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내 사람부터 꼬시자2
* * *
아카데미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현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자면 시간아 언제 가나 하면서 시계만 쳐다보기 일 수 였는데 배움에 목표가 생기고 나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돼서 그런지,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솔직히 잠시라도 한눈 팔면 진도를 못 따라갈 만큼 어려워서 그런 거기도 하지만.'
16살이면 한국 기준으로는 중3? 만 나이라고 생각하면 고1 정도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강의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어려운 용어들도 많고 외워야 할 것들도 많았다.
아직 1학년이라 범용적인 지식을 배운 다고 하는 데 2학년으로 올라가서 세분화 되면 얼마나 더 난이도가 올라갈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제야 너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구나...'
고등학교 친구 중에 간호학과를 간 친구가 있었다. 외워야 할 거 많다고 투덜 거리고 강의 한 번 놓치면 진도 못 따라 간다고 그러는 걸 보고 마구 비웃어 줬었는데 내가 직접 그 상황에 처하니 기분이 색달랐다.
달리 쉬는 시간도 없었다. 강의와 강의 사이의 10분의 여유 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이전 강의 때 배운 걸 요약해서 정리하는 시간이었으니까.
높으신 분들의 자제분, 특히 영지나 가문을 이어받을 장녀가 아니라 차녀, 혹은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친분을 쌓는 듯 했지만 나 같은 평민들은 쉴 시간이 없다.
나도 내 영지를 얻고 가꾸기 위해 공부를 해야했고, 평범한 평민들도 높은 성적을 받아 귀족들의 눈에 들기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했으니까.
애초에 쉬는 시간에 만날만한 친구들도 없고, 라이넬이나 미네바는 다른 과여서 쉬는시간에 잠시 만나기엔 시간이 아깝고 마디안도 그리 명망높은 가문의 영애가 아니여서 쉬는시간에는 공부만 하고 있다.
'현실에서 회계같은 거라도 배워올 걸 그랬나?'
회계, 경영, 경제 이런 걸 많이 배워왔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공대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대 같은 거 안 가고 문과로 경영대학을 갔을텐데...
어쩔 수 없지 누가 게임 속에 들어갈 상황을 상정하고 공부를 해? 미친놈도 아니고.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오늘 가르친 내용을 정리해서 문제를 낼테니 다음 시간까지 모두 풀어도록 하세요."
'교수님, 저희는 교수님 수업만 듣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매일매일 과제를 왕창씩 내주시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나누어준 시계를 확인 해 보니, 교수님께서 내주신 문제들이 빽빽하게 전달되어 있었다.
그렇다. 이 세계관엔 놀랍게도 모니터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너무 비싸고 실용성이 없어서 아카데미같은 교육기관에서야 쓰는 기술이긴 했지만 일일히 필사해서 나누어줄 필요 없이 전송만하면 된다는 점에서는 현대의 컴퓨터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 시간쯤 걸리려나?'
강의가 한 시간인데 과제 푸는 데 한 시간이라니 배랑 배꼽의 크기가 동일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지금 풀 건 아니었기에 시계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4시간 내내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서 그런지 몸이 뻐근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자 시선이 나에게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이네스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사모아 파벌의 괴롭힘이 조금씩 줄어가고 있었는 데 그 때문인지 일반 애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빈도가 높아졌다.
지금이야 이렇게 슬금슬금 바라보는 선에서 끝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노골적인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신발장을 가득채운 러브래터 같은 소설 같은 상황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 수 도있겠지.
애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문 쪽으로 향했다. 내가 늦게 가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한 애들이니까 늦지 않게 가줘야지.
앞문을 통해 복도로 나서자마자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누구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거대한 가슴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프레스티아가 보였다.
'아니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떡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각오하라느니 나를 꺾을 수 없을 거라느니 잔뜩 다짐해 놓고는 정작 본인이 나타나니 가슴만 계속 뛰었다.
그 와중에 다행인건, 육체 놈한테는 프레스티아에 대한 공포가 새겨졌는지 덜덜 떨고 있었다는 거?
어제 그렇게 위협당해놓고 지금 실실 웃고 있었다간 프레스티아한테 변태로 찍힐텐데 그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다.
프레스티아한테 맞는 거라면 즐겁게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해도 그건 프레스티아가 너무 좋아서 그런거지 내가 진자 변태인 게 아니다.
말을 걸고 싶긴 했지만 육체놈이 너무 심하게 떨기도 했고, 어제 그런일이 있었는 데 바로 말을 거는 것은 내가 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겠지.
이를 악 물고 시선을 피했다.
아쉬움을 이겨내고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였다.
"플레아씨,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가 먼저 말 건거다?'
기쁨에 백덤블링을 두 번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짜로 해버릴까?
"ㄴ... 네 ㅁ... 무슨 일.. 이세요...."
육체가 가지고 있는 공포 또한 완벽했다.
진짜로 겁을 먹고 있는 거다 보니 내가 겁을 먹은 척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없겠지.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도 될까요?"
프레스티아가 나를 지긋이 내려봤다.
분명 미안하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가식을 한 꺼풀 벗겨내면 채찍은 줬으니 이제 당근을 줘볼까? 하는 마음이겠지.
"ㄴ...네..."
프레스티아의 눈빛에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얘들아 미안하다. 오늘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봐.
프레스티아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으슥한 공간이었다.
내 심장은 오싹한 긴장감으로 두근 거리고 있었고 육체는 잔뜩 겁을 먹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제 일은 제가 정말 죄송했습니다. 너무 흥분해서 남성분한테 폭력을 휘두를 뻔 했습니다."
프레스티아가 허릴 90도로 숙였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사과를 할 건 예상했다. 어제의 일은 일반적인 관점으로 봐도 프레스티아가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일이 맞았으니까.
그런데 헬링 후작가의 차녀씩이나 되는 프레스티아가 평민 따위인 나한테 허리까지 숙여가면서 사과할 일인가? 라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형식적인 사과, 그 정도면 충분할 텐데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지?
'아무 이유가 없는 건 아닐거야.'
그 프레스티아다. 아무리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이유 없이 허리를 숙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하겠지.
"ㅈ... 저는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으십니까? 겁을 많이 먹으신 것 같은데..."
"진짜 때리신 것도 아니니까요. 프레스티아님이 이렇게까지 사과하실 일도 아니고 용서 할 수 없을 일도 아니에요."
일단 지금은 넘어가 주지. 알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프레스티아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흩어지는 장면이 내가 유성우를 감상하고 있나? 라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제가 사죄의 의미로 오늘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점심? 프레스티아와의 점심?
이것 못 참지 무조건 가야지!
프레스티아와 같이 점심을 먹는 다는 것도 무조건 좋을 수 밖에 없는 제안인데다가 프레스티아가 대접하는 음식이라면 엄청 맛있을 것이다.
백작가 밖에 되지 않는 하이네스의 음식, 그것도 집에서 만들어낸 음식도 그렇게 맛있었는데 프레스티아가 대접하는 음식은 얼마나 맛있을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나왔다.
무지성으로 '네!' 라고 대답하기 직전, 급식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애들이 떠올랐다.
미네타는 음식이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나 때문에 급식소에서 같이 밥을 먹었고 라이넬은 아마 안절부절 못 하는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다. 그런데 내가 점심 약속에 빠진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엄청난 죄책감에 빠지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이를 악물고 프레스티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쉬움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플레아 개인의 입장에선 몇번을 생각해도 프레스티아와 밥을 먹는 것이 이득이었지만 나는 군주가 될 몸이다. 수하가 기다리고 있는데 버리고 도망가면 안되지.
"선약이 있어서요. 오늘은 같이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시간 되실 때 언제든 말씀해 주십쇼. 언제든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제빨리 걸음을 옮겨 프레스티아에게 내 앞 모습이 보이지 않게 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으니까.
'개 아까워! 그냥 같이 먹을 걸 그랬나?'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애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아쉬움도 서서히 잊혀지겠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어요?"
"역시 저희가 옆에서 모셔올 걸 그랬나요?"
프레스티아 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미소녀 3명에게 둘러쌓이니 아쉬움이 조금 풀리는 듯 했다
'시발.'
사실 전혀 풀리지 않았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