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화 〉 아카데미 입학
* * *
"뭐야 신 모드 나왔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공지도 없더니 갑자기 모드가 추가 되있다.
가격이 3천 원인 걸 보니 제대로 된 모드는 아닌 거 같고, 아마 가끔 한 두 번씩 출시하는 어딘가 핀트가 나간 같은 병맛 모드겠지.
모드의 이름은 남녀역전 모드, 여성 캐릭터의 무력이 대폭 증가하고 남성 캐릭터의 무력이 대폭 하락 합니다. 남성캐릭터들의 지위가 하락합니다. 몇몇 남성 캐릭터의 매력이 상승합니다.
라는 짧은 설명이었지만 나는 아무 고민도 없이 3천 원을 결제했다.
3천 원이면 그렇게 부담 가는 돈도 아니었고 한판만 제대로 즐겨도 돈값은 하겠지라는 마인드로 가볍게 구매했다.
캐릭터를 선택하세요.
모니터에 거대한 지도와 띄워졌고 수많은 캐릭터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게임 `난세`는 게임 개발자들이 삼국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캐릭터들을 지원한다.
재밌는 서사를 가진 여러 캐릭터들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지만 정작 나는 게임을 처음 다운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캐릭터로만 플레이했다.
플레아 아이데스,
동부의 작은 마을 플로아출신, 어머니가 명예로운 기사로 유명해서 그녀의 주군인 남작의 소개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소년. 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귀족은 아니었다.
가진 것도 없고, 스스로의 무력도 약했다. 거의 모든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기반을 쌓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재밌었다. 온갓 악조건을 모두 이겨내고 대륙을 통일했을 때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플레아 아이데스
나이: 16
무력: 7/32
통솔: 7/24
마력: 12/43
지력: 38/93
매력: 97/102
정치: 42/97
`무력이랑 매력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
무력 80을 넘는 영웅들이 넘쳐나는 난세에선 크게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50은 넘었던 무력이 30대까지 내려와 있었고 분명 95였던 매력이 100을 넘어서 있었다.
`아무리 모드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능력치 한계는 100이라는 근본을 박살 내다니. 한 번만 하고 다시 플레이 할일 없을 것 같은 모드였다.
`그래도 한 번은 해야지.`
플레아 아이데스를 선택하고 게임 시작을 누르는 순간 의식이 끊겼다.
***
벌꿀을 닮은 황금빛 머리카락, 귀여운 눈매 속에서 밝게 빛나는 주황빛 눈동자. 어지간한 문장가들이 와도 이 미모를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귀여운 미소년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지금 거울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렇게까지 잘생긴 애는 아니었잖아?'
플레아 아이데스는 내가 `난세`라는 게임에서 가장 즐겨하는 캐릭터다.
메인 일러스트도 자주 봐 왔고 모든 이벤트 일러를 다 봤다.
일러의 플레아도 잘 생기긴 했다. 게임의 공식 일러인 만큼 어지간한 연예인들 급은 됐으니까. 그런데 이건 좀 선을 넘잖아?
얼굴만 귀엽게 생긴 게 아니었다. 단정한 제복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 몸의 선 하나하나가 완벽했다.
아마 신이 공평하다는 말이 참이 되려면 말도 오감이 전부 차단되는 정도의 흠이 있어야 그나마 무게 추가 맞겠지. 사실 현실의 나를 생각해보면 사지를 잘려도 플레아가 더 잘 나지 않을까 싶었다.
마냥 여자애 처럼 귀엽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미소녀보단 미소년에 가까운 인상이었으니까.
아마 현실에서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뉴스에 나올 정도 아닐까? 세상에 이렇게 귀엽고 잘생긴 사람이 있다니! 이런 식으로, 유튜브에 퍼지만 천만 조회수도 찍을 자신 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
`난세`는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다. 워낙 다양한 상호 작용을 지원해서 몰입도가 대단히 높지만 그렇다고 게임 캐릭터랑 내가 겹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게임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 정도 미소년이 됐으면 현실의 삶 정도는 어떻게 되든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문제는 여기가 `난세`라는 것이다.
제국이 몰락하고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는 시대.
게임이니까 즐겁게 했지 실제로 살아가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
"이 정도 외모면 조용히 살지도 못할 텐데."
원래 `난세`에서 매력 100을 찍은 캐릭터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북부의 꽃, 이델라, 작은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던 소녀가 미칠듯한 매력 때문에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플레아 아이데스의 인생도 절대로 평탄하지는 않겠지.
"그냥 적당한 세력에 들어가서 조용히 살까?"
헬링 후작가의 밑으로 들어가면 아마 난세의 막바지까지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언니 쪽으로 가든 동생 쪽으로 가든 끝까지 살아남겠지. 그만한 저력이 있는 가문이니까.
헬링 후작가가 멸망할 조짐이 든다면 다른 세력으로 갈아타면 될 일이다. 나는 기사나 마법사로서 헬링 후작가에 속한 게 아니라 군주의 첩, 내지는 장난감으로서 속해 있을 뿐일 테니까.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두면 되겠지.
똑똑
"일어나실 시간이십니다."
알람 기능이 있는 시계를 살 돈도 없고 알람 마법을 쓸 줄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기숙사의 서비스였다. 정작 나는 알람 없어도 잘 일어나지만,
남녀역전 세계니 만큼 남자가 깨울까 싶었지만,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남녀역전 세계의 메이드는 집사복을 입을 것인가 메이드복을 입을 것인가.
궁금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살덩어리가 보였다. 하얀 천에 가려져 있어도 그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모습에 살짝 물러섰다.
위치를 뒤로 옮겨 바라본 여성은 다행히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귀엽게 보이기보다는 멋져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감사합니다."
기품 넘치고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내가 이런 어투도 낼 수 있었나 싶었지만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종의 빙의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이런 자연스러운 어투가 습관처럼 나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헉!!"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ㅇ…. 아닙니다."
메이드는 새빨개진 얼굴로 뛰쳐나갔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지금까지 이런 전개는 한 번도 없었는데.
일단 짐들을 챙기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짐이라 해도 작은 수첩과 펜 정도가 끝이었지만 아카데미의 학생으로서 없어선 안 될 물건이지.
게임이었으면 이동하기 한 번이면 끝날 거리였지만 직접 걸어서 이동하려 하니 꽤 시간이 걸렸다.
등굣길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플레아 아이데스의 경우 일어나자마자 메이드의 알림을 받고 일어나서 바로 이동하면 입학식 바로 직전에 도착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시간에 시작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길에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여기가 강당인가?`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정말 미친 듯이 컸다. 전체적으로 백색의 톤으로 만들어진 건물에 군데군데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물들이 달려있으니 정말 아름다웠다.
내가 가까이 가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 두 명이 문을 열었다.
원래는 메이드 두 명이 열어주던 문이었는데 남녀역전이라고 집사가 열어주는 모양이다.
집사복도 `난세`와는 꽤 다른 모양이었는데 프릴도 달려있었고 딱딱한 느낌보다는 부드럽고 귀여운 느낌이 물씬 드는 옷차림이었다.
`이건 좀 역겨운데.`
차라리 멋들어진 집사복을 입고 있었다면 이런 마음은 안 들었을 텐데, 아무리 생긴 게 귀여운 편이어도 남자가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는 건 꽤 불편했다.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 강당으로 들어서니 집사들을 더 보기 싫은 마음에 발걸음을 옮겨 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도대체 어떻게 설치하고 치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대부분의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문이 열렸기 때문일까? 한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금방 다른 곳으로 향할 것 같던 시선은 계속 내게 머물렀다.
그렇게 하나 둘씩 시선이 추가되더니 강당에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본 채 굳어있었다.
파벌별로 나눠 앉아 시끌시끌해야 할 강당에 고요가 찾아왔다.
`뭐야, 이거 무서워.`
이게 매력 97의 힘인가?
무력이 97이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 바로 아랫줄이다. 매력도 '난세'에서 굉장히 중요한 능력치라는 걸 생각하면 97이라는 수치는 강당 하나를 침묵 시킬 정도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겠지.
`아니, 이거 개 불편한데.`
모두가 나를 응시하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슬슬 그만 볼 때쯤 되지 않았을까 친구들? 너희가 이렇게 잘생긴 애를 처음 봐서 신기한 건 이해하겠는데 이렇게 부담 주면 안 되지.
"다들, 뭐 하고 있는 건가. 신사 분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가."
강당의 앞 부분에서 나는 귀족이다. 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 덕분에 나에게로 몰렸던 시선이 잠시 분산 됐다.
자신의 파벌의 중심에 있던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청색이 살짝 섞인 은색의 머리카락, 시릴 듯이 차가운 벽안. 그리고 여자 치고는 엄청 큰 키, `난세`를 수십 번 이상 클리어한 나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사미아 공작영애.`
중앙파 귀족 중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사미아 공작가의 장녀님 되시겠다.
"신사분, 괜찮으시겠다면 제가 에스코트 해드려도 될까요?"
네가 제일 부담스러운데요.
목소리에 기름기가 잔뜩 낀 느낌이었다. 살이 쪘다는 의미는 아니고 느끼함이 가득한 목소리라고 할까?
원래 이렇게까지 느끼하진 않았는데 남녀역전이 일어나면서 아주 버터녀가 되셨다.
'근데 이게 16살이라고?'
아무리 남녀역전세상이라고 해도 그렇지 나보다 머리 하나 이상 더 큰 건 좀 아니지 않나?
게다가 흉부에서 자신의 기세를 펼치고 있는 거대한 가슴은 16살이 아니라 26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괜찮습니다. 공녀님, 남의 에스코트를 받을 만큼 어리지 않아서요."
완곡한 거절. 나름 잘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말이 끝나는 순간강당 전체가 싸늘한 분위기로 변했다.
다행이도 네가 뭔데 공녀님의 말씀을 거절해? 같은 분위기라기 보단, 공녀님 말씀을 거절했어... 큰일 날 거야. 에 가까운 분위기긴 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사모아 공녀가 보였다.
이거, 내가 잘 못 한 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