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흑마법사3
* * *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난세' 플레이 하면서 늘 거쳐왔던 관문인데 그 많은 플레이 중 단 한 번도 고위 흑마법사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아니면 남녀역전 세상이라 그런 걸까.
어느 것이 사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부터는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혹시 아카데미 학생들? 공간 마법을 뚫고 추적해 올 정도면, 꽤 뛰어난 애들인가 보네."
그녀의 어투는 아주 평온했다. 우리 정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봤다.
"남자애는 귀엽게 생겼네, 내 취향이야."
흑마법사의 끈적한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라이넬과 헤르티아가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가 잡아낼 수 없는 상대였다. 하다 못해 샤카와 맞붙었던 흑마법사 정도 만 됐어도, 우리의 흔적을 보고 찾아올 지원인력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은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마디안을 제외하면 훌륭한 인력들이니까 작정하고 버티면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상대는 못해도 6서클은 되어 보이는 흑마법사였다.
순수한 전투능력만 따졌을 경우, 흑마법사가 동급의 마법사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교수님을 상대하는 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도망 칠 수 있나?'
불가능하다. 건물 밖에 나서기도 전에 붙잡히겠지.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나?'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흑마법사가 우리를 제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이 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지원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40분은 기다려야 해.'
샤카를 유인했던 흑마법사가 멈추고, 샤카가 다시 고아원으로 뛰어 가다가 지원 인력과 합류하고,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가 우리의 흔적을 찾아서 여기까지 와야 한다.
흑마법사가 멈출 때까지 10분, 다시 고아원으로 오는 데 10분, 우리를 찾는 데 못해도 20분,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니야, 답이 있어.'
성공할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단 하나 떠오르는 수가 있었다.
'문제는 흑마법사가 나한테 격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는 건 너무 눈에 뛴다.
이를 악 물고 고민하던 그 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마디안의 모습이 보였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를 주시하는 것이, 내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걸 눈치 챈 듯했다.
'그러면 됐지.'
"너 내꺼 하지 않을래?"
"싫은데요?"
가방에서 단 하나의 스크롤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큐브를 손에 들고 다른 큐브들은 일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바닥으로 내 던졌다.
"귀엽네,"
쾅!
갑자기 다가 온 검은 연기가 연두색 방벽에 막혔다.
아슬아슬하게 깨질락 말락하는 모습이 상당히 불안했다.
고작 4서클이 펼쳐낸 방어 마법임에도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건 흑마법사가 나를 죽일의도로 공격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다들 이리 모여!!"
미네타의 말에 모두 미네타의 근처로 이동했다.
라이넬은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싸울 준비를 했고, 헤르티아도 두꺼운 검을 꺼내들었다.
"ㄴ... 나는 싫어.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마디안이 크게 소리 지르며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려다가 어딘가에 부딪힌 것처럼 크게 넘어졌다.
무릎이라도 깨진 듯 기어서 도망치는 모습에 흑마법사가 크게 웃었다.
"그렇게 기어서 어딜 도망간다고, 그래, 혼자 도망치고 나중에 시체가 된 친구들을 즐겁게 감상하렴."
'이제 시간만 끌면 돼.'
어떻게 시간을 끌지? 무슨 방법을 쓰지?
미네타가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흑마법사가 여유가 넘치는 상태에서 우리를 상대하고 있기에, 미네타의 마법으로도 막을 수 있는 것이지 진심을 발한다면 우리는 금세 전멸할 거다.
"금방 기사들이 와서 당신을 제압할 거에요."
뻥카를 쳤다. 정확히 말하면 거짓말인 것처럼 말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진실을 거짓으로 속이는 데에는 떨리는 목소리와 초조한 마음 가짐 정도면 충분했다.
"금방? 오려면 30분은 필요하지 않을까? 너희를 따라 왔으면 금방 도착해야 하는 데 아직 안 도착한 걸 보면 우리가 보낸 미끼 쪽으로 다 이동한 것 같은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너희 기사단의 전략은 너무 뻔해서 이미 다 알고 있었거든."
흑마법사가 크게 웃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이동할까? 마법은 이미 완성됐거든, 다른 여자애들은 죽이고 너랑 제물들만 데려가면 되겠다."
흑마법사의 손에 검은 마력이 모였다.
길게 영창을 외는 걸 보니, 미네타의 마법 정도는 가볍게 뚫을 수 있을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그래, 나는 살린다고?'
흑마법사 주제에 너무 무르잖아.
마법이 발현되기 일보 직전에 앞으로 뛰어나갔다. 라이넬과 헤르티아를 지나니 어느새 검은 화염이 눈 앞까지 다가 와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연기에 눈을 꼭 하고 감았다.
쾅!!
"플레아!!!"
정신을 차리니, 저 멀리에 흑마법사와 애들이 보였다.
'다행이 죽진 않았네...'
옷도 살짝 그을렸고, 벽에 부딪힌 충격에 몸이 아파왔지만, 죽지 않고 멀쩡한 걸보니, 흑마법사가 내가 앞으로 나오는 걸 확인하고 급하게 마법을 취소한 모양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겨우 바로 섰다.
방금 태어난 동물마냥 위태로운 발걸음이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흑마법사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흑마법사에게 다가가는 동안, 건물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걸어 가는 데만 1분이상이 걸렸으니 시간끌기는 확실하게 했다고 볼 수 있지.
"나 죽이기 전엔 절대 다른 애들 못 건드려."
풀리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부여잡고 흑마법사를 노려봤다.
"그 눈빛, 마음에 들어. 부러뜨릴 가치가 있겠는데?"
"뭐래 시발년이."
"성격 센 남자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건, 내 취미 중에 하나 거든."
흑마법사가 씩 하고 미소 지었다.
"그런면에서 너는 부서질 가치가 있는 녀석이야."
성격한 번 지랄같네.
'물론, 성격이 지랄 같아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긴 해.'
나 같은 성격이었으면 진즉에 다른 애들 죽여버리고 나랑 제물들을 챙겨서 순간이동했겠지.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고아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5분도 안 걸린다. 멀리까지 간 샤카는 아니더라도 고아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력 정도는 충분히 올 법했다.
"... 꼬마 너, 엄청 영악한 놈이구나?"
흑마법사의 표정이 굳는 걸 보면 근방까지 오긴 한 모양이다.
'됐네 그러면.'
아까부터 손에 꾹 쥐고 있던 큐브를 발동시켰다.
미네타가 발현한 마법보다 배는 뚜렷한 연두색 방호벽이 내 몸을 감쌌다.
큐브를 발동시키자마자 흑마법사를 지나쳐서 뛰었다. 뒤에서 마법이 날아오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카르멘의 마법을 믿고 우직하게 달렸다.
'도망도 못 치게 해야 해.'
이대로 기사들이 오면 바로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이미 공간이동 마법은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살아있던건지, 아니면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영웅심리가 발동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정교하게 배치된 흑마석들을 향해, 가벼운 폭발을 일으키는 큐브를 발동 시킨 후 날렸다.
가뜩이나 마나도 없는 몸인데 동시에 두 개의 큐브를 발동 시키려 하니 서클이 비명을 질렀지만, 내 손을 떠나간 큐브는 멀쩡하게 폭발했다.
'됐어!!!'
이런 작은 폭발로 마법진 자체를 붕괴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흐뜨러진 마법진을 고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이 새끼가!"
나를 보며 분노하는 흑마법사의 얼굴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보기 좋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