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하이네스2
* * *
진심으로 혹했지만, 절대로 받아 드릴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이네스의 두 자매를 믿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 이미지와도 연계되는 부분이었으니까.
한낱 평민인 내가 매일 하이네스가에 들락날락 거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몸을 팔고 있냐는 의심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하이네스 가에 충성을 맹세한 거로 보일 수도 있다.
헬링가도 아니고 하이네스가에 충성을 맹세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괜찮아요. 선배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도 폐를 끼치는 건 싫어서요."
슬슬 배도 찼겠다 식기를 내려놨다.
꽤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음식의 양이 많이 줄어들어 있진 않았다.
평소에 소식하던 몸이니까, 맛있는 음식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다 먹을 수는 없겠지.
조금 아쉬웠지만, 더 먹었다간 기분 나쁠 정도로 배가 부를 것 같아서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벌써 다 먹은 거야?"
"위가 작은 편이어서요."
하이네스 두 자매는 먹성이 상당히 좋았다. 둘 다 귀족인 만큼 빠르게 먹으면서도 나름의 기품이 잘 느껴졌다.
복스럽게 밥을 먹고 있는 여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손님을 모셔두고 너무 먹기만 했나? 먹을 땐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하는 게 습관이 돼서."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적어도 5인분은 넘어 보이던 식탁의 음식이 모두 사라지는 데에는 단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판에서 이런 모습을 나에게 보였다면 아무리 미레타여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을 것 같은데 남녀역전 세계니 만큼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럼 나는 식후 수련이 있어서 말이야. 친구 둘이서 즐겁게 얘기하고 있으라고."
자기가 초대한 손님을 버려두고 혼자 수련을 하러간다?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장난 스런 표정을 보아 하면 나를 모욕하기보다는 동생을 놀려주려는 언니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
그래도 손님을 모셔 놓고 다른 곳에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한낱 평민이 귀족의 행위에 불평할 수는 없다. 신분제 사회니까.
"언니!!"
"네가 옛날처럼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잘생긴 친구도 왔으니까, 이제 남자랑도 대화해보고 그래야지, 평생 독신으로 살 거야?"
"그리고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건데 빠질 수는 없잖냐, 너도 프레스티아 성질 드러운 거 알잖아."
어? 프레스티아랑 수련하러 가는 거였어?
그냥 같이 가고 싶어지는 데?
나도 데려가 줘요!
나도 데려가 달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텔레파시를 보냈다. 성격은 나빠도 눈치가 느린 것 같진 않으니까 충분히 알아듣지 않을까?
"여자랑 둘만 있는 게 무서워서 그래? 괜찮아. 너도 봤다시피 미네바 저년 남성 공포증이 있어서 너한테 손도 못 댈걸? 그리고 사용인들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멍청한 년, 이런 쉬운 텔레파시를 어떻게 못 알아차릴 수 있지?
이래서 귀족들이란, 늘 주변에서 자기 눈치를 보며 맞춰주니까 남의 생각 읽는 법을 모르지.
프레스티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라져 버리자 몸이 축 늘어졌다.
저번에 한번 눈도장을 찍은 후 내 일에 간섭하거나, 상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한 명령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서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직 내가 프레스티아의 눈에 찰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거겠지. 천천히 힘을 기르다보면 그녀도 나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ㅈ…. 저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축 늘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던 걸까? 미네바가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외모 자체는 언니와 많이 닮아있었지만, 눈매와 분위기가 순하다 보니,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미레타가 포식자라면 미네바는 소동물에 가까웠다. 확실히 귀여운 느낌이 강했다.
"아니에요. 후배를 초대해 놓고 멋대로 나가버린 하이네스님의 모습에 어이가 가출해서 잠시 멍하게 있을 뿐이랍니다. 이런 미소녀와 같이 있는데 싫을 리가 없죠."
일단 프레스티아에 대한 생각은 내려놓고 눈앞에 있는 사람한테 집중하자.
미레타가 친구라고 칭한 걸 보면 아마 나랑 동갑이겠지.
"언니분은 매일 저녁, 수련하시나요?"
"네... 헬링가의 차녀분이 제도로 올라오신 이후엔 계속 같이 수련을 하고 있어요."
마법사도 최소한의 무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헬링가의 가풍 때문이겠지.
미레타는 자신의 수하이니 마법만 갈고 닦고 있는 걸 가만 볼리가 없다.
`반대로 말하면 동생 쪽은 프레스티아의 수하가 아니라는 뜻이 되겠네.`
프레스티아가 미레타를 찜한 것은 좀 아쉬웠지만, 미네바는 내가 영입할 수 있는 대상이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미레타 하이네스는 내 눈앞에 있는 소녀인 듯 하니, 영입만 할 수 있다면 마법사 전력에선 내가 더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지.
"하이네스님은 같이 안 가시나요?"
"저는 헬링님과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요.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지 헬링님도 저를 별로 안 좋아하시고요."
마음속에서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달리 친한 친구는 없으세요?"
"없어요…. 아카데미 입학 전에는 집에서만 있었고, 입학한 후에도 성격이 소심해서…. 친구를 사귀진 못 했어요."
`나이스!!`
친구가 없다고 침울해 하는 미소녀를 보고 기뻐하는 나의 인성에 박수를 치고 싶어지겠지만 나도 변명 거리가 있다.
친구가 많으면 타인과의 교류가 많다는 뜻이고 결국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니까.
그녀를 영입하고 싶은 나에게 있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나 외의 관계는 전부 방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더 쓰레기 같은데?
"그러면 저희 친구 할래요?"
라이넬 처럼 대놓고 영입하고 싶다고 할 수는 없다. 그녀는 귀족이고 나는 평민이었으니까.
평민이 귀족한테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죽여도 무죄다.
물론, 평민이 귀족한테 모욕적인 발언 했다는 걸 증명해야 하고, 소심한 그녀의 성격상 나를 죽이려 들진 않겠지만 남자란 다 이런 것 밖에 없나? 하는 마음에 흑화해서 남성 혐오증으로 진화해 버릴지도 모른다.
조급할 필요 없다.
천천히 다가가면 된다. 내 매력 잠재력은 102니까, 옆에서 오래 있는 것만으로 그녀는 결국 나에게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다.
달리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ㅊ…. 친구요?"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가씨네.
"아, 혹시 평민 따위와는 친구가 되고 싶지 않으신건가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내가 이렇게 연기에 재능이 있었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엔 누가 들어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죄책감과 실망감이 녹아 들어있었다.
여자의 죄책감을 증폭시키기엔 아주 적당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요?"
"그냥…. 아직 서로 아는 것도 없고…. 남성 공포증이 있는 제가 남자분이랑 친구가 되도 될지 걱정이 돼서요…."
"서로 잘 알아야만 친구가 될 수 있나요? 남성 공포증은 최대한 제가 치료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오른손을 내밀었다.
단순히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이었지만 그녀한텐 이 손짓조차 무서운 모양이었다.
"저 팔 아파요?"
악수 하나에 긴장한 것일까? 하긴 남성 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남자랑 말도 섞어본 적 없을 쑥맥일 테니까. 긴장할 만하지.
저 봐라 오른손을 내밀었는데 왼손 내미는 거봐, 다른 손끼리 악수가 될 리 없다는 것도 잊은 걸 보면 긴장에 머리가 지배되었나 보다.
미네바의 왼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쪽
`어?`
이 아가씨가 지금 뭘 한 거지?
내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에 뇌가 처리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왼손을 집어넣고 오른손을 집어넣을 줄 알았는데 부드러운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손등에 입맞춤을 해버렸으니까.
내 예상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는 상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예상범위를 뛰어 넘었냐면 똑같은 어휘를 3번이나 써서 설명할 정도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악수하러 내민 손을 이렇게 받아들이다니, 손 등에서 느껴지는 촉촉하고도 부드러운 감각에 머리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빨리 때줬으면 좋겠건만 내 손등에 입술 도장을 찍어버린 아가씨도 부끄럽다는 걸 아는지 손에 입술을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움직이지 않고 하염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