섰던 선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그게요 선배님..."
"나는 뭐하냐고 물었다."
선배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듀플 선배, 그렇게 안봤는데 꽤 무서운 사람인가 보네.'
나한텐 늘 친근하고 장난 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하긴 후배 괴롭히는 2학년 여자애들이랑 나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후배를 같은 방법으로 대할리는 없겠지.'
"잘 나가는 후배를 괴롭히는 거야?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야?"
"사주라뇨? 그런거 받은 적 없어요!"
"그러면 그냥 지나가는 애 하나 잡아가지고 괴롭히고 있었다고 해석해도 되는 거지? 요즌 루나라가 사모아 파벌에서 승승 장구하니까 배가 좀 아팠나 보다? 자기보다 배경도 못한 애가 줄 잘 타서 잘 성장한 걸 보면 배가 찢어지겠지, 안 그래?"
"그런 거 아닙니다 선배님!"
"여기가 안이야? 밖이지, 후배 질투할 시간있으면 그 시간에 네 실력을 갈고 닦아. 루나라가 기회를 잡은 것도 평소에 수련을 열심히 해서지 결코 운이 좋아서 그런게 아니란 말이야."
멀리서 듀플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꼰...'
더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죄 없는 후배 괴롭히지 말고 수련이나 해, 안 그래도 수준이 낮은 게 너희 2학년 들인데, 만점자 한 명도 못내면 안되잖아."
듀플이 그 말을 끝으로 루나라를 확 끌고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후배들, 오늘은 선배가 사줄테니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갑자기?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는 분위기 아니었나?
듀플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어떤 생각에서 기원 했는 지 알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희 둘 다 1학년이지? 너희 친하냐?"
친할리가 없다.
루나라와 나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고, 듀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듀플과 같이 다닌 시간이 꽤 길었는데 내가 루나라와 친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 듀플 또한 내가 루나라와는 아무런 친분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루나라는 사모아 파벌이다. 학기초에 사모아 파벌에게 내가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친하고 싶어도 절대 친할 수 없는 관계지.
'우리 둘 사이에 접점을 만드려 주려는 건가?'
나야 땡큐다.
루나라와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얼마를 쌓아도 부족하지 않는 법이다.
혹시 알아? 듀플을 계기로 루나라와 친해지면 언제 한 번 목숨을 구원받을 수 있을지.
"아니요. 처음 얘기 해봐요."
"네, 처음 봽니다. 대신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죠.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 딱딱하네.
'루나라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게임에서도 적으로만 마주하고 직접 이야기 한 게 손에 꼽다보니 그녀의 원래 성격은 알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있냐? 나는 고기가 땡기는 데."
이건 그냥 고기를 먹겠다는 소리겠지?
이세계에서 고기를 먹겠다는 소리는 한국식으로 구워서 먹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아주 가끔 스테이크를 썰러 가자는 의미로 말한 걸 수도 있지만 그건 프레스티아 같은 고위 귀족이나 그러는 거고 듀플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스테이크 보다는 삼겹살이나 구워먹겠다는 의미겠지.
"제가 돈이 없어..."
"내가 사준다니까? 설마 내가 남후배는 사주고 여후배는 안 사주는 차별적인 선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듀플의 손에 이끌려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삼촌! 여기 삼겹살 7인분이요."
"네? 7인분이요?"
"나랑 루나라는 기사반이라서, 좀 많이 먹는 편이거든."
정말 어마어마하게 먹는 구만.
"너는 1인분이면 돼지?"
"그럴걸요?"
종업원 분이 상을 차리시고 본격적으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벨리아랑 싸울 때 어떤 느낌이었어?"
루나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저는 아직도 제가 벨리아 경을 이겼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뭘 믿어지지가 않아. 아무리 근소한 차이였다고 해도, 네가 이긴 거잖아. 혹시 호적수간의 싸움은 처음이었어?"
루나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결투 내내 벨리아 경의 기세가 저보다 훨씬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분명 힘을 아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역공을 가할 줄 알았는데, 제가 이겨버렸으니 사실 지금도 경황이 없어요."
루나라도 얼추 눈치채고 있긴 한가 보구나.
"그래도 결투에서 이긴 덕분에 파벌 내에서 입지는 많이 올라가지 않았어?"
듀플의 말에 루나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코멘트해도 되겠습니까?"
"미안, 내가 너무 예민한 걸 물어봤나?"
"괜찮습니다."
'그렇게 좋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결투에서 승리한 후에 좋아진 대우조차 이런 상황이라면 헬링파벌이 루나라를 노리는 전략을 취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도 슬슬 대화에 껴볼까?'
"실기는 잘 준비하고 계세요? 저희 행정반은 파벌 싸움 났다고 다들 집중을 못하고 있는데."
루나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봤다가 말을 이었다.
"저희도 많이 힘들죠. 파벌내에서 대련은 매일해서 전투에 대한 감각은 꽤 늘었지만, 이번 실기랑은 거의 상관 없는 내용이라서요."
"2학년 애들만 걱정했는데 1학년에서도 만점자가 한 명도 안 나오는 거 아냐?"
듀플이 장난 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최근들어서 실력이 무서운 기세로 상승하고 있는 애가 있거든요."
"그래? 누군데?"
루나라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넬 입니다. 학기 초에도 분명 상위권에 있던 학생이었는데, 최근들어 수련양을 엄청 늘렸더라고요. 아마 저나 벨리아를 제외하면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기사반에 없을 겁니다."
이런데서 라이넬의 칭찬을 듣다니,
어지간히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런 애가 있어서 안심은 되겠네. 걔가 1학년의 자존심은 지켜 줄거 아니야."
루나라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친구는 저희 적 파벌쪽에 속해 있으니까요. 순수하게 안심하기엔 아카데미가 그렇게 따뜻한 곳이 아니네요."
루나라가 나를 슬 내려다 봤다.
'글쎄? 언제까지 적일까?'
나는 프레스티아를 믿는다. 한 번 루나라를 영입하고자 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밑으로 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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