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내 사람부터 꼬시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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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 은 아니고 침대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몸에 닿는 옷의 감촉이 불편했다.
평소에는 편한 재질의 옷을 입고 자는 데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다 보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잔 모양이다.
시간이...
다행이 등교시간까지는 꽤 여유가 남아있었다.
옷을 벗고 욕실로 이동했다.
욕실은 상당히 넓고 좋았다. 제도에 집도 못 사는 거지들을 위한 곳일텐데 시설들이 쓸데 없이 좋았다.
혼자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크기의 욕조에 들어간 뒤 물을 틀었다.
마법으로 데워진 온수가 욕조를 천천히 채워나갔다.
따뜻한 온수가 몸을 찬찬히 데워오니 마음이 편안해 지는 기분이다.
몸이 노곤노곤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오른손으로 뺨을 만져보니 매끈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아마 어제 맞았더라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촉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잔뜩 부어오른 뺨에서 느껴지는 고통만 있었을 거다.
'아닌가 죽었으려나.'
영혼 상태에서는 육체의 상처를 가져가지 않을 테니 아마 매끈한 볼의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겠지.
어제는 육체의 떨림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 했지만 지금 천천히 생각해보면 프레스티아는 나를 때릴 생각이 없던 게 분명했다.
프레스티아가 연기하고 있는 가식이면 몰라도 진짜 프레스티아는 자기 장난감을 죽여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고 자기가 눈독들이던 인재를 채갔는데도 얼굴 때문에 살려준다고 말했는데 겨우 운동하다가 한눈 팔았다고 나를 죽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이네스도 웃긴 년이다. 둘이서 짜고 쳐놓고서 걱정하는 척이나 하고. 하이파이브까지 해 놓고 모른 척 한걸 보면, 그 때 내가 엄청 겁을 먹고 있었나 보다. 아마 뭘하든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이제와서 차근차근 생각을 되짚어 보면 B급 꽁트보다도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뭐? 잘못 맞으면 죽을지도 몰라? 무조건 즉사다. 아무리 마나가 담겨 있지 않았다고 해도 프레스티아는 소드익스퍼트에 다다른 강자다. 일반인보다도 약한 내가 제대로 맞았다간 비명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죽어버렸겠지.
운이 좋아서 간신히 산다고 해도 엄청난 후유증을 앓고 살아갈 거다.
내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고 볼 수 도 있지만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 프레스티아의 손에 죽는 거라면 그렇게 나쁜 죽음도 아니고 진짜로 죽지도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녀와 나의 격차가 너무 커서 분노라는 감정이 잘 일지도 않았다.
'그냐저나 취급이 너무 안 좋은 데?'
첩 정도로는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 데 완전히 장난감 취급이잖아.
아마 나를 때리는 모션을 준 것도 반항적인 모습을 취한 나를 교육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음의 공포에서 의연해 질 순 없을 테니까.
실제로 어제의 나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울어 댔으니, 그녀의 계획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프레스티아를 꼬시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없었다면 말이야.'
프레스티아를 꼬신다. 그녀를 내 손안에 넣겠다. 이런 목표가 없었다면그녀에게 복종을 맹세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자마자 프레스티아에게 달려가서 앞으로는 안 깝칠테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르지.
'근데 이 정도로 굽힐 정도로 연약한 사람은 아니거든?'
죽일테면 죽여보던가. 이 정도 각오 없이 그녀를 손에 넣겠다 도전할 수는 없다.
악마 하렘을 위해 지옥으로 향하는 아저씨도 있는데 프레스티아를 위해서 목숨 정도는 가볍게 걸 수 있었다.
내가 죽던 네가 꼬셔지던 한 번 끝까지 가보자고.
어느새 온수가 욕조를 넘쳐 흐르고 있었다.
느긋하게 물을 끈 후꽤 고급진 향이 나는 비누를 이용해서 몸을 닦았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나오니 남은 시간은 30분,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물기를 말리고 제복을 입었다.
평소엔 등교 시간 10분 전에야 출발하지만 오늘은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내가 향하는 곳은 여자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안되지만 근처에서 기다리는 정도는 허용해 준다.
평민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훔쳐보고는 속닥거리는 게 느껴진다.
현실에서 이러고 서 있었으면 변태 소리 들었을 텐데...
'아닌가, 현실에서도 잘 생겼으면 그런 소리 안 들었겠다.'
가만히 서있기만 10분, 드디어 내가 원하던 사람이 기숙사 정문에서 나왔다.
"라이넬씨!"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게 보였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당황하다가 내 쪽으로 빠르게 뛰어오는 게 토끼가 토도도도 뛰어오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남녀역전 세계여도 역시 라이넬은 귀여웠다.
분명 본판에 비해서 머리 두 개 정도는 커진 것 같은데 왜 이리 귀여운지. 귀여운 사촌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뭐? 현실에서 사촌동생은 내 물건이나 망가뜨리지 전혀 귀엽지 않다고?
그건 걔가 못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라이넬 정도의 외모를 가진 동생이라면 뭘해도 귀여울 것 같은데.
"플레아씨? 여기는 왠일로..."
"같이 등교하고 싶어서 찾아왔죠."
"여기서 학교까지 3분도 안 걸리는데..."
검지로 쉿 하는 모션을 취했다. 솔직히 남자가 하기엔 많이 역겨운 포즈긴 한데, 이쪽 세계 여성들 앞에선 내가 무슨 포즈를 취하든 귀엽기만 할테니 상관 없지 않을까.
"라이넬씨와는 점심 외에는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제 밑으로 들어와 달라고 말 했놓고 아무것도 보여드리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아, 그런 뜻으로..."
"그러면 이제 갈까요?"
앞장서서 걸어가니 라이넬이 빠르게 다가와서 따라 걸었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아직도 사모아 파벌이 많이 괴롭히나요?"
"늘 그렇듯이요."
"피차 고생이 많네요. 사모아 공작가에 대한 소문은 꽤 좋은 편인데 왜 공녀의 성격은 그렇게 속이 좁은 지."
"플레아씨, 잠깐만요!"
라이넬이 손으로 내 입을 막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아이고 이 아가씨야, 당연히 없는 거 확인하고 말한 거지 설마 듣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하겠어?'
숨이 살짝 막혀 오는 느낌에 혀를 살짝 내밀었다.
"꺅! 뭐하세요?!"
"뭘 하긴요. 라이넬씨가 제 입을 막고 있어서 걷어낸 것 뿐인데요."
얼굴이 아주 새빨게 진게 볼만 했다. 그렇게 부끄럽나?
라이넬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진지한 표정이라고 해봤자 얼굴은 여전히 붉어서 별로 무섭지도 않았지만.
"외간 여자한테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상한 착각을 할 수가 있어요."
"이상한 착각이라뇨? 저는 그냥 장난을 친 것 뿐인걸요. 친구 사이에 이런 장난도 못 치나요?"
"친구요?"
라이넬의 표정이 멍해졌다.
잘 먹혀 들었나 보네.
라이넬을 공략하는 첫 번째 방법, 친구 없는 아싸니까, 라이넬을 친구로 삼아라.
한 번 친구라고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딱딱 하게 굴었던 라이넬은 사라져버리고 아주 친근하게 다가온다.
'난세'에서는 동생 같은 귀여움 때문에 오빠 미소를 짓는 일도 많았지.
"네, 저희 친구 아니었나요? 설마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건가요..."
침울한 소리를 내보였다.
"저를 영입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주군과 신하 사이에 우정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초대 황제께서는 첼리아 사모아를 가장 친우라고 여겼다고 하던데요?"
"그건... 그렇지만..."
"라이넬씨가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매력 97에서 나오는 연기력을 총 동원해서 최대한 아쉽다는 어투로 말했다.
걸음 속도를 조절해서 맞춘 절묘한 타이밍에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그러면, 이따 점심시간에 봐요."
뒤도 보지 않고 교실로 향했다.
여린 라이넬의 성격상 속이 많이 타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레스티아를 꼬시기 위해선 세력을 키워야 하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선 인재가 필요하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게 라이넬이다. 남녀역전세계라 유리한 부분이 많아서 굳이 조급해 지지 않고 천천히 진행하려고 했지만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았는데 한가롭게 있을 순 없지.
감히 나를 길들이려 해? 그건 불가능 하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지.
죽이던가, 먹히던가. 프레스티아는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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