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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캐를 꼬시는 법-2화 (2/312)

〈 2화 〉 아카데미 입학­2

* * *

생각을 해보자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사모아 공작가는 중앙파 귀족 중에선 가장 입김이 센 귀족가다. 가문의 일원이 수많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고 사모아 공작가에 잘 보이려는 이들이 바치는 뇌물도 많이 받아서 재정적으로도 부유하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모아 공작 영애, 정확히 말하면 이르엘 사모아 공녀는 사모아 가문의 장녀다. 모난 곳 없는 장녀니 만큼 아마 사모아 공작가를 물려받게 되겠지.

이렇게 정리를 해 놓고 보니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감이 잡힌다.

예쁘기만 한 평민이 여기서 가장 높으신 분을 무시한 꼴이 됐으니 중세의 시대 관념에선 충분히 화낼 법한 일이겠지.

"나이와 관계없이 신사분을 에스코트해드리는 게 레이디의 일이랍니다."

억눌린 분노가 생생히 느껴졌다. 느끼함이 가득한 어투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듣기 좋았지만 맹렬히 느껴지는 적의에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렸다.

하긴 현실로 따지면 재벌 2세가 화를 억누르며 말하는 꼴이니까 무서울 만도 하지.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에스코트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당장 공녀의 마음의 누그러지겠지.

아마 한 번 웃어주면 나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일까?

여자한테 에스코트를 받는 것이 좋다 싫다를 따지기 전에 사모아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시점엔 사모아 공작가가 가장 강성한 세력이지만 본격적인 난세가 시작되면 별 볼 일 없는 세력 중 하나로 전락한다.

게다가 사모아 공녀의 성격도 그리 좋지 않다. 남녀역전 모드 이전에도 망나니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성격이 안 좋을지 감도 안 온다.

그런 세력에 내 몸을 맡겨라? 절대로 싫었다.

겨우 에스코트 한 번 받는 거로 파벌에 들어가네, 세력에 들어가네를 따지는 게 이상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 매력 97의 남성이다.

사모아 공녀 정도 되는 권력자가 나를 풀어줄까? 그녀의 손을 따라가면 아마 평생 그녀의 밑에서 지내게 될 거다. 어른들이 모르는 사람 손 잡고 따라가지 말라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헬링 후작가면 몰라도 사모아 공작가는 아니야.`

세력, 주군의 성품, 능력, 미모 모든 면에서 헬링 후작가가 나았다.

"저는 미천한 평민일 뿐이어서요. 공녀님의 에스코트를 받기엔 너무 부족한 몸이에요."

허리를 한 번 숙이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까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강당 전체에 울렸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공포에 몸이 비틀거렸다. 정신은 멀쩡한 데 왜 몸만 이렇게 겁을 먹었는지.

적당히 구석 자리에 앉으니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졌다. 공녀님한테 찍힌 남자 근처에 있다가 괜히 손해를 보기 싫은 모양이지.

사모아 공녀한테 감사해야겠다. 괜히 파리가 꼬이지 않게 해줬으니까.

적어도 사모아 공녀를 이길 자신이 없는 사람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지.

입학식이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끌려가서 두들겨 맞는 게 아닐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입학식은 바로 시작됐고 여자애들한테 끌려가서 두들겨 맞는 일은 없었다.

`어떤 업계에서는 포상이려나?`

***

입학식은 진짜 별 내용이 없었다. 잘 배워서 제국을 수호하는 인재가 되라느니, 학생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전부 평등하다느니 하는 형식적인 말뿐이었다.

이미 수십 번은 봤던 인트로였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냈다.

`드디어 끝났네. 뭔 입학식을 10분 넘게 해.`

요즘엔 입학식을 5분 만에 끝내는 곳도 있다던데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이었다.

찌뿌둥해진 몸을 풀며 일어나자 나에게 다가오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뒤에서 사모아 공녀가 걸어오는 걸 보니 절대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도망갈까?`

몸을 돌려 움직이기도 전에 여성들이 나를 둘러쌓다.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가슴이 보이는 키 차이라서 일단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이봐, 너 이름이 뭐지."

괜히 가슴 안 보려고 시선을 내린 건데 사모아 공녀가 내 턱을 잡고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려서 사모아 공녀의 커다란 가슴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강력한 기세를 뽐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단단히 화가 났는지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중세의 귀족이니까 자신을 무시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이건 좀 무서운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호랑이 앞에 선 토끼의 심정이 이러할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봐 공녀님이 물으시잖아."

나를 둘러쌓고 있던 육체의 벽이 한층 좁아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살과 살이 부딪힐 정도의 거리였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완전 쓰레기들 아니야?`

현실로 치면 일진 여러 명이 여자애를 가운데 두고 협박하고 있는 거잖아?

"ㅍ... 플레아 아이데스라고 합니다."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공포에 잔뜩 떨리는 목소리에는 울음기마저 끼어있었다.

이게 진짜 내가 한 말인가? 싶을 정도로 어색했다.

"그래 플레아 아이데스군 혹시 내가 누군지 모르나."

사모아 공녀가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숨결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무심코 뒷걸음 질 쳤지만 뒤통수를 푹신한 덩어리가 막고 있었기에 움직이지 못했다.

"ㅇ…. 이르엘 사모아 공녀님이십니다."

`제발 떨지 좀 마!`

이게 남녀역전 세계의 남자라는 걸까? 내 생각보다 너무 나약한 몸이었다.

머리는 이리 냉철한데 혼자서 겁을 먹는 몸이 너무 미웠다.

난세에서 살아남으려면 당당해야 한다. 머리를 숙일 때도 불필요한 공포는 필요 없다. 눈물을 무기로 쓰기 위해선 최대한 아껴야 하는 법이다.

이 정도에 겁을 먹는 성격으론 살아남을 수 없다.

"알고도 그랬단 말이지."

사모아 공녀의 입에 비소가 지어졌다. 뭔가 큰일이 나겠구나 싶을 때 나에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아 공녀님, 여자 여러 명이서 신사 한 분을 압박하는 건 명예롭지 않은 짓입니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최애캐 였으니까.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목소리 들으려고 1만원짜리 더빙 모드를 구매했지.

"신사? 나는 나에게 반항하는 평민을 처벌할 뿐이다. 스스로 평민이고 나에게 에스코트 받을 자격도 없다고 주장하는 데 신사 취급해줄 필요도 없지 않나."

"공작님이 들으시면 참 좋아하시겠군요. 저번 주에도 사람 하나 죽여 놓더니, 이번엔 입학식 때 아리따운 신사분을 겁박하셨단 말을 들으시면 공작님이 기쁘셔서 한소리 하실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숨기지 않는 비꼼이 담겨있었다. 아마 사모아 공녀를 저렇게 당당히 비꼴 수 있는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저 사람 밖에 없겠지.

"나를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라뇨. 충고일 뿐입니다. 사모아 공녀님이 신사분을 겁박하는 걸 본 학생이 몇 명인데 설마 제가 이걸 공작님께 말씀드린다고 협박을 하겠습니까."

사람들한테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특유의 비웃음이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올랐다. 일러스트로만 봐왔던 표정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지금 멈추시면 제가 부하들을 시켜서 입막음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네가 이리도 관심을 갖는 걸 보니 이놈이 정말 잘생기긴 했나 보군. 이런 미남한테 점수라도 따고 싶은 건가?"

"저는 불쌍한 신사분이 더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 일말의 사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입학식이지 않습니까.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으로서 입학식 첫날부터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쯧."

나와 바깥을 단절 시키고 있던 육벽이 사라졌다. 이젠 안전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확 풀렸다.

­털썩

긴장이 갑자기 풀린 탓일까. 실이 끊긴 인형처럼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다음에 만나면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사모아 공녀 파벌이 떠나고 주저앉아 있으니 내 머리에 그림자가 졌다.

"괜찮으십니까? 신사분?"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천사가 있었다.

일말의 꼬불거림 없이 곧게 내려진 금발, 같은 벽안이어도 사모아 공녀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깨끗하고 강인한 눈동자. 몸매가 잘 부각되지 않는 제복 안에서도 꼿꼿이 존재감을 들어내는 거대한 기세.

남녀역전이 일어나며 인상이 조금 강해진 느낌이 내가 아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프레스티아 헬링.`

장차 거대한 세력을 이룰 헬링가의 차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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