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하이네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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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왔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는 공포라는 감정으로만 떨렸던 심장이었지만 지금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원인은 공포가 아니었다. 설렘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온몸을 지배했다.
내 손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손길, 손등에서 명확하게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 가만히 있다간 내 정신마저 이상해 질 것 같은 기분에 손을 뒤로 뺐다.
다행히 내가 뒤로 빠지려고 하자마자 미네바가 바로 내 손을 놓아줬기에 우리의 몸은 분해될 수 있었다.
미네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춘 걸까?
여자가 남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인사법은 아니다. 당장 입학식 때 나를 에스코트하겠다던 사모아한테도 손등 키스를 받지 않았는데 고작 친구가 되자고 했다고 손등 키스를 한다고?
"하이네스님…. 혹시 방금 저한테 하신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행위인 지 알고 계신 가요?"
"ㅊ…. 친구 사이에 하는 인사법 아닌가요?"
고개를 삐걱하고 돌려서 아까 떨어진 책을 바라봤다.
표지에 적혀있는 제목은 `기사와 소꿉친구`네이밍센스가 상당히 구린 것 같지만 아마 로맨스 소설인 모양이다.
`설마….`
사람 간의 관계를 책으로 배운 건가?
어이가 없었다.
현대 버전으로 바꿔보면 애니만 보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안녕 화살 법!`이라고 인사한 거랑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소름 돋네.`
"아닌…. 가요?"
"네, 아닙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까도 고민해봤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남들한테도 이렇게 인사할 거 아니야.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한테 하는 손등 키스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미네바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이미 충분히 붉어서 계란정도는 부쳐 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고기를 올려놔도 익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이 작은 소동물 처럼 보였다.
이건 이불 킥 각이다. 아마 오늘 밤새 이불을 차고 있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모르고 하신 거니까요. 앞으로 안 하시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그녀의 부끄러움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다.
다행히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려도 될까요?"
"네, 편하실 대로 하세요."
다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악수라는 인사법은 알겠지?
이번엔 다행히도 오른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가볍게 흔드려는 그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가 한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미네바가 단단히 잡고 있어서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하이네스님?"
나조차도 못 알아볼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가 튀어나왔다.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미네바를 부르자 그녀가 손등에서 입술을 떼고 바로 섰다.
소심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있었고, 얼굴이 붉긴 했지만 부끄럽다는 티는 내지 않았다.
남성 공포증이 있다는 인간치고는 너무나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플레아씨가 마음에 들어요."
와, 노빠꾸다. 당신 이런 이미지 아니었잖아? 소심소심한 소동물은 어디 가고 갑자기 포식자가 돼버린 건데? 그 사이에 언니를 보고 뭔가를 배운 건가?
"하이네스님….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났고…."
"플레아씨는 저를 처음 보셨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입학식 첫날부터 플레아씨를 바라보고 있었는걸요."
"저를요?"
"같은 반인데, 모르셨어요?"
같은 반이었나? 사모아 파벌에게 찍힌 이후로 다른 이들에게 아예 관심을 끊고 살아서 몰랐었나 보다.
`잠깐, 마법반이 아니라 행정반이었어?`
하이네스라는 성을 가지고 행정반에 들어갔다고?
"사모아 파벌에 찍히신 이후에도 열심히 공부하시고, 다른 사람들한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그건 내 얼굴이 잘생겨서가 아닐까? 아마 나 말고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지천에 널렸으니까.
내가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마음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나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이유는 얼굴 때문이었을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런 좋은 인재가 스스로 나에게 다가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눈에 콩깍지가 낀 것이든 아니면 진짜로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든, 나는 그걸 이용해서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면 됐으니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러내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이네스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저는 하이네스님을 오늘 처음 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저는 하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친구부터 시작하죠. 천천히 친해지고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요. 여성분이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시는 건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워서요."
미네바의 표정에 아차, 하는 감정이 지나갔다.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몇 번이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남녀역전 만만세다.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밀어내면 찐따새끼가 되지만 여기서는 당연한 반응 중 하나니까.
후회가 밀려오는 지 미네바의 표정이 다시 이전처럼 돌아왔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만 살피는 게 작고 귀여운 소동물 같이 느껴졌다.
오늘만 3번째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등에서 축축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지만 미소녀의 침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랑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네!"
그녀가 내 손을 덮석하고 잡아왔다.
참 쉬운 여자였다.
***
애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미네바는 원체 소심한 년이니까 가만히 있을 테고 아마 플레아가 주도하고 있을 거다.
남자한테 리드 당하는 여자라니, 한심한 년.
플레아를 떠올리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생김새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 웃음을 짓게 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잘생긴 건지.
그놈을 만나기 전에 두 가지 평가를 들었다.
미네바에게 들은 바로는 아주 잘생기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사랑에 빠진 눈으로 말했고.
프레스티아에게 들은 바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고민하다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무래도 미친놈이 맞는 것 같다.
보통의 남성이라면 그 자리에서 도망갈지도 모를 찐득한 시선도 오히려 즐겁다는 듯 받아냈다.
물론 그래도 남자인 만큼 작정하고 위협하자 곧바로 울먹이긴 했지만, 여자한테 납치 당하고 있는 데 울지 않을 수 있는 남자는 이세상에 존재할리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담력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우악스러운 손길에 바들바들 떨면서 울먹이고 있던 그를 떠올리고 있자면 가슴 한부분이 응어리지듯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네바의 말대로 그는 미친 듯이 잘 생겼으니까. 프레스티아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미네바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하실에 가둬 놓고 교육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자주제에 그렇게 멋진 눈도 할 수 있고 말이야.`
내 이름 듣고 나서 나를 바라보던 시선에 담긴 강렬한 욕망을 잊을 수 없었다.
나를 자신의 손에 쥐고 싶다는 야망,
프레스티아 외에도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남자가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분명 크게 성공할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가 세력을 키워나가는 걸 보는 것도 즐겁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미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같은 여자가 봐도 그저 멋진 사람,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수하를 이끄는 사람, 언젠가 제국을 집어 삼킬 야심을 펼칠 사람,
프레스티아 헬링, 나의 주군은 과연 플레아의 마음에 숨겨진 야욕을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겠지,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나도 알아차린 것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거겠지, 어차피 플레아도 결국 프레스티아의 밑으로 들어오게 될 테니까.
그 때가 되면 그와 함께 지넬 수 있으리라.
`부디 내 동생을 잘 키워줬으면 좋겠는데.`
마법에 대한 재능만 따지면 나와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여동생이다. 지금까지는 목표도 없고 신념도 없어서 그 재능을 썪히고 있었지만 뛰어난 주군 밑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재능을 만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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