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캐를 꼬시는 법-68화 (68/312)

〈 68화 〉 사모아­10

* * *

"헬링이 웃고 있었다고?"

"엄밀히 말하면 웃고 있던 게 아니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거지만."

웃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프레스티아의 마음은 웃고 있었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으니까.

"그게 말이돼? 자신파벌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패배한 건데 왜 웃어? 그냥 헬링이 표정 관리를 잘한 거 아냐?"

"아냐, 아무리 헬링이라도 자신이 아끼는 기사가 패배했는 데 무표정을 유지 할 수 있을린 없어. 만약 헬링이 일부러 벨리아를 패배 시킨 게 아니더라도 아마 벨리아가 졌을 때를 대비한 훌륭한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무표정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걸거야."

시에린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며칠째 바쁘게 움직여서 그런지 다크서클이 명확하게 박혀 있는 시에린이 한숨을 내 뱉자, 그 모습이 참 아련해 보였다.

"네 말, 확실하게 믿어도 되는거지."

"응."

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복잡해지는 데."

시에린이 노트를 꺼내서 이것저것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건, 벨리아가 패배하더라도 최종적인 승자는 헬링 파벌이 될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정이야. 이러면 설명이 편하지. 벨리아가 패배한 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나는 벨리아가 일부러 졌다고 생각해."

"왜? 두 사람모두 우리 나이 또래에 비해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줬어. 설마 벨리아가 루나라와의 싸움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하는 것 까지 조절 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

나는 안다.

벨리아가 난세에서 얼마나 뛰어난 기사였는지.

아무리 루나라가 남녀역전의 여파로 사모아 파벌의 핵심 기사가 되었더라도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두 여자 사이에 있었다.

"라이넬, 평소에 둘이서 싸운 모습 본 적 있어?"

"둘이서 싸우는 일은 없어. 아무래도 사이가 나쁜 파벌이니까."

지금 하는 회의는 앞으로 우리 세력이 어떻게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 였기에 라이넬과 미네타도 불러서 회의를 했다.

요즘엔 라이넬이 수련에 빠져있어서 얼굴보기 힘들었는데, 오랜만에 본 라이넬의 얼굴은 상당히 늠름해 보였다.

"네가 생각하기에 벨리아랑 루나라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몰라."

라이넬이 즉답했다.

"정보가 없어. 벨리아 그 년은 어차피 헬링의 밑으로 들어갈 게 확실한 년이라서 기사반 시험에서 전력을 내지 않아. 딱 만점 정도만 받을 정도로 행동한단 말이야. 대련도 자기네 파벌애들이랑만 하고."

"루나라는?"

"걔는 좀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늘 가장 높은 성적을 내고 교수님께도 칭찬을 가장 많이 들어."

시에린이 펜을 굴려 열심히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어렵네, 플레아는 왜 벨리아가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서는 구라를 좀 섞여 줘야한다.

내가 이 세상의 원본 게임을 플레이 해본적이 있었는데, 벨리아는 짱짱세고 루나라는 X밥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예전에 헬링 파벌이 운동하는 곳에 가본 적 있다고 말한 적 있었나?"

"어, 하루 가고 안 갔다면서?"

"거기서 벨리아가 헬링이랑 대련하는 모습을 봤어."

당연하지만 구라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프레스티아랑 운동하다가 한 대 처맞을 뻔하고 질질 짜다가 기숙사로 돌아왔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내가 봤을 때 벨리아는 헬링이랑 비교해도 엄청 꿇리지는 않았어."

아무리 프레스티아의 재능이 압도적이라고 하더라도, 벨리아가 훨씬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둘 사이의 실력차는 그렇게 까지 크지 않았다.

분명 프레스티아가 이기지만 나름 좋은 승부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할까?

"헬링... 듣던 바로는 검술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청기사단이 보증한 검술이니까. 그녀가 훈장을 받은 건 뛰어난 용병술 덕분이지만, 그렇다고 검술이 낮게 평가되어선 안돼. 그녀와 같이 다닌 청기사단원들이 헬링의 검술이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공인을 해줬으니까."

"그러면 벨리아가 일부러 졌을 경우를 생각해서 전략을 짜보자. 그 쪽이 더 비 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이니까. 그쪽을 먼저 대비하는 게 맞겠지."

시에린의 다크서클이 실시간으로 짙어지는 것 처럼 보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확실하게 상을 주도록 하자.

"... 왜 일부러 졌을까? 왜 일부러 졌을까."

시에린이 중얼 거렸다.

"자신의 전력을 숨기고 싶었나? 아냐 그건 말이 안 돼. 전력을 숨기는 게 무슨 이점이 있어. 조금이라도 자신의 세력을 과장해서 승기를 잡아야 하는 와중에 왜 전력을 숨겨? 그리고 전력을 숨기고 싶었으면 아예 화끈하게 졌겠지 아슬아슬할 정도로 싸우다가 질 이유가 하나도 없어."

시에린이 빠른 속도로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에린아 잘 생각해봐, 네가 헬링이야, 나는 헬링이라고, 왜 벨리아한테 패배하기를 권유했지? 벨리아가 아무리 충직한 기사여도 너무 위험부담이 큰 행위야. 벨리아도 말은 안하겠지만 나에게 실망했을 테고, 벨리아의 명예가 떨어지고 우리 파벌의 세력이 약해진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밖에 없는 전략인데, 나는 왜 이런 전략을 선택했지?"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 시에린은 정말 멋졌다.

평소에는 정신 어딘가가 해까닥 한 것같이 구는 시에린이었지만 한 번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니 이만큼 든든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세력이 이길 거라는 전제를 깔고 가야 해. 나는 모르는 모종의 이유로 우리는 무조건 사모아 파벌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어. 그렇다면 말이 돼, 헬링이 생각하기에 벨리아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을 가져올거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허울 뿐인 명성, 세력 보다는 실리를 차지할 가능성도 충분하지."

시에린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크흠... 목이 타는 데 누구 커피 좀 타줄 사람 없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이 집중모드의 시에린도 시에린인 모양이다.

주변을 뒤져보니 커피같은 건 안보여서 재빨리 우리 교수님의 방으로 이동해서 커피를 받아 왔다.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눈빛을 빨리 잊은 후 커피를 시에린에게 대접했다.

"아, 꼭 타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고맙다."

시에린이 그 뜨거운 커피를 한 입에 호로록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팔팔끓고 있는 물로 탄 것 같은데, 저렇게 마시고 멀쩡한가?

"도대체 얼마나 큰 실리를 챙길 셈이지? 완벽한 승리보다 더 큰 실리가 있나? 떨어진 벨리아의 명성을 메꿔 줄 만큼 강력한 실리가 있나?"

시에린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아서 손수건으로 땀도 닦아주고 부채질도 해줬다.

우리 참모님이 생각하시는데 최대한 집중할 수있게 도와드려야지.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주변에 달라 붙은 어중이 떠중이들을 정리 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번 결투가 루나라의 승리로 결정남에 따라서 그저 커다란 파벌에 속하고 싶을 뿐인 애들은 전부 걸러지고 오직 헬링 파벌에 속하고 싶어하는 애들만 주변에 남을 테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굉장히 강력한 실리로 작용해서 충분히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아직 부족해. 아무리 벨리아가 패배하는 게 더 이득이라 하더라도, 고작 그 정도로는 벨리아를 납득 시킬 수 없어. 고작 이딴 이유로 평생을 같이 갈 기사에게 패배를 종용했다? 말이 안 돼. 헬링이 벨리아를 지게 만든 이유, 그 결정적인 이유가 뭐지?"

시에린의 말이 끊겼다.

깊은 고민에 빠진 듯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 졌다.

"이렇게 고민하면 피부 나빠지는데."

농스러운 어투였지만 축 늘어진 목소리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시에린의 표정은 점점 피폐해졌다.

머리를 꽉 움켜 지거나 책상에 머리를 박는 등, 상황이 점점 심각해 지자, 이만 말려야 겠다는 생각에 시에린의 어깨를 잡았다.

"시에린! 정신 차려! 당장 답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좀 쉬었다가 하자."

"조금만 더 하면 알 것 같아서 그래."

나를 노려다 보는 시에린의 사나운 눈빛에 몸을 움찔 떨며 뒷걸음질 쳤다.

목소리도 분노를 억누른 듯 강렬해서 진심으로 겁을 먹었다.

"미안, 내가 지금 너무너무 예민해서, 지금 건들면 아무리 상대가 우리 이쁘고 귀여운 플레아여도 미소보다는 빡침이 먼저 마중을 나갈 것 같으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아주지 않을래?"

"어... 알았어."

어느정도 진정이 되긴 했는지 아까와 같은 자해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양손을 머리에 댄 채 시간만 빠르게 흘렀다.

조금만 더 하면 알겠다는 시에린의 고민은 무려 30분간 진행됐다.

반대로 말하면 30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시에린이 정답을 찾아냈다는 말이 되겠지.

"아, 루나라를 노리는 구나?"

시에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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