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첫 번째 이벤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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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마법 교수님은 귀차니즘이 아주 심하시다.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자신의 애제자인 하이네스한테 맡기고 자신의 연구실에서 뒹굴뒹굴할 정도로 의지가 없으시고, 수업을 진행하시는 중에도 하이네스한테 모든 걸 맡긴 채 강의실 한 구석에 이불깔고 들어눕는 일도 많으셨다.
그런 교수님에게 사정사정 해서 조사단의 담당교수를 부탁한 것이니, 이런 잔일 정도는 나한테 시켜도 불평해서는 안 되겠지.
띠링,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에서 계속 알람이 울렸다.
보통 5인 1조로 묶인 팀이 대부분인데다가, 다들 생각을 하고 보내는 건지 밸런스도 괜찮은 편이라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2~4명 사이로 애매하게 보내는 이들이 문제였다.
아무 생각 없이 2명팀은 3명팀과 묵자니 기사반 5명이나 마법반 5명이 나오기도 하고, 적대적인 파벌들이 같은 팀이 되지 않도록 조율도 해야했다.
조별과제의 경우, 사회에 나가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팀을 이루어도, 잘 해쳐나갈 능력을 키우기 위해 랜덤으로 묶지만, 이건 실전이었으니까, 내가 고생하면 임무의 수행성을 높일 수 있는 데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24시간을 꼴아 박아서 만든 팀을 교수님께 전송했다.
'으으, 졸려, 지금이 몇시야.'
시계를 보니까 9시였다.
21시가 아니라 9시,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잠을 청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낮밤이 바뀌는 것은 원하지 않았음으로 억지로 일어났다.
'아우, 어질어질하네.'
현실에선 하루 정도 잠을 안 자도 나름 멀쩡하게 움직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팔다리에 철근이라도 달아 둔 것 마냥 무거웠다.
밥이라도 좀 먹고 오면 나을까 싶어서 기숙사 밖으로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조식은 8시까지 밖에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가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씻을 걸 생각하면 나도 이곳사람이 다 됐구나 싶었다. 현실에선 밖에 나갈 일도 잘 없고, 나간다 하더라도 편의점 정도라 간단히 세수정도만 하고 나갔는데...
점심은 12시가 넘어야 주고...
그렇게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이왕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 지원 받은 돈으로 장비나 살까?'
제도 에서 직접 내린 임무다 보니, 임무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량의 지원금이 배분 됐다.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장비 정도는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내가 전투 인력인 건 아니었지만, 아무 것도 없이 몸만 달랑 가는 것 보다는 최소한의 방어구 정도는 챙겨가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
플레아: 같이 장비 사러 갈 사람?
시계를 조작해서 채팅을 보냈다. 다른 기술은 전부 현실에 비해 뒤쳐지면서 허공에 자판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시계를 보고 있다 보면, 역시 게임적 허용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이건 좀 말이 안 되잖아?
'일단 설정상 엄청 비싼 시계였지?'
워낙 복잡한 마법으로 이루어진 시계인 만큼 잃어버리면 평민의 평균 생활비의 수십배에 달하는 금액을 아카데미에 지불해야 했다.
다행히 망가뜨리는 건 수리가 가능해서, 수리비만 지불하면 된다. 그것도 존나 비싼 게 문제지만.
마디안:나나! 나 갈래!!!
라이넬:마디안 너는 무슨 장비를 사려고? 넌 플레아랑 다르게 서클도 아직 못 만들었잖아. 방패라도 사려고?
마디안:플레아가 간다는 데 내가 안 갈 순 없지!!!
마디안,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소심한 애였는데, 친해지면 친해질 수록 애가 활발해 지더니, 요즘엔 텐션이 미쳐날뛰고 있다. 당장 느낌표의 수만 봐도 높은 텐션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라이넬:일단, 나도 같이 가자, 무기는 기사반에서 빌리면 되지만, 달리 필요한 게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마디안:미네타는 안 갈거야?
하이네스:음, 나도 같이 가지 뭐.
의외네, 미네타는 자기 가문에서 다 준비 해줄것 같았는데, 하긴,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싶은 걸 수도 있지,
마디안:그러면, 점심 먹고 1시쯤에 만날래? 아니면 12시쯤에 만나서 점심도 같이 먹는 것도 좋고.
하이네스:점심 같이 먹자!
어라? 이게 아닌데? 나는 지금 당장 같이 움직일 사람이 필요해서 연락한 거라고, 이따 만나는 건 의미가 없잖아.
플레아: 혹시 아침 같이 먹어줄 사람 없어?
절대 혼밥을 못 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밥을 먹으려면, 제도로 나가야 하는 데 저번에 하이네스가 체험 시켜줬 듯, 남자 혼자 나가기에는 위험한 공간이니까. 나를 지켜줄 방패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근데 정작 라이넬은 평민이라서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마디안:평소에는 되게 부지런 하더니, 쉬는 날이라고 늦잠 잔 거야? 나도 아직 아침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줄게. 지금 어디야? 기숙사?
플레아:운동장에 나와있어.
라이넬:지금 간다 기다리고 있어.
기숙사에 뒹굴거리고 있던 건지, 메세지가 뜨고 3분도 채 되지 않아서 라이넬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왤캐 빨리 나와? 씻지도 않고 나온 거야?"
"플레아는 모르겠지만, 원래 여자들은 2분 정도면 충분히 씻어."
씻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라이넬의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2분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머리 감는데 시간 엄청 쓸 텐데...
하이네스:나도 같이 먹어도 돼?
마디안:일단 운동장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
채팅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별 하나를 날려줬다.
"근데 어제 잠 못 잤어? 안색이 나빠보이는데."
"교수님 부탁 들어드리느라... 하루 꼬박 샜어."
"뭐?! 아예 밤을 샜다고?"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이야, 하루 정도 잠 못잘 수도 있는 거지.
"별 거 아니야. 조금 졸리긴 한데, 평소에도 4시간 정도 밖에 안 자니까, 이 정도는 버틸 만 해."
라이넬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찼다.
역시 마음은 참 착하다니까...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에서 기회다! 라고 생각하는 듯 작은 빛이 지나갔다.
"졸리면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일래? 어깨 빌려줄게."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마디안과 미네타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을 텐데, 그 정도 눈을 붙인다고 낮밤이 바뀌지도 않을 뿐더러, 라이넬 정도의 미소녀의 어깨를 빌릴 수 있는 상황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엄청 졸리기도 하고.
"그러면 잠깐 실례할게."
라이넬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기사반 답게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몸이 나를 지탱했다.
씻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땀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이런 감촉은 더 즐겨줘야 하는 건데, 몸이 어지간히 힘들었던 듯 길게 생각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
"플레아, 라이넬 우리왔... 야! 라이넬 너 뭐하냐?"
마디안이 눈에 불을 켜고 라이넬을 노려봤다.
"ㅁ... 뭐하긴, 플레아가 피곤해 보이길래, 어깨 좀 빌려줬을 뿐이야."
라이넬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모습에 마디안의 신경이 훅 치솟았다.
"아무리 피곤해 보여도 그렇지 남자애를... 헙!!"
마디안이 숨을 들이삼켰다.
평소의 플레아도 초절정이라는 중2병 스러운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어색 하지 않을 정도의 미소년이었지만, 귀여운 표정으로 곤히 자고 있는 플레아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
당장이라도 깨물어 주고 싶었고, 가볍게 안아 올려서 둥가둥가 해주고 싶었다.
'라이넬 녀석, 이런 유혹을 버티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고?'
하이네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들어 플레아와 친해지면서 그의 외모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 파괴력이 컸다.
"ㅈ... 저, 플레아, 이제 일어나야 하는 데..."
"우으... 깨우지마."
졸림에 가득찬 그의 목소리에 3명의 여성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 거렸다. 조금만 더 내버려 두면, 심쿵사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플레아! 애들 왔어. 이제 일어나야지."
"우으.. 깨우지 말라니까."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플레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같았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었지만, 세 여성 모두 이 장면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 플레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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