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돈을 벌어보자1
* * *
"돈 여기 있다. 다른 사람한테 뺏길 일 없게 조심히 관리해."
"네."
"근데 유니콘이 네 무릎 위에서 잤다며?"
"네..."
안 그래도 아카데미 전체가 그것 때문에 난리다.
원래라면 누구누구가 유니콘한테 선택을 받았다더라 정도로 끝나야 하는 소문인데 하필 그 누구누구가 나여서 아카데미가 떠들썩했다,
훈장으로 얻은 인기가 채 식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유니콘 덕에 내 동정과 미모가 인정 받은 거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애들이 내가 동정인 것 까지 안다고 생각하니까 좀 그러네.'
아직 내 머릿속에선 동정의 가치보다는 처녀의 가치가 더 높으니까, 동정은 못해서 아직 동정인 것 같잖아.
학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뒤 돈을 조심이 품 안에 집어 넣었다.
'일단 목돈을 구했네.'
80골드는 난세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었지만 사업 같은 걸로 충분히 굴릴 수 있을 만한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업을 하기엔 너무 바쁘지.'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
이곳이 순도 100%의 현실이었다면 능력, 배신 가능성, 성공 가능성을 일일히 따져 가면서 사람을 찾아봤겠지만 이곳은 게임을 기반해서 만들어진 세계였다.
나는 이미 능력 있는 사업가들을 알고 있었다.
'바로 가볼까?'
방과 후도 다 끝났고 하니 바로 아카데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흑마법사 일이 있은지도 몇주가 흘렀지만 아직 약발이 남아있었는지 길을 가다가 나한테 인사를 해오는 사람이 가끔있었다.
일일이 받아주면서 한참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빈민가와 도시 중심의 사이에 있는 시장이었다.
제도에 있는 하나뿐인 시장인 만큼 규모가 굉장히 거대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록 점점 좁아지겠지만 일단 입구도 거대하고 길도 넓찍했다.
'어디에 있으려나.'
내가 찾는 사람이 이 시장 안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늘 랜덤으로 정해졌기 때문이 어디있는지를 특정해낼 수는 없었다.
"저기요, 뭐 하나 여쭤도 될까요?"
"뭔 일이요?"
내 소문이 아무리 제도 전체에 퍼졌어도 나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충분히 있었다. 소문 자체를 못 듣기는 힘들었을 테니 마음에 와닿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거나, 들은 지 오래 돼서 천천히 잊고 있는 중이겠지.
그래도 훈장은 언제나 달고 다녔기 때문에 내 가슴부근만 보면 사람들이 시선은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근래에 장사를 시작한 남매가 있는 장소를 아시나요?"
"글쎼, 그런 애들이 워낙 많이서 말이지, 일단 이 근처에서 장판을 깐 애들은 없수."
"네, 감사함니다."
'여기는 너무 초입인가?'
지리적으로 굉장히 유리한 위치라 상가와 노점상이 빽빽하게 차있는 데 이런 곳에서 장사를 시작할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겠지.
시장의 중심부를 향해 발걸음을 계속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장 중심부에 들어온 듯 사람 3명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길이 좁아져 있었다.
시장을 만들 때 계산을 대충 한 건 아니고 길 좌우에 노점상들이 빽빽해서 이 정도 여유밖에 안 나는 거다.
'오늘 안에 못 만날 수도 있겠네.'
쓸데 없이 고증이 잘 됐다고도 볼 수 있는 게 난세에서도 그들을 만나려면 여유시간을 투자해서 외출하고 낮은 확률로 그들을 만나는 방식으로 접점이 생기는 데 이게 천장 없는 확률이라서 운이 없으면 수십 번을 돌려도 만날 수가 없다.
"저기 말씀 좀 묻겠는데요."
"저기요,"
"말씀 좀 물어도 될까요?"
길을 걸어가면서 수 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한 결과 겨우 그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나보다 1~2살 정도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노점상을 깔고 앉아있었다.
시장을 헤매느라 이미 시간이 꽤 지나있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옵쇼!"
남자애가 씩씩하게 말했다.
여자애는 성격이 소심한지 남자애의 등 뒤에 붙어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번 시드는 오빠랑 여동생인가 보네.'
몰락 귀족 잭스펠의 남매는 언제나 장사를 잘하는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누가 어떤 역할을 하는 지는 시드에 의해서 정해진다.
여자애가 누나가 되면 여자애가 호객 행위나 사람을 상대로 거래하는 일을 전담하고 남자애가 돈을 벌 수 있는 전략을 세우며 남자애가 오빠가 되면 그 반대로 일을 진행한다.
최종적으로 나이가 더 많은 쪽은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해지지만 나이가 더 적은 쪽은 앞으로도 대체가 불가능 한데 어차피 둘 모두에게 충성을 받으면 되는 거라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물건을 좀 봐도 될까요?"
"저희 물건은 싸고 품질이 좋아요. 분명 만족하실 거에요."
이들이 파는 것은 손으로 직접 엮은 듯이 보이는 팔찌들이었는데 수재 치고는 꽤 예쁜 모양이어서 충분히 수요가 있을 듯이 생겼다.
"이 팔찌들, 두 분이서 직접 만든 거에요?"
"네!"
'어떻게 구라를 치는 데 얼굴에 미동도 없냐.'
나는 게임의 지식으로 이 팔찌의 출처를 알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곳에 처음 온 거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갈뻔했다.
'근처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심심풀이로 만드는 팔찌를 가져와서 파는 거였지?'
큰 돈을 벌 순 없었겠지만 두 남매가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을 만한 돈은 벌어드릴 수 있었으리라.
아무리 잭스펠의 두 남매가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초기 자본금을 모아가는 과정은 너무 험난했다.
자본금 0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돈을 쌓아 올렸으니까. 플레이어의 개입이 없으면 게임의 극후반은 가야 그럭저럭 이름있는 상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 것도 없는 거지에서 시작해서 상단을 만들어내는 정도면 엄청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굳이 자본금을 모으는 과정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 데 그 훈장, 진짜 훈장이에요?"
"네, 과분하게도요."
남매가 내 가슴팍에 달려있는 훈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훈장을 바라보는 남매의 눈빛에는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러분이랑 계약 하나를 진행하고 싶은데요."
"네? 계약이요?"
당황한 것 같은 말투와는 다르게 남자애의 눈은 좋다고 호선을 지었다.
계약이라는 건 보통 긴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고정적인 손님이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는 것이겠지.
"팔찌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남자애의 말을 무시하고 가져운 돈 주머니를 꺼냈다.
무려 8천만원이라는 거금이었지만 금화로 꺼내니 그렇게 무겁진 않았다.
"확인해 보세요."
남자아이가 주머니를 확인한 후 덜컥하고 굳었다.
이 오빠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확인한 여자애도 덜컥 굳었다.
충분히 그럴 법 했다.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으니까.
"이... 이걸 왜..."
남자애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왔다.
"여러분과 계약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노예 계약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노예 계약이라뇨. 저는 여러분께 투자하고 싶은거에요."
"투자요?"
남자애의 눈빛은 당신이 뭘 안다고 우리한테 투자해? 라고 묻는 듯 했다.
"그 돈과 꼬마 영웅이 지지하고 있다는 영향력을 드릴게요. 능력이 되는 선에서 마음껏 그 돈을 굴려보세요."
"너무 저희한테만 유리한 계약 아닌가요? 영웅님은 뭘 얻으시는데요?"
"여러분이 제공해 주실 건 아주 간단해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저한테 충성을 바치시면 됩니다. 제 밑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제 세력을 굴릴 돈을 벌어주시면 돼요. 저도 여러분을 최대한 지원해 드릴게요."
두 남매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아직 어려.'
2년 정도만 지나도 두 남매 모두 경험이 많이 쌓여서 이 정도로 넘어오진 않을 거다. 아마 오빠쪽이 이것저것 조건을 달면서 나에게 전속되는 걸 피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둘 모두 어리고 경험도 없다. 그런데 내 기세를 버티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여자애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해갔다.
"어떠세요? 평생 만지기 힘들만한 돈을 지원해 드리는 건데, 한 번 해볼만 하지 않아요?"
두 남매는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고민할 수 도 있는 거긴 한데 아마 내 기세에 눌려서 별 생각 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충성을 바치는 게 고민이 되는 거라면..."
"아니에요!! 할게요!!"
여자애가 크게 소리쳤다.
의외라는 마음으로 여자애를 지긋이 바라보자 바로 남자애의 뒤로 숨어들어가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미 영웅이시고, 훈장도 있으시니까, 충분히 충성을 바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저희가 영웅님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을지..."
"저는 여러분들을 믿어요."
한 번 방긋 웃어주니 여자애의 얼굴이 새빨게 졌다.
"그러면 하시는 걸로 알게요?"
"일단 금화는 다시 가져가 주실 수 있나요? 이런 큰돈을 그냥 들고 있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 어떻게 돈을 굴릴지 결정한 다음에 다시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전히 모기 같은 목소리였지만 뚜렷한 비전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러면 일주일 후에 다시 올게요."
"네! 영웅님, 그 때 다시 봬요."
돈과 매력이 넘치는 상태라서 그런지 첫 만남에 바로 충성을 받아냈다.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되네.'
난세에선 훈장도 받지 못해서 이름값은 지원을 못해줬고 돈도 가끔 생기는 여윳돈만 꾸준히 지원해 줬다.
돈의 절대량도 낮았지만 비주기적으로 돈을 지원해 준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가지긴 힘들었는데 이번엔 한번에 80골드라는 큰 돈과 영웅이라는 위명까지 얹어 줬다.
'이건 실패 할리가 없지.'
든든한 돈줄을 잡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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