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파벌3
* * *
세력을 키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돈? 인맥? 능력 있는 수하? 훌륭한 리더?
제대로 된 세력을 키우려면 위에 언급 했던 것 중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위에 언급된 것 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저 정도로 추릴 수 있겠지.
저 중에선 가장 중요한 것을 따질 필요도 없다. 전부 다 있어야 하는 거니까.
'단지 우선순위가 갈릴 뿐이지.'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 인맥과 수하 '난세'의 지식을 이용하며 수월하게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금은 훈장까지 받은 몸이니, 더 손 쉽게 얻어낼 수 있겠지.
정 안되면, 매력 97에 달하는 얼굴을 쓰지 뭐.
내 능력? 그런 건 남한테 선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스스로 쌓아가는 거지.
그럼으로 남은 것은 단 하나, 돈이었다.
플레아 아이데스가 가난한 캐릭터는 아니다.
어머니가 동부의 작은 마을의 지주니까.
하지만 난세의 승자가 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은 건 아니었다.
훈장을 받을 때 감사금을 받은 지금도 수중에 있는 돈은 1골드가 살짝 넘을 정도 밖에 안됐으니까.
굳이 80골드를 부른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커뮤티니에서 학장한테 80골드를 받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거든.'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난세'의 학장과 이곳의 학장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재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진 않을 테니까 충분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학장의 눈이 똥그랗게 띄였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프레스티아 조차,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릴 정도였으니, 내가 방금 한 말이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세계로 따지면, 무슨 선물을 줄까? 했는데 현금을 말한 여고생 정도인가?'
그것도 8천만원이라는 큰 돈을 이야기한,
"안 되나요?"
"아니, 되긴 하는데, 아깝지 않아? 헬링처럼, 인맥을 얻어가는 게, 돈 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데?"
그건 아줌마 생각이고요.
꼬마 영웅이라는 칭호가 내 생각보다 너무 유명해져서, 굳이 다른 세력에 작업을 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리고 신뢰를 형성하는 초벌작업이 아예 쓸모가 없어졌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세력과 접촉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초벌 작업뿐이니까.
'다른 세력을 먹으려면 결국, 내 세력을 키워야 해.'
프레스티아가 적기사단에 접촉하는 건작업을 잘 쳐 놓으면 중요한 순간에 꿀꺽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접촉하는 거다.
그 확신은 프레스티아가 쌓아나갈 세력에서 나오는 거고.
"저는 헬링님처럼, 제 세력을 세울 생각은 없어서요. 어떻게 살든 가장 쓸모 있는 건 돈이니까요."
"그래, 알았다. 근데 당장은 못 줘. 나중에 한 번 부를 테니까 그 때 와."
"알았어요."
프레스티아가 의심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세력을 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는 걸까? 아니면 왜 돈을 받아갔는지 유추하는 걸까?
프레스티아의 의문에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2교시가 이동수업이라서요. 시간이 빠듯해요. 학장님을 뵙고 온 거라서 혼이 나진 않겠지만, 가뜩이나 흑마법사들 때문에 시계로 전송된 자료들로만 공부했는데, 더 늦어지면 진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아서요."
"그래, 잘 가라."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프레스티아를 조금 더 보고 싶긴 했지만 조만간 나를 불러 낼 것 같으니, 그 때 실컷 보면 되겠지.
***
카이넨이라고 했었나?
나에게 자신의 파벌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던 백작가의 영애는 내 생각보다 훨씬 행동이 빨랐다.
종례가 끝나기도 전에 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가 있는 내 인기를 증명하듯, 교실 밖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 종례를 마치도록 하겠다. 주말이라고 놀 생각하지 말고, 오늘 배운 거 한 번 더 복습하도록."
교수님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뒷문이 열렸다.
평소의 애들이라면 종례가 끝나자마자 뒤도 안 보고 교실을 빠져 나갔을 텐데,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여자만 주시하고 있었다.
카이넨의 모습은 아침과 꽤 달랐다.
옷을 달리 입었다거나 얼굴에 상처가 생긴 건 아니고, 표정부터가 아침과는 전혀 달랐다.
아침에는 기대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무적인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잔뜩 상기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충분히 생각 하셨나요?"
"네, 생각 했습니다."
사실 하나도 생각 안했다.
조금 더 고민했으면, 상대의 기분도 해치지 않고,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도 않는 완벽한 거절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랐겠지만, 굳이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카이넨님의 제안은 정말로 감사하지만, 저는 카이넨님의 밑으로 들어가지 못 할 것 같습니다."
"...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카이넨은 사모아에 비하면 엄청난 숙녀였다.
사모아였다면 기분 나빠하는 게 얼굴에 팍팍 티 났을 텐데 카이넨은 얼굴에 드러나는 상실감마저 나에게 들어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카이넨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저에게는 과분한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거절에 대해 거의 생각을 해놓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원칙을 정했다.
단지 파벌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들진 않기로,
언젠가 위장으로든 진심으로든, 프레스티아의 파벌에 들어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카이넨이 '내가 제안 했을 땐 파벌 같은 것에 관심 없다면서...'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현실사회에서야, 내가 뭘 하든, 달리 따질 말이 없겠지만, 여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 지 몰랐으니까.
"제가 카이넨님의 파벌로 들어가면, 아마 많은 견제와 관심을 받게 되겠죠. 저는 카이넨님의 파벌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너희 파벌은 나를 담을 그릇이 안된다. 정도 되겠다.
조금 더 과장을 보태면 너희 세력 하꼬라서 안 들어가요. 가 될태고.
내가 돌려 말했다는 걸 카이넨은 과연 알아 차렸을까? 내 이미지가 워낙 좋은 상태라 못 알아차릴 법도 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뭔가 몽둥이라도 꺼낼 것 같은 대사였지만 카이넨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어깨가 축 처진 걸 보니 기대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파벌엔 안 들어가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네요."
가볍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자 카이넨이 내 손을 덮썩하고 잡아왔다.
"네! 잘 지네요."
"그럼 저는 강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수많은 인파를 해치고 강의실로 이동했다.
사람이 워낙 많이 모여 있다보니 사고가 날 법도 했지만 마치 홍해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내 앞을 피해줬다.
'역시 사람이 힘이 있어야 해.'
가볍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스캔했다.
사모아나 프레스티아 같은 거물들은 없었지만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이들은 간간히 눈에 띄었다.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아마 누구보다도 내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겠지.'
프레스티아야 내 성격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았다고 쳐도 사모아는 아마 엄청 긴장했을 거다.
그녀의 마음속에 나는 아마 평범한 남성에 불과했을 테니까, 어떻게 훈장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놓치면 안되는 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엔 첫만남이 최악이었지만.'
아마 조만간 접촉이 있을 거다.
훈장도 있고, 프레스티아와의 친분도 어느정도 알려진 참이니 처음 처럼 강압적으로 나를 대하진 못하겠지.
"왔어? 오늘은 좀 늦었네."
평범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마디안과는 다르게 다른 애들의 표정은 꽤나 볼만했다.
'얘들도 소문을 들었었겠지.'
점심시간에는 과제한다고 밥도 안 먹었으니 궁금할 뻔도 했다.
"얘네 개 웃기다? 네가 카이넨 파벌에 들어갈리 없다고 몇번을 말했는데도 계속 걱정하는 거 있지?"
"우리가 언제 걱정했다고 그래?!"
"ㅁ... 맞아, 친구가 파벌에 들어갔으면 축하해 줘야지."
"아니 안 들어 간다니까 그러네?"
꽤 오래 친구로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알고 있는 건 마디안 밖에 없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
라이넬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근데 네가 왜 여깄어? 앞으로는 개인 수련 하느라 안 나온다며?"
"네 얘기만 듣고 갈테니까 빨리 말해줘봐."
"당연히 안 들어갔지. 내가 들어가면 그 파벌이 얼마나 관심을 받을 줄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들어가?"
"마디안, 너도 틀렸네, 너는 헬링 파벌에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다른 데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잖아."
미안 미네타, 마디안의 말이 사실에 더 가까워.
'그것도 완전히 맞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언제 그랬냐, 플레아라면 자기 파벌을 만드는 게 1순위고 그렇지 않으면 헬링 파벌에 들어간다고 했지."
내 상상보다 훨씬 정확한 추리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