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제도 구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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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스에게 들려서 이동하는 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공주님 안기로 들리거나, 하다못해 업히기라도 했으면 자존심이 좀 상했을 것 같은데 하이네스는 무슨 인형 들듯이 들고 이동을 했으니까.
자존심이 상하기 이전에 어이가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이제 내려주세요. 안 힘들어요?"
"너 같이 작은 남자애 하나 드는 게 얼마나 힘들다고 그러냐? 안 힘들어."
20kg짜리 쌀포대도 이상한 자세로 들면 허리가 나간다.
아무리 내 몸이 작고 가벼운 편이어도 40kg 근처는 될 텐데 힘들어 보이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말로만 듣던 힘 법사인가 싶었다.
`하긴 아무리 마법사여도 무력 스탯이 10이 넘으면 일반인보다는 세니까.`
주군이 프레스티아인 만큼 몸 관리도 철저히 했을 테니, 마법사인 하이네스라도 나를 들고 이동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제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래, 우리 후배님이 부끄러우시다면 내려 드려야지."
이번에도 안 내려놓으면 어떻게 해야 고민했었는데 말은 잘 듣네.
"근데 뭐 하고 놀 거에요?"
"플레아는 제도가 처음이지?"
워낙 많이 플레이한 게임이다 보니 대략적인 지형은 알고 있었다.
일러스트로 본 건물들도 많았지만, 직접 본 적도 없는 데 와봤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
그리고 플레아의 설정상 제도는 일주일 전에 처음 와 본 건데 와본 적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네, 저번 주에 처음 왔어요."
"구경해 본 적 있어?"
"아니요, 몇 번 나가보려고 했는데 경비 아주머니가 위험하다고 막으셔서 못 나갔어요."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나가면 허락해주면서, 친구 없는 아싸는 밖으로 나가지도 말라는 건가?
제도의 거리는 나 같은 남자애 혼자 걷기엔 위험하다면서 절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당장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봤자 크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몰래 담을 넘어서 나가거나 하진 않았다.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다고 그러는지, 제도가 무슨 무법지대도 아니고."
"스스로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난 지 인식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너 혼자 제도의 거리를 걸었다간 10분 안에 납치당하거나 무서운 누나들한테 헌팅 당할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으로부터 딱 2년 후면 제도의 치안이 개판이 되긴 하지만 지금은 치안대가 잘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범죄 집단이 음지에 숨어 있긴 하지만 제도 중심부에서 사람을 납치할 정도로 막 나가는 집단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아카데미의 제복도 입고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을 납치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내기할래? 나랑 떨어져서 걸으면 10분 안에 납치된다. 안 된다. 실제로 납치되면 구해줄 테니까 너무 무서워하진 말고."
"좋아요. 제가 이기면 나중에 소원하나 들어줘요."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다. 쫄리면 죽으시던가.
"좋아. 대신 내가 이기면 네가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뭐든지` 말이야."
하이네스의 끈적한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내 몸을 덮쳤지만,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다.
하이네스가 무슨 소원을 빌지는 절대 중요하지 않다.
"좋아요. 이제 떨어져서 걸어주세요."
"그래, 납치당하고 나서 울고불고 빌지나 마."
하이네스가 나랑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인파가 꽤 있는 곳이어서 어느 순간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됐다.
`확실히 여자의 비율이 많이 높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남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난세` 본판에서는 반반 정도의 비율을 유지했던 거 같은데 왜 자꾸 성비가 깨지는지 모르겠다.
`대성당도 아직 멀쩡히 남아있고, 사람들도 활기가 넘치네.`
뭔가 익숙지 않은 제도의 모습이었다.
일러스트로만 봐왔던 걸 진짜로 봐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제도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부서진 곳 하나 없고, 무너진 건물도 없는 평화로운 제도의 모습
`역시 본 게임이 시작되려면 멀었구나.`
2년 후면 지금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을 거란 생각에 제도의 거리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길을 걸었다.
평소라면 기숙사에서 복습할 시간이었지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10분이 됐나?`
하이네스를 찾아봐야지 하고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릴 때 누군가가 나의 입을 막아왔다.
"우웁!!"
오른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양손을 잡아 제압한 채 나를 이끌고 근처의 골목길로 향했다.
`진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이제부터 이 새끼는 토끼 새끼다. 뒤에서 잡혀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카데미 학생을 납치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라면 아마 근처의 노숙자가 아닐까 싶다.
내기에서 진 건 아쉽지만 아마 금방 하이네스가 도와주러 오겠지. 그다음엔 내 뒤에서 나를 콱 끌어안고 있는 토끼 새끼가 감옥에 들어갈 것이다.
근데,
`왜 안 와?`
설마 사람이 많아서 놓친 거야?
"우우우웁!!!"
하이네스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천천히 밀려왔다.
이대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아카데미 학생을 죽인다는 건 자신이 사형당할 걸 감수한다는 뜻이니까.
나를 납치한 년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겠지.
강간당하는 것? 사실 그렇게까지 무섭진 않았다. 육체는 단단히 겁을 먹고 떨고 있었지만, 정신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몸을 팔 생각이었다. 외모는 내가 가진 최대의 무기였다. 좋게 쓸 수 있을 땐 사용하는 게 맞겠지
따라서 이런 곳에서 강간 한 번 당한다고 내 순결성이 더럽혀지거나 하진 않는다.
내가 진짜로 무서운 건 프레스티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거다.
프레스티아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외모 때문이다.
나를 죽일까 살릴까 고민했을 때조차 눈빛에서 끈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사실은 더욱 명확했다.
결국, 나를 살린 이유도 외모 때문이었고.
라이넬을 영입한 건 때문에 나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을 지 모르지만, 과연 이런 곳에서 강간을 당한 나를 이전과 똑같이 바라볼까?
현실에서 처녀에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그녀도 나의 동정에 집착하고 있진 않을까?
아직 나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내가, 남자로서의 가치 중 하나를 잃는다면 그녀가 나에 대한 흥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쓸 모가 없다고 죽일지도 모르지.
`절대로 그럴 순 없지.`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몸의 동정은 프레스티아의 것이다.
일단 아무리 힘을 줘도 떨어지지 않는 손을 당기려 힘 쓰는 걸 멈추고 토끼년의 인상착의를 살폈다.
정면에서 바라본 건 아니라서 팔과 다리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외워둬야 혹시 도망가면 신고라도 할 것아닌가.
`노숙자인 줄 알았는데 꽤 좋은 옷을 입고 있네?`
당장 눈에 보이는 팔은 꽤 고급스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상의에 둘러싸여 있었다.
색은 너무 진하지는 않고 적당히 맑고 차가워 보이는 푸른색….
`잠깐….`
내가 입고 있는 제복의 팔 부분을 확인해 봤다.
틀림없이 푸른색이다. 그것도 지금 나를 잡고 있는 인물이 입고 있는 옷과 동일한색의 푸른색.
`하이네스 개자식이!!`
분노를 꾹 참고 검지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고 있는 하이네스의 오른손을 톡톡 쳤다.
"푸하하하! 이제 눈치챈 거야?"
하이네스가 나를 풀어주자마자 바로 뒤돌아서 정권을 날렸다.
법사 주제에 복근이 왜 이렇게 단단한지, 내 손이 더 아픈 것 같았지만, 분노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이러는 게 어딨어요?! 내기에서 질 것 같으니까 본인이 납치하는 건 반칙이잖아요."
"오구오구, 그렇게 화났어? 우는 얼굴로 화내 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눈가를 만져보니, 눈물이 묻어나왔다.
나약한 육체 같으니라고, 이런 거에 울어?
"그리고 반칙 아니야. 너 같이 귀여운 남자애가 제도에서 혼자 돌아다는 걸 발견했으면 난 틀림 없이 납치했을 테니까. 네가 아카데미 학생이든 말든 상관 없이 말이야."
하이네스가 나한테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리고 이 골목길에서 너를 잔뜩 더럽힌 다음에 우리집으로 끌고 갔겠지. 그리고 평생 가둬 놓고 노예로 썼을 거야."
"ㅅ…. 사람을 납치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치안대가…."
"치안대? 너 내가 누군지 모르니?"
한 발자국씩 밀리다 보니 어느새 벽까지 몰려있었다.
"치안대가 감히 하이네스가의 차녀를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아? 제국에 반기를 든 것도 아니고 고작 남자애 하나 납치 한 거로?"
정신이 새하얘 졌다. 나약한 육체는 울음이 많은지 볼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ㄱ…. 그래서, 지금 저를 납치하시겠다는 거에요?"
티 내지 않으려고 해도 내 목소리엔 울음기가 잔뜩 끼어있었다.
실제로는 전혀 무섭지 않은데, 육체가 나약해서 겁먹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그런 내가 귀여웠던 것인지 하이네스는 방긋 웃었다.
"천만에, 어제 만났으면 몰라도 오늘은 귀여운 후배님이잖아? 하나뿐인 학생을 납치할 순 없지."
하이네스가 살짝 물러났다.
"그래도 명심해 둬, 제도에는 귀족들이 많고 그들이 보기엔 너는 잡기 쉬운 먹잇감일 뿐이니까. 앞으로 아카데미 밖으로 나올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 라이넬이라는 기사반 애랑 같이 나가봤자 걔도 평민인 거 같으니까 아마 효과 없을 거야."
하이네스가 가슴 언저리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내 눈과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진정되면 말해. 제도 구경하러 나온 거니까. 즐겁게 놀아야 하지 않겠어?"
나를 보며 씩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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