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첫 번째 이벤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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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식탁이 보이는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이, 상당히 고급 레스토랑인 듯 싶었다.
"일어나셨군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프레스티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의식을 잃은지 얼마나 됐나요?"
"의식을 잃으셨다니요. 저와 함께 이 식당에 들어 온지 아직 5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혹시 잠시 잠에 드신 겁니까?"
내가 기절할 일은 아예 없던 일로 치자는 건가? 좋아,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인 셈이니, 잊어준다면 나야 고맙지.
"요즘 피곤해서 그런지, 가끔 이러네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의식을 잃은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지 몸이 아직도 파르르 떨려왔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쓰러뜨리다니, 프레스티아는 진짜 인간이 맞긴 한 걸까? 사실 천사가 아닐까?
"아닙니다. 피곤하시면 그럴 수도 있죠."
부드럽게 웃는 프레스티아의 모습에 볼이 확 달아올랐다.
솔직히 너무 치명적이야.
부끄러움과 설렘에 입만 꾹 닿고 있다 보니 음식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코스로 주문 했습니다. 신사분이 먹기엔 조금 많은 양일 수 도 있으니, 먹기 힘드시다면 다 드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해요."
부드럽고 폭신한 빵을 들어 수프에 폭 찍어 먹었다. 상당히 맛있는 음식이었다. 빵은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있었고 수프도 간이 잘 되어있는 데다가 재료의 맛이 잘 느껴졌다.
그런데도 하이네스의 집에서 먹었던 음식만큼 파급력이 크진 않았다.
음식의 맛 자체는 이곳이 훨씬 맛있었지만, 증가폭이 다르다고나 할까? 급식과 하이네스가의 식사의 격차가 하이네스가와 레스토랑의 음식의 격차보다 훨씬 컸기 때문인지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같은 반응이 나오진 않았다.
물론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기에 너무 추해보이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먹었지만,
"플레아씨는 제도에 흑마법의 흔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메인디쉬로 나온 스테이크를 재빨리 씹어 삼켰다.
"네, 들었어요. 아카데미에도 공문이 내려 올 것 같다는 소식도 들었고요."
"저는 공문이 내려 오면 수사에 지원하려고 합니다."
대답한 번 듣기 힘드네, 어차피 이렇게 대답해 줄거, 왜 그렇게 압박한 거야?
"저도 수사에 지원하려고 해요."
프레스티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저 표정은 단지 연기일 뿐이다.
구체적인 이유까지 확신할 수 없겠지만, 내가 흑마법사들의 흔적을 수사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겠지.
"플레아씨가요? 혹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제도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제도에 생긴 위험을 몰아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외워놨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읇었다.
프레스티아라면 이렇게 철저히 준비한 거짓말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흑마법사를 경험치 삼아서 수하를 성장시키고 이름을 알리려고요.' 라고 사실적으로 말 할 수도 없잖아?
설령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거짓말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지도 않을 테니, 당당하게 거짓말을 행했다.
"플레아씨는 올곧으신 분이시네요."
"헬링님은 어떤 이유로 수사에 지원하신건가요?"
"명예로운 일이니까요. 제도의 위험을 몰아냈다는 위명이 필요하거든요."
나랑 같은 이유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억눌렀다.
"플레아씨 처럼 순수하게 제도를 위해 지원하는 건 아닙니다."
"이유가 중요한가요? 결국 제도에 도움이 될 텐데요. 헬링님은 세력도 크시니까 저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실 수 있을 거에요."
"과찬이십니다."
접시가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가 먹기엔 많은 양이라는 데 이렇게 다 먹을 수 있던 걸 보면, 역시 많이 먹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넣으려고 하면 들어는 가니까.
디저트까지 다 먹은 후, 프레스티아와 함께 음식점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사과의 의미로 점심을 대접해 드린 건데, 제대로 말씀도 안 드리고 있었네요. 저번 주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진짜 괜찮아요."
프레스티아와 오래 대화를 하고 있어서 일까? 계속 떨리던 목소리가 천천히 다듬어져 갔다.
아직도 소심한 듯 작은 목소리로 나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했지.
"그럼 이제 저희, 화해 했으니까, 다시 운동하러 나가도 되나요?"
프레스티아의 얼굴이 난처한 듯 굳었다.
"죄송합니다. 또 운동하다간 제가 흥분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요."
아쉽게 됐네. 정기적으로 프레스티아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줄 알았는데.
크게 한숨 한 번 쉬고 싶었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뱉으면 부담만 주는 꼴이니 꾸욱 참았다.
"그러면 슬슬 돌아가도록 하죠. 점심시간도 슬슬 끝나가고 남성분을 오래 잡아둘 수도 없으니까요."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볼까 싶었지만, 소극적인 지금의 모습을 더 보여주기도 싫었고, 그저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물론 마차에서 내리고 반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조금이라도 말을 해볼걸 하고 엄청 후회했지만,
***
"다들 흑마법사가 제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들었을 거다."
교탁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교수가 아니었다. 아니 교수라면 교수인데 우리 과 교수가 아니었다.
나 처럼 교양마법이라도 듣지 않는 한 볼 수 없을 마법과 교수가 교탁에서 말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사이 흑마법사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만 수십 건이 들어왔다."
교수가 가볍게 마나를 방출하자 교실은 적막한 공기로 가득찼다.
"이에 황실은 흑마법사들을 찾아낼 수사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소규모 팀을 여러 개 만들어서 수사에 지원하라고 공문이 내려왔는데, 이 중에서 참여하고 싶은 사람있나? 가산점도 있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행정부니까, 기사부나 마법부처럼 싸울 줄 아는 애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니었다.
헬링처럼 위명을 얻고 싶은 귀족이나 귀족파벌에 속해 있는 자 중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애들이라면 손을 들었겠지만, 우리반엔 평민의 비중이 꽤 높아서 그런 사람은 없었다.
때문인지 교수의 눈빛에 기대라는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반 전체의 시선이 나를 향해 집중됐다.
가볍게 시선을 읽어보면, 네가 왜? 정도 겠지.
"흑마법사의 흔적을 수사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팀별로 기사가 하나씩 붙겠지만. 완벽하게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당황해서 버둥대고 있는 학생들과는 달리 교수의 얼굴은 그렇게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남자아이가 수사대에 지원한 걸로 놀라지 않을 정도로 직업정신이 높다거나, 남성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미리 말을 해놨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수사에 참여하고 싶은가?"
"네."
"그러면, 따라 나오도록."
내가 간다는 소리에 갈까 말까 고민하던 학생들이 뭐라고 덧붙일 세도 없이, 교수님이 나를 데리고 나갔다.
완전히 복도로 나 온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멋지시던데요? 그런 말투도 쓸 줄 아세요?"
"위에서 시켜서 쓴 거야, 네 부탁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후배한테 맡기고 편하게 쉬고 있었을 텐데..."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생각 없이 부탁한 것도 아니고, 의도가 나쁜 것도아니니까, 이 정도 귀찮음은 감수 할 수 있지."
감사의 의미로 교수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아마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원하는 사람 다섯 명으로 팀을 꾸리는 건 불가능 했을테니까.
모든 교수님들이 귀찮아서 맡지 않으려고 했던 조사단 지도 교수를, 우리 교수님이 맡지 않으셨다면, 아마 5명 뿔뿔히 흩어지거나, 두 세명 단위로 묶여서 다른 조에 배치됐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비전투 인력이 두 명이나 있는 조였으니까.
"강당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30개 반을 더 돌아야 하는 데 계속 따라 다닐 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교수님!"
장난스래 경례를 올리고 강당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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