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아카데미 입학3
* * *
프레스티아 헬링,
그녀가 누구인가, `난세`의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캐릭터.
모든 능력치가 90을 넘는 완벽한 군주.
늘 최후까지 남아 플레이어와 결전을 벌이는 최종 보스.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긴 하지만 잔혹한 성정과 악독한 난이도로 플레이어를 반기는 최종 보스의 포지션에 있었기에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러스트가 아무리 예쁘고 더빙이 잘 되면 뭐하나, 예쁜 얼굴 보고 빠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10판 하면 5판은 그녀한테 게임 오버를 당하는 데, 당연히 빡치지.
그녀의 악명이 얼마나 높으면 커뮤니티 등지에선 그녀를 악마 년이라고 불렀다.
나야 난이도가 어려워지면 즐기는 변태여서 괜찮았지만, 일반 유저 입장에서 그녀의 존재는 악마 그 자체였으리라.
내 입장에선 오히려 좋았다. 나만 그녀를 최애캐로 삼고 있었으니까.
근데 이렇게 까지 예뻐도 되는 거야?
티 없이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코, 일러스트로 자주 보아 왔던 오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신과도 같았다.
"제가 반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런 최애캐가 나를 에스코트 해주고 있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에스코트 받는다는 생각에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여기는 남녀역전 세계니까 이게 당연한 거라고 나 자신을 세뇌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신가요?"
최애캐한테 에스코트 받는 느낌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있는 나를 일으키고 부축해줬는데, 몸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딱 붙어 걷는 데도 나에 대한 경계는커녕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눈빛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마 남녀역전 세상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
남녀역전 최고다.
`여기가 천국인가.`
현실이고 뭐고 여기서 평생 살고 싶었다. 최애캐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니, 기쁨에 한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많이 무서우셨나 보군요."
내가 흘린 눈물이 두려움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 걸까? 머리에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원래 세계의 남성성 따위는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 프레스티아님 밑으로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프레스티아는 야망가다.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언젠간 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온 천하에 들어내겠지.
천성이 군주인 프레스티아는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존재에겐 매우 차갑다.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증명한 나의 능력은 외모 단 하나뿐이다. 단지 미모 하나로 그녀의 밑에 들어갔다 간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겠지.
아니면 성노예처럼 구를지도 몰랐다. 상대 군주를 방심하게 하거나 거래의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도 있다.
그녀의 장난감으로써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지만, 남녀 사이에 가장 건전한 관계는 역시 연인 아닌가.
어떻게 만난 최애캔데, 버려지거나 팔려갈 순 없었다.
다행히 나는 `난세`만 5천 시간을 넘게 한 하드 유저였고 그녀를 공략하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프레스티아님."
프레스티아를 살며시 밀어냈다. 프레스티아 정도의 무력이면 내가 민 것 가지곤 기별도 안 갈 텐데, 부드럽게 밀려나서 떨어져 줬다.
조금은 더 붙어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빨리 밀어낸 게 아닐까?
그녀와 떨어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말없이 있었으면 교실까지는 붙어서 갈 수 있었을 텐데.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헬링 후작가의 차녀님이시니까요. 프레스티아님을 모를 수가 없죠. 얼마나 유명하신 분이신데요."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신사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사모아 따위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부하들을 시켜 나를 둘러싸고 강압적으로 물어본 사모아와랑은 다르게 프레스티아는 배려가 가득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나에게 물어왔다.
가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긴 건 잘생긴 나였으니까 장난감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나?
"플레아 아이데스라고 합니다."
"플레아라 예쁜 이름이네요."
어쩜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녀의 미소에 내 심장이 터질 듯 쿵쿵댔다.
말 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서 그저 걷기만 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아,"
아쉬운 탄성이 나왔다. 강당에서 교실까지 거리는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조금이라도 더 대화할 걸, 후회가 밀려왔다.
"다음에 봐요. 플레아씨."
가볍게 윙크를 하고 반으로 들어가는 프레스티아의 모습에 심장이 녹아내리듯 아찔했다.
얼마나 충격이 심했는지 3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마냥 서 있기만 했다.
"저기, 학생? 슬슬 조회 시작할 건데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셈인가?"
"아, 죄송합니다."
발걸음을 재촉해 내가 배정된 반으로 향했다.
14라고 적혀있는 팻말이 보였다.
제국 아카데미 아니랄까 봐 팻말도 은으로 도금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조심히 문을 열고 반으로 들어가니 시끌시끌했던 교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여자애들이 나를 보고 침을 꼴깍 삼키는 보고 있노라면 이 몸이 정말 잘생기긴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당신을 꼬실 순 없겠지.`
프레스티아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단순히 얼굴만 가지고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아끼는 장난감 정도가 고작이겠지.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 하나같이 만만한 조건은 아니다.
일단 그녀보다 세력이 커야 한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순 없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그녀를 꺾고 제국을 차지했으니까.
제일 큰 문제는 그녀와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동맹으로 시작해서 전력의 확실한 우위를 각인시키고 충성을 받아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녀는 자신보다 강한 세력이라고 해도 한 번 적으로 삼았다면 공멸할 때까지 물어뜯었고 자신보다 약한 자는 철저히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그녀와 동맹을 맺는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그녀는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뒤통수를 노릴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뉴비들이 그녀에게 배신당하고 징징대는 글을 올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나도 그녀에게 몇 번이나 배신당한 적이 있었다.
나도 처음 배신당했을 땐 뒤통수가 얼얼했지.
그렇기에 그녀보다 강력한 그녀의 동맹이 되어야 했다. 최후의 둘 만 남았을 때 그녀가 스스로 내 밑에 들어오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는 평민이 그런 힘을 키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능해.`
충분히 방법이 있었다. 몇 번이고 해냈었다. 게임에서 해낸 것이긴 하지만 주요 골자가 바뀌진 않았을 터, 내 지식을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남녀역전 세계라서 불리하지 않냐고? 플레아는 힘캐가 아니다. 지략과 매력으로 승부하는 군주형 캐릭터지. 남녀역전의 여파로 약해진 무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력이 올라가서 상향됐다고 봐도 무방하지.
남성이라서 어려워? 원래 `난세`에는 여성 군주도 많았다. 당장 프레스티아만 해도 여성이 아니던가. 나라고 못 할 게 없다.
`그러면 계획을 세워야지.`
교수로 보이는 아저씨가 들어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녀를 공략하기 위한 청사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
"주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잘생긴 신사분을 에스코트 해드렸거든."
"아까 사모아 공녀한테 대든 그 남성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멍청한 건지 용기가 넘치는 건지, 평민으로 보이는 데 귀족한테 대들다니, 참 간도 크네요."
글쎄 어느 쪽일까? 그녀는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였다면 내게 도움을 받기 전에 그 무리를 탈출했겠지.
그녀도 여자였기에 잘생긴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긴 했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남성은 너무 멍청했다.
`플레아라고 했었나?`
남성은 감정적인 생물이라는 말이 맞는 듯 보였다.
한 번 도와준 걸로 그 남자는 자신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무리 자신을 도와줬다고 해도 처음 보는 외간 여성한테 그렇게 편하게 몸을 기대지 않나, 밀쳐내면서도 눈에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이 사랑에 빠진 남자 그 자체였으니까.
정말 쉬운 남자였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에 빠지다니.
`쉬운 남자한텐 관심 없는데.`
그래도 생긴 건 잘 생겼으니까 노예로 삼으면 제 역할을 충분히 하겠지.
그녀도 여자였다. 가는 남자는 막아도 오는 남자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를 침대에 끌고 가는 상상을 하자 아랫배 부분이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