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제도 구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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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육체 같으니라고, 분명 전부 진정이 됐는데 몸은 아직도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네 말대로 반칙을 쓴 거니까. 내기는 네가 이긴 거로 하자."
망할 년, 오늘의 수모는 꼭 갚아 줄 테다.
"이렇게 여려서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겠어? 이제 슬슬 울음 그치자."
"누가…. 흑,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알아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번 더 배 부근을 주먹으로 쳐봤지만 내 주먹만 아플 뿐이었다.
"오구오구 귀여워라."
제도 구경이고 뭐고 기숙사로 돌아갈까? 이 여자랑 같이 있는 것보단 그냥 공부나 하는 게 훨씬 행복할 것 같은데.
"달달한 거라도 사줄까? 남자들은 단 거 좋아하잖아. 조금 먹어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몰라."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요?"
"사과하는 셈 치고 사줄게. 따라와 봐."
하이네스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반항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내가 반항한다고 끌려가지 않을 수도 없었고 이런 골목길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따랐다.
"호떡 사줄게. 내가 진짜 맛있게 하는 집을 알거든."
판타지 세계에 무슨 호떡인가 싶겠지만, `난세`의 제작사가 한국회사라서, 반죽에 꿀 넣고 눌러서 만드는 빵 같은 건 데 있을 법도 하다는 변명으로 이 세상엔 호떡이 존재했다.
그 외의 각종 한식도 꽤 있는 편이고.
덕분에 내 입맛에 아주 안 맞는 음식은 잘 없다. 조금 느끼할 때도 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달까.
"냠…."
"어때 맛있지?"
하이네스가 사준 호떡은 확실히 맛있었다.
입에 넣는 순간 바삭한 느낌이 느껴졌고 이빨이 조금 들어가서 떡부분을 잘라내자 내부는 쫀득한 게 반죽 부분만 먹어도 맛있었다.
현실에서 자주 먹던 씨앗 호떡같이 안 에서 씹히는 느낌은 없었지만, 당도 높은 꿀이 혀를 즐겁게 해줬다.
정신은 멀쩡한데 혼자서 울고 있던 몸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됐으니, 꽤나 맛있었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긴 하네요."
"삐졌어?"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거든요? 안 보내 줄 것 같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 당장이라도 기숙사에 돌아가고 심정이라고요."
"기분 좀 풀어라. 내가 미안해. 많이 놀랐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해 봤자, 사과하는 느낌은 하나도 안 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나를 빡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걸까?
"내가 제도 구경 제대로 시켜 줄게. 그만 뚱해 있어라. 누나 슬슬 기분 나빠지려 그런다?"
자기가 먼저 잘 못 해 놓고 이젠 협박까지 한다.
그래, 아직은 내가 약자의 몸이니까.
정신은 오래전 부터 멀쩡했고 몸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으니, 태연한 척 연기를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래서 어디를 구경시켜 줄 건데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놀란 것일까? 하이네스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일단 대성당부터 보러 가자. 나는 그렇게 좋아하는 곳은 아닌데, 보통 사람들한테는 가장 먼저 안내해 주는 곳이거든."
"대성당은 한 번 가봤어요. 기숙사 들어오기 전에 제도에 처음 왔으면 꼭 봐야 하는 곳이라고 한 번 들렀었거든요."
내가 플레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너진 대성당을 보고 아카데미 입학 전에 봤던 대성당의 모습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아마 한 번은 보긴 했을 거다.
대성당은 제도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이미 오래전에 신과의 연결이 끊겨,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신과의 연결이 있었을 때 세워졌던 거대한 건축물은 아직 우리는 신을 잊지 않았다는 상징의 역할도 한다.
의미와는 별개로 내부도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으니 제도 제일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일러스트도 힘줘서 그렸다는 티가 팍팍 났고, 글로 묘사되는 분위기도 상당했다.
다만 나는 그렇게 좋아하는 건물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난세가 찾아오면 누구의 손에든, 어떤 방법으로든 무너지는 건물이다.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쓰이기에 아무리 멋져도 마음 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가보고 싶은데는 없어?"
가보고 싶은 곳이라…. 머리를 굴려도 그렇게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차라리 플레아의 고향 마을이라던가, 내가 장차 터를 잡게 될 제국의 서부면 몰라도 제도 안에서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었다.
기본적으로 제도의 건물들은 꼭 필요한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관광지를 구경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딱히 없어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안내해도 될까?"
"괜찮아요."
"그래, 두 말 하기 없기다."
얼마나 이상한 곳으로 데려갈 생각이면 저렇게 밑밥을 까는 걸까?
하이네스를 따라서 천천히 이동했다. 건물들의 모양세가 주택처럼 변해가는 것에 뭔가 불안감을 느꼈지만 주택가를 지나가는 게 지름길이겠지, 하면서 억지로 나를 안심시켰다.
"설마 지금 선배 집 가는 거 아니죠?"
"아, 들켰나?"
아니 이 인간이? 오늘 처음 본 남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게 말이 돼?
심지어 아까 나를 납치하네 마네 했던 사람이?
"선배 집순이었어요?"
"집순이? 집에서 있는 시간이 길긴 한데, 집순이는 아니야. 친구들이랑은 자주 놀러 다니지만, 너랑 같이 갈만한 곳은 아니어서 우리집으로 데려가고 있는 거고."
"오늘 처음 본 남자를 집으로 데려간다는 게 말이 돼요?"
"안 될게 뭐 있어? 설마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 할까봐 그래? 누나 그런 사람 아니다."
절대로 안 간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이네스와 프레스티아는 친하다.
둘 다 지방파 귀족이니 제도에는 별장 역할의 주택을 샀을 것이다.
둘이 친한 만큼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눈 한 번 꼭 감고 하이네스의 집에 가면, 높은 확률로 프레스티아의 집을 알 수 있게된다... 안 갈 이유가 없는데?
"제도에 관심도 없는 애를 데리고 건물들 구경하는 것보다는 우리 집에서 근사한 저녁이라도 대접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너도 발아프게 걷는 것보다는 집에서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낫지 않아?"
"좋아요. 대신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혀 깨물고 자살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애도 참, 뭔 말을 그렇게 무서워 해, 밥만 먹이고 보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집에 동생도 있는 데 동생 있는 곳에서 너 한테 이상한 짓을 하겠니?"
동생? 미레타 하이네스한테 동생이 있었나?
아카데미 파트를 진행할 때는 아예 접점이 없었기에 몰랐지만 내가 기억 속에서 미레타 하이네스에겐 동생이 없었다.
있었으면 한 번쯤은 계략의 대상으로 등장 할 법 했는 데 한 번도 그런 기억이 없다는 건 아마 진짜로 없다는 거겠지.
"... 혹시 그 여동생인가요?"
"응, 징그러운 여동생."
"혹시 남자를 무서워하나요?"
"둘이 아는 사이야? 어떻게 알았어? 어릴 때 자기 실수로 주변 남자애 하나를 죽여버린 적이 있어서 남자가 다가오는 걸 많이 꺼려하지."
이왜진?
이게 왜 진짜야?
아니 아까 반 장난 삼아 했던 생각이 진짜라고?
`난세`의 미레타 하이네스는 남성 공포증이 남성 혐오증까지 발전 했다.
자기가 남자애를 죽여서 발생한 남성공포증이 혐오증으로 까지 발전하진 않았을 테니, 아마 이쪽 세상의 미레타 하이네스와 `난세`의 미레타 하이네스가 남성공포증을 겪게 된 계기는 분명 다르겠지만 내 눈앞에 있는 여성보다는 동생 쪽이 내가 아는 미레타 하이네스와 훨씬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내가 프레스티아 같은 캐릭터로 단 한 번만 플레이 해봤다면 하이네스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 전부 알 수 있었겠지만, 나는 플레아 원툴 유저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하이네스가에 대한 정보는 미레타 하이네스가 대단한 마법사로서 프레스티아 밑에 들어간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양한 캐릭터를을 플레이 해보는 건데 하는 후회감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좋은 거지.결국, 영입할 인재가 두 명이 된거니까.`
어쩌다가 동생이 언니의 이름을 이어받은 건지, 아니면 뺏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시점에 개입하면 둘 모두를 내 밑으로 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가능해야만 한다. 그래야 프레스티아에게 대적할 만한 세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자 도착했다."
생각을 잠시 접고 고개를 들자, 거대한 저택이 시야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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