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마법을 배워보자1
* * *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잘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드디어 프레스티아의 본 모습을 봤다는 희열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기숙사에 돌아가서 프레스티아 모습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고압적인 눈빛, 오만한 미소, 여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에 하마 타면 그 자리에서 충성을 맹세할 뻔했다.
`분명 자기 밑으로 들어올 거라고 했지?`
긍정적인 신호다. 프레스티아가 라이넬 뿐만 아니라 나도 영입 대상으로 두고 있다는 건 나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순조롭게 일이 풀려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하지만 그녀의 밑으로 들어갈 순 없다. 그녀는 쉬운 사람한텐 관심도 안 주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녀가 나를 지배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녀를 지배하는 쪽이 약 120만 배 정도 더 좋다.
물론 그녀를 지배하기 위한 과정은 정말 어렵겠지. 어쩌면 중간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현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그냥 죽게 될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일인데 죽을 걱정을 왜 해?
그럴 걱정을 할 시간에 프레스티아나 한 번 더 생각하는 게 이득이다.
`그래도 흥분을 좀 가라앉힐 필요는 있겠지.`
그녀와 헤어진 지 30분이 넘었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전신을 도는 느낌이었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하다니 프레스티아는 여신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오만하고 위대한,
`아마 지금도 일을 하고 있겠지.`
제국을 먹어 치우고자 하는 사람이다. 한가롭게 쉴 시간은 없겠지.
그녀를 얻어 내고자 하는 나 또한 한가롭게 쉬고 있어선 안 되겠지.
공책과 펜을 들었다. 현실에선 죽어도 하기 싫었던 공부였지만 지금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
제국 아카데미는 학생들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서 교육한다.
행정반, 기사반, 마법반
직관적인 이름 그대로 행정반은 도시에서 벼슬을 하거나 개인 영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기사반은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마법반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 훈련을 한다.
제국에 대한 충성, 같이 공통으로 배우는 과목이 아니라면 학생들의 자신이 속한 반의 지식만 배우는 것이 끝이다.
그런데 행정반에 다니는 애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마법반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내가 집안의 장녀라서 행정을 배워야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있는 제도가 방과 후 제도다.
방과 후 강의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들을 수 있다. 몇몇 심화 과목은 특정 과목을 학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강의를 진행하기에 다른 반이 갔다가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못 할 확률이 높지만, 이론적으로는 모든 강의를 다 들을 수 있다.
강의료도 싼 편이라서 나 같은 평민이나 제도에 연고가 없는 지방파 귀족들은 많이 애용하는 편이다.
당장 나만 해도 교양 마법, 영지 경영을 필두로 5과목을 신청했다.
`오늘이 첫 수업인가?`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와서 그런지 안에 사람이 없다.
교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하니 강의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공책을 펴고 복습을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살짝 트니 라이넬이 쭈뼛쭈뼛 내 옆으로 다가와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진행되는 강의는 교양마법, 기사의 마나와 마법사의 서클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이 아가씨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교양마법을 신청했다고 하더라.
"내 옆에 앉으세요. 애초에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보러 오신 거잖아요?"
"넵, 감사합니다."
라이넬이 옆에 앉았다. 현실의 중고등학교처럼 두 개의 책상이 붙어져 있지 않고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너비로 벌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잠재력은 확인 못 하나? 분명 무력 능력치가 늘긴 했을 텐데.`
본 판에서 무력이 82인 라이넬이었으니 80대 중후반은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내 눈앞에 푸른 창이 나타났다.
라이넬
나이:16
무력:43/87
통솔:13/44
마력: 46/87
지력:13/32
매력:46/52
정치:15/36
`이게 진짜 뜨네.`
차근차근 능력치를 읽어봤다. 무력은 딱 생각한 만큼 늘어났고 그 외에 달라진 스텟은 없었다.
전투력은 충분하지만, 지휘관을 맡길 수 없는 인재, 내가 기억하고 있는 라이넬 그대로였다.
매력이 왜 이렇게 낮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매력이 높으면 예쁘고 잘생긴 건 맞지만, 그 역이 성립하진 않는다. 라이넬 정도로 예쁜 사람이 매력이 50도 못 찍는다고 이상할 건 아니었다.
`프레스티아는 어떨까?`
본판에서 프레스티아의 무력은 무려 99, 아슬아슬하게 그랜드 마스터에게 미치진 못 했지만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남녀 역전 버프를 받았으면 무력 100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력 100은 단 한 명뿐이라는 `난세` 의 법칙이 깨지는 게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상태창을 빤히 바라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라이넬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 꼴이 돼버렸다.
"그냥, 예쁘셔서요."
라이넬이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난세`의 라이넬은 이렇게 부끄럼이 많지 않았는데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 예쁩니다!"
밖에 나가서 그렇게 말했다간 비틱질한다고 처맞을 것 같은데?
그래도 칭찬을 받은 건 기뻤는지 입가 슬금슬금 올라가려고 하는 걸 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뭐야 아직 두 명밖에 안 왔어? 분명 5명이라고 들었는데."
조금 더 놀려 줄까 고민하던 찰나에 앞문으로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쨍한 연두색 머리카락에 이 세계의 배경이 게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강의를 진행할 교수님인가 싶었지만 절대 교수님일 것 같진 않았다.
교수님치곤 지나치게 액면가가 낮아 보이기도 했고 이상한 취향이 있는 사람이 아닌 다 큰 어른이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만약 이상한 취향이 있어서 굳이 제복을 입고 계신 거라면 이 강의는 드랍 해 버려야지.
강의는 정상적인 사람한테 듣고 싶다.
"얘들아, 언제부터 시작이지?"
"4시 30분 부터에요."
"10분 남긴 했네."
그녀는 우리를 보지도 않은 채 시계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1분이라도 늦는 순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듯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데 누구세요?"
교수는 아닌 거 같으니, 성적을 빌미로 잡혀서 교수의 따까리를 하는 선배가 아닐까?
"나? 너희 선배, 3학년이야."
정확한 예상이었다.
"원래 교수님이 오셔야 하는 데 오늘은 바쁘시다고 나한테 떠넘기셔서 내가 대신 왔어."
선배는 시계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더니 무언가에 홀린 듯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내 쪽으로 옆에 있는 라이넬한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 네가 걔구나? 이르엘 한테 찍혔다던 애, 이렇게 보니까 진짜 귀엽네."
그녀의 눈빛은 꽤 찐득했다. 나라서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거지 이쪽 세상에서 나고 자란 남성이라면 이 시선만으로 도망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내 입장에선 즐기기 좋은 시선일 뿐이었다. 이 정도 미녀한테 끈적한 시선을 받아보다니 현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런 애가 괴롭힘당한다니 불쌍한데? 누나가 이르엘한테 더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줄까?"
조연급 인물인 줄 알았는데 나름 힘 좀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사모아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면 꽤 친한 모양인데, 생각 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사모아와 친분이 깊다면 중앙파 귀족일 텐데 늘 지방파 세력으로 플레이해 온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는 연두색 머리카락의 캐릭터들을 조금 떠올렸지만 이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커뮤니티 질을 했던 건 프레스티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으니까. 다른 캐릭터까지 기억할 여력은 없다.
어쩌면 남녀역전 모드를 깔아서 새롭게 생겨난 캐릭터일 수도 있고.
"내가 이르엘이랑 좀 친하거든? 내가 말하면 분명 그만둘 거야."
눈빛이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 순수한 호의에서 하는 일은 아니겠지. 나에게 빚을 지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잘 생기기만 한 남자아이일 뿐이다. 나 같은 애한테 빚을 지게 해서 무슨 큰 이득이 있겠어? 아마 남자애한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이겠지.
`어떻게 할까?`
사모아 파벌의 괴롭힘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끽해야 책상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고 지나가다가 물 좀 맞고, 책상에 물건을 두고 떠나면 절대로 남아있지 않고 가끔 구석진 곳에 끌려가서 맞을 뿐 심한 괴롭힘은 당해 본 적이 없다.
중세시대다 보니 여자애들한테 끌려가서 윤간당할 것까지 각오했는데 체면 때문에라도 그런 일은 안 저지르더라.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모아 파벌에게 찍힌 덕분에 불필요한 관심도 받지 않아서 나름 좋은 면도 있던 참이었다.
지금도 잘살고 있는 데 굳이 빚을 질 필요는 없지.
"어? 힘들지 않아?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설마 거절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걸까? 당황이 팍팍 드러나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게 꽤 귀여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눈앞의 여성은 상당한 미녀였으니까.
"괜찮다니까요? 신경 안 써주셔도 돼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올려다봤다.
얼굴이 붉어진 채 나를 노려보는 걸 보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아, 애들 오는 데요? 수업 시작 안 해요?"
때마침, 애들이 반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3명 모두 친구인지 동시에 들어오는 그녀들은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맙다. 얘들아, 타이밍 진짜 잘 맞추네.
그녀는 진짜 빡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설마 때리려는 거야? 숙녀 답지 못 한데?`
옆에 라이넬이 있으니까 마법반 3학년한테 맞을 일은 없으리라.
내 뺨을 때릴 줄 알았던 손은 내 머리 위로 향하더니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그녀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노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고 재밌다는 즐거움에 가득 차있는, 밝은 목소리였다.
`미친 건 제가 아니라 당신 같은데요.`
화났다가 즐거웠다가. 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럼 애들도 다 왔으니까 내 소개를 해볼까?"
내 머리에 얹은 손을 내려놓고 교탁으로 걸어갔다.
"나는 미레타 하이네스. 교양 마법의 조교를 맡게 된 너희 선배님이시다."
"아,"
탄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미레타 하이네스, `난세` 를 플레이하면서 수백 번도 더 봤던 이름이었다.
`누나가 왜 여기서 나와요.`
그녀는 프레스티아의 마법사 군단를 지휘하는 군단장이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