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하이네스1
* * *
정말 거대한 저택이었다.
얼추 봐도 2층은 넘어 보이는 높이였고 마당까지 크게 딸려있었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제도다, 이런 주택이 얼마나 할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마 우리 마을에서 나오는 1년 수익 정도는 가볍게 초월하겠지.
"이 넓은 저택에 둘이서만 사는 거에요?"
"우리 자매 둘이랑 사용인들 말고는 안 살아, 왜? 너도 같이 살고 싶어? 방은 많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단 두 사람을 위해 이렇게 큰 저택을 준비해주다니, 역시 하이네스 백작가엔 돈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자매 모두 대단한 마법사로 성장할 재능이 보이는 데 이 정도는 지원해 줄 만하지.
"미네바! 언니 왔다."
"뭐야? 벌써 왔어? 오늘부터 방과 후 수업 있다면서?"
거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미레타의 목소리와 비슷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껄렁껄렁해 보이는 미레타와는 다르게 순해 보이는 말투였다.
다행히 미레타 처럼 성격이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미레타를 따라서 거실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소파에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속옷 차림의 여성이었다.
"꺄아아악!!"
멋대로 비명을 지르는 육체를 내버려 두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괜히 변태로 찍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이미 볼 건 다 봐버렸지만.
`하얀색이었지?`
"ㅁ…. 뭐야?"
"후배 데려왔다."
"아니 남자 분을 데려오면 어떡해?!"
분노와 당혹스러움에 가득 찬 어투였다.
뭔가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옷을 입으러 도망친 것 같았다.
빼꼼하고 눈을 떠보니 아까 보았던 속옷 차림의 여성은 없고 소파만 존재했다.
책은 어디 갔지?
"아우…. 저년이."
여깄네.
옆을 바라보니 미레타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주변에 책이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동생 쪽이 책을 집어 던진 듯했다.
동생 쪽이 사라진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나왔다.
물론 이번엔 제대로 된 옷을 입고서,
`아무리 봐도 동생 쪽이 내가 아는 미레타 하이네스인데.`
남성 공포증이 있고 없고, 성격의 좋음 나쁨을 떠나서 일단 생김새부터가 내가 아는 미레타 하이네스와 비슷했다.
미레타 하이네스를 적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로브를 깊게 눌렀고 있어서 얼굴을 보고 비교할 순 없었지만, 일러 속의 미레타 하이네스는 쨍한 연두색 머리카락이 아니라 짙은 녹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동생쪽의 머리카락도 짙은 녹색이었다.
연두색 머리카락이 너무 튀어서 염색을 한 게 아니라면 아마 동생 쪽이 내가 아는 미레타 하이네스겠지.
"언니! 나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있는 거 알잖아! 남자를 데려올 거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오늘 처음 봤는데 어떻게 미리 말을 해주냐? 그리고 이렇게 충격을 줘야 집에서도 멀쩡히 입고 다니지."
"뭐? 오늘 처음 본 남자를 집에 데려왔다고?"
미네바의 시선이 나를 훑…. 다가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교양 마법 배우는 후배인데 기특해서 밥이나 대접하려고 데려왔지."
"ㄱ…. 그래."
미네바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많이 잘생겼지? 나도 알아.
"안녕하세요. 하이네스님."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니 얼굴이 더 빨개지는 게 보였다.
당찬 언니와는 다르게 부끄러움이 많은 모양이다.
근데 남성 공포증이 있다고?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왁!"
"꺅!!"
갑자기 미레타가 나를 밀었다. 중심을 잃고 미네바 쪽으로 밀려났다.
"우악!! ㄷ…. 다가 오지 마요!!"
내가 밀려나자마자 벽까지 멀어지더니 덜덜 떨며 나를 바라봤다.
다행히 소파 위에 넘어져서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언니!!!!"
"넌 내가 있는 데도 그러고 있냐? 네가 일부러 죽이러 달려들어도 못 죽이니까 너무 겁먹지 말어."
"선배?"
"네가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아서, 안 다치게 소파로 밀었으니까 괜찮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까.
진지하게 한 대 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때려도 그렇게 아파하지도 않을 텐데, 한 대 정도는 때려도 되지 않을까?
오른 쪽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귀여운 후배, 아까는 내가 큰 잘못을 해서 그냥 넘어가 준거야. 누나 남자라고 봐주는 사람 아니다."
자연스럽게 오른손이 풀렸다.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다. 어차피 주먹으로 때려봤자 타격도 없을 테니 푼 거다.
미레타를 빤히 바라봤다.
아무리 뻔뻔한 미레타여도 내가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니 찔리긴 하는지 시선을 살살 피했다.
역시 주먹보단 미인계가 효과가 좋다.
"하아, 그래 말없이 밀어서 미안했다, 됐니?"
나는 말 없이 미네바를 빤히 바라봤다.
한 번 시동이 걸리자 내 시선도 무서운지 나랑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쟤한테도 사과하라고? 동생이 병이 있어서 고쳐주려고 한 거야. 언제까지고 남자를 피하고 다닐 순 없잖아."
그렇다고 말도 없이 사람을 들이미냐.
"저 그냥 기숙사에 가요?"
미레타의 치아가 까득하고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몸이 살짝 떨려왔다.
`진짜 한 대 맞는 거 아니야?`
다행히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다.
미레타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한 번 보고 머리를 쓰다듬었으니까.
그 행위가 마치 이번 한 번만 봐준다. 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몸이 떨려왔다.
"미네바, 언니가 미안하다. 그렇게 무서워 할 줄 몰랐어. 앞으로는 다시는 남자 안 데려올게."
"... 아니야, 괜찮아. 오히려 고마운 걸 언니한텐..."
겉으론 엄청 티격대는 것 처럼 보이는 데 생각 보다 두 자매의 사이가 좋은 모양이다.
말하는 걸 봐서는 순수하게 장난으로 나를 민 것 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미네바의 말투로 유추해 보면 언니한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 됐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레타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오케이 싸인을 보넸다.
"근데 전 어떻게 해요.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면 돼요?"
"밥 먹고 가, 원래 쟤가 남자 얼굴도 못 쳐다 보는 앤데, 너한테는 멀쩡한 걸 보면, 남자 공포증도 잘생긴 남자 얼굴은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거 아니거든!"
재밌게 노는 자매네,
식사 준비는 금방됐다. 메이드로 보이는 누님들 뭔가를 뚝딱뚝딱 하더니 식탁이 순식간에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 찼으니까.
남녀역전 세상이라서 집사가 음식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메이드들이 준비하는 걸 보면 미네바의 남성 공포증 때문에 집사를 아예 안 들인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사용인이라도 남자는 남자니까.
"차린 것도 많고, 많이 먹어."
"잘 먹겠습니다."
미레타가 먼저 음식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이 세계에선 여자가 먼저 음식을 먹는 게 예의니까. 남자가 먼저 먹으면 버릇없다는 소리 듣는다.
가끔 집안 교육을 잘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빵 하나를 스프에 적셔 먹는 미레타를 보고 나서야 식탁 위를 살폈다.
이세계에 온 뒤 먹어 본 음식이라고는 급식소에서 주는 급식 밖에 없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차려진 한 상은 급식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질이 높았다.
기본적으로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지 않았던 급식과는 다르게 방금 막 만들어서 충분히 따뜻했다.
미네바까지 음식을 먹는 걸 본 나는 나에게 주어진 스푼으로 수프를 떠먹었다.
`존나 맛있어!`
귀족들이 먹는 음식이란 게 이런 걸까? 왜 아카데미에 다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점심을 학교에서 먹지 않고 나가서 먹는 지 알 것 같았다.
방금 먹었던 수프는 현실을 포함해서 내가 먹었던 수프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급식에서 지급되는 수프는 대량으로 만든 데다가 식어서 맛이 없던 거고, 현실에서 먹은 수프는 공장제 수프일테니 당연히 직접 만든 수프가 가장 맛있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냥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수프가 겁나 맛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빵도 질이 좋았다.
아카데미에서 먹는 빵도 꽤 괜찮다고 생각 했는데 이 빵은 차원이 달랐다.
뭐지?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아무리 내가 먹어봤던 빵들이 공장에서 찍어냈던 빵이라고 해도, 현대기술로 만들어진 빵보다 중세의 빵이 더 맛있다는 게 말이 되나?
맛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먹다 보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애가 복스럽게도 먹네, 하긴, 이런 건 못 먹어봤겠구나?"
"아, 죄송해요. 교양 없어 보였죠?"
먹는 속도를 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던 손을 조금 더 예의 바르게 조절했다.
음식을 먹는 걸 멈추진 않았다. 이런 걸 먹지 않는 건 인생의 손해니까.
"그렇게 맛있으면 앞으로 밥은 우리랑 같이 먹을래?"
엄마가 맛있는 걸로 유혹하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랬는데, 순간 진심으로 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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