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잘 만든 작품 하나가 회사를 먹여 살린다.
* * *
조금씩 달라지는 출판계.
그 선두 주자는 당연히 우리 에르미스였다.
소설피아, 테일랜드 그리고 웹월드.
한때 웹소설 플랫폼 3대장이라 불리던 이들을 제치고 에르미스를 웹소설 출판계 선두로 견인하는 데엔 나 혼자만 상하차의 강추강 작가, 대감집 막내손자의 한태산 작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양파쿵 작가의 영향력이 크게 미쳤다.
로맨스 쪽을 살피자면 해외에선 한나 코왈스키 작가, 국내에서는 영묘한달빛 작가가 블랙홀처럼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 작가님! 이세계 기사식당 정말 대바그입니다! 시, 시청률 3.5%입므니다! 3.5! 다른 곳도 아니고! TV 도쿄! 그것도 심야 시간인 밤 11시에 시청률 3.5%! 정말 대단한 기록이무니다! 좋은 작품 계약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하므니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국제 전화로 통화 중인 아이리 스즈키의 입에선, 평소보다 일본어 억양이 더욱 심하게 뱉어졌다.
“별말씀을요 아이리 주임…… 아니, 죄송합니다. 과장님이 고생 많이 해주신 덕분이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실 필요 없스무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민나…모두가 이세계 기사식당이 완결될 때까지 최선을 다 할 거시믈 야쿠소쿠 드리무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솔직히 민망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작들이 나오고 있더라도 에르미스를 이전보다 더 위에 단계로 이끄는 선봉장의 역할을 하는 건 여전히 나다.
일본의 망가와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주로 제작하는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아이리 스즈키 과장과 전화를 끊은 뒤, 피식 미소가 나왔다.
노원지귀 필명으로 집필한 ‘이세계 기사식당’의 애니메이션화가 일본에서 가장 큰 방송 중 하나인 TV 도쿄에서 몇 주 전부터 방영을 시작했다.
편성 시간이 예상보다 늦은 심야인 것 때문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죄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면목이 없다며 사과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세계 기사식당 애니메이션의 첫 공중파 방영이 시작되고, 매 화마다 경이적인 시청률을 갱신하자, 대리로 진급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그녀가 과장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경이로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녀의 승진이 단지 이세계 기사식당의 실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영본부장인 단풍 삼촌을 시켜 에르미스와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MOU를 맺게 했고 양질의 에르미스 자체 아이피 콘텐츠를 통해 애니로 제작하고 유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입장에서도 에르미스를 전문적으로 케어하는 아이리 스즈키를 예외적으로 고속 승진을 시켜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디리릭— 디리리리릭—
아이리 스즈키 과장과 통화를 마치고 소회의실 밖으로 나오려는 그때.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진동했다. 아이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가 했는데, 이번에는 단풍 삼촌이었다.
나오던 발걸음을 뒤로 돌려 소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자, 단풍 삼촌의 걸걸한 웃음이 세어 나왔다.
—어디십니까, 대표님? 오늘 아이리 스즈키 과장하고 미팅한다고 하지 않았나?
“소회의실. 지금 막 끝났어.”
—그으흐흐. 잘 만든 작품 하나가 회사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맞구만.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봐? 목소리가 좋은 걸 보니?”
—일단 와서 이야기 하자. 엘가 회의실로 바로 올 수 있냐?
“지금?”
—그래. 네가 결정해야 하는 거여서. 지금 바로 왔으면 좋겠는데?
“바로 갈게.”
회사 경영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는 오진아와 권미현 그리고 단풍 삼촌과 지연이가 애써 줬지만, 여전히 내가 직접 나서야만 하는 중요한 결정들이 많았다.
팀원들에게 LGA컴퍼니에 미팅을 가야 하는 것을 전하고 LGA컴퍼니 3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LGA컴퍼니를 차렸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아직 사는 오피스텔의 옆방, 작은 원룸이었다.
그 작던 원룸에 옹기종기 앉아서 근무하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제는 계속해서 임대 중인 건물의 다른 층을 추가로 임대해 계속 규모를 확장한 상황이다.
임원진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파노라마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어느새 에르미스가 출판계의 탑 플랫폼이 된 이상 LGA컴퍼니와 BS북의 직원 모두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사옥을 따로 준비할 예정이니까.
에르미스와 LGA컴퍼니 그리고 BS북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3층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단풍 삼촌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우리 대표님도 궁금하셨나 보네? 냉큼 오는 걸 보니?”
“뭐길래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으흐흐흐. 일단 앉아 봐라.”
내가 의자에 앉는 걸 본 단풍 삼촌은 자리에서 일어서 회의실 불을 껐다. 회의실이 어두워지자 켜져 있던 빔프로젝터 화면이 밝게 빛났다.
“……어?!”
그리고 화면 안에 적힌 내용을 보면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단풍 삼촌은 그런 나를 보며 뿌듯하다는 듯이 걸걸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불 지르는 파이어맨 IP로 게임 개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정리한 자료 보다시피 두 곳에서 연락이 왔어. 둘 모두 장단점이 있으니 어디로 가든 네가 정하면 될 거야. 어때?”
“……어떻긴. 대박이지.”
“그으흐흐. 그렇지?”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게임화 제안을 준 회사들.
두 곳 모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곳들이었다.
게임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내가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회사들이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런 나를 보며 단풍 삼촌은 걸걸한 웃음을 뱉었다.
“보다시피 두 회사는 모두 장단점이 있어. 우선 첫 번째 회사는 국내 최고의 게임 회사인 넥씨마블게임즈지.”
“모바일 게임으로 진행하자고 하네?”
“그래. 아무래도 모바일 기기의 보급과 기술적 발전이 아무래도 한몫했겠지. 거기다 이제 스마트폰 없는 사람이 없잖아? 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쉽게 즐길 수 있으니 접근성도 상당하고.”
넥씨마블게임즈는 국내 최고의 게임 제작 및 배급사.
몇 해 전부터는 2, 3위 순위 게임사보다 배 이상 높은 영업이익을 보여주고 있는 괴물 같은 저력을 지닌 게임사다.
피식 웃은 단풍 삼촌이 레이저 포인트로 다음 화면을 가리켰다.
“두 번째 회사는 프로스트스톰이야. 여기는 뭐, 굳이 설명 안 해도 되지? 넥씨마블게임즈의 영업이익 5배. 넥씨마블게임즈가 국내 1위라면 프로스트스톰은 전 세계 1위지.”
게임을 전혀 안 하던 나도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 가끔 했던 PC게임들이 대부분 프로스트스톰 거였다.
어릴적부터 봐 왔던 프로스트스톰의 로고를 보니 절로 찌르르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잔뜩 상기된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단풍 삼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프로스트스톰에선 PC RPG게임으로 하자고 하더라. 불 지르는 파이어맨 스토리 자체가 방대하니까 PC로 제작하는 게 좋긴 하겠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프로스트스톰에서 PC 게임 명가니까. 믿고 맡겨도 되겠지.”
“나는 두 곳 다 좋은데? 근데 이걸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하나보네?”
단풍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둘 다 출시일 기준 1년간은 불 지르는 파이어맨 IP 독점으로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독점 요청 기간도 동일하고 판권료도 비슷하다.”
“음, 조건은 비슷하다라……. 삼촌 생각은 어때?”
사실 두 게임사를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단지 경영 본부장이자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단풍 삼촌의 의견이 궁금했다.
단풍 삼촌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답했다.
“정우 너도 알다시피 넥씨마블게임즈의 이름값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프로스트스톰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로스트스톰과의 계약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야.”
“삼촌은 넥씨마블게임즈가 낫겠다는 거지?”
단풍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넥씨마블게임즈가 우리나라 기업이어서 더 좋다, 이런 국뽕적 마인드로 말하는 게 아니야. 프로스트스톰의 이름값이 엄청나긴 하지만 PC게임 매출은 모바일 게임 매출하고는 비교가 안 되거든.”
“그렇겠지, 아무래도 모바일 게임의 BM은 자연스럽게 과금을 유도하는 구조니까.”
“그렇지. 그리고 과금 유도하는 건 넥씨마블게임즈를 따라올 곳이 없다고 봐야하지.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하지만…… 새끼. 굳이 물을 필요도 없겠네. 프로스트스톰에 계약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내게 묻는 단풍 삼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우리나라 기업이랑 하면 좋긴 하겠지만 과금 문제 없이 온전히 게임을 즐겼으면 해서.”
모바일 게임의 과금은 보통 게임 내의 아이템, 아바타, 옷 등을 구매하는 현질 타이밍에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플레이 자체는 무료이기에 현질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판권을 파는 순간, 게임이라는 새로운 콘텐츠로 제작되는 불 지르는 파이어맨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지게 된다.
모바일 게임의 특성상 현질 유도가 없을 리가 만무하다. 만에 하나 게임 내에서 유료 아이템을 구매하지 않으면 게임을 즐기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게 되거나,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부모님의 동의 없이 너무 많은 돈을 사용하게 되는 상황이 나는 달갑지 않다.
“판교의 아들이라 불리는 넥씨마블게임즈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두고두고 아쉬울 수 있긴 하겠지만……. 지금 선택은 무조건 프로스트스톰이야.”
“그으흐흐. 그럴 줄 알았다. 바로 연락하마.”
게임으로 불 지르는 파이어맨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세계관을 온전히 즐길 수 있기를.
원작을 기억하는 팬들은 원작에 담겼던 세계관, 인물, 이야기, 분위기 등을 게임과 비교해보면서 물고, 뜯고, 씹고, 맛보며 즐길 수 있기를.
힘든 일상 속에서도 열정으로 만든 세계.
내 꿈이 녹아든 세계를 팬들이 즐겁게 모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글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