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94화 (194/201)

194화 — 브랜드전.

* * *

매일 5,000자와의 싸움을 하는 사람.

웹소설 작가는 한 편의 글에 온종일 정신을 쏟아 넣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심력을 쓰게 된다.

어떤 전개로 진행을 해야 하는지.

등장인물들의 톤은 의도한 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등.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작은 세계에만 신경을 쓰더라도 집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개 작가들은 그 외의 것들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댓글, 별점, 연독률, 매출 등 독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 된 반응부터 프로모션에 관련해서까지.

비록 하루의 반 이상을 편집자로서 보내지만, 정우의 본업은 웹소설 작가다. 그렇기에 정우는 BS북 그리고 LGA컴퍼니과 계약을 한 작가들이 최대한 작가 본연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물론 박정우가 웹소설 작가와 편집자의 업무를 겸하는 이중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또한 BS북, LGA컴퍼니 그리고 에르미스의 실질적인 대표 또한 박정우라는 것을 아는 이도 몇 없었다.

‘고상하시네. 아니면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소설피아 마케팅본부 부장 강경진.

그는 소설피아와의 CP 계약이 종료 되었음에도 생각보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BS북과 LGA컴퍼니 그리고 에르미스의 반응을 살펴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정도 두드려 맞았으면 비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텐데, 알량한 자존심 탓인지 아니면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지 CP 계약 종료 통보에도 불구하고, 에르미스와 그 생각 이상으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CP 계약 종료 통보 후 한 주가 흘렀고, CP 계약이 종료되는 오늘까지도 에르미스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 모든 일을 암암리에 진행했던 강경진이 의아하기보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사색에 잠긴 그때였다.

벌컥!

“부장님! 보셨습니까? 웹월드에서—”

노크도 없이 자신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판무 1팀 팀장의 말에 눈살이 가득 찌푸려졌다.

하지만 강경진은 최대한 내색 않고 판무 1팀 팀장을 향해 고개를 슬쩍 들려 바라볼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감정 변화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강경진의 기분이 읽혔는지, 1팀 팀장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죄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BS북이나 엘가, 에르미스 측에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보고해달라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

팀장의 죄송스러운 태도에 강경진은 그제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며 대답했다.

“죄송하긴요. 제가 부탁한 건데요. 앉아서 말해보시죠. 조금 전에는 웹월드라고 이야기한 것 같았는데요. 웹월드에서 에르미스가 프로모션이라도 받았나 보죠?”

선한 목자 같은 표정으로 건넨 손짓에 1팀 팀장이 다급히 자리에 앉았다. 지금 상황을 급히 전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그런 표정이었다.

판무 1팀 팀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곧장 강경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브랜드전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브랜드전? 엘가랑 BS북 작품들인가 보죠?”

브랜드전이란 흔히 한 출판사의 작품을 모아서 배너 등의 홍보를 걸어주는 프로모션을 뜻한다.

판무팀 팀장의 설명이 없더라도 웹월드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엘가랑 BS북 레이블 작품들이 브랜드전으로 들어갔을 게 뻔한 일이었다.

LGA컴퍼니나 BS북의 작품들 또한 테일랜드에 2차 독점으로 작품을 넣어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테일랜드의 자회사가 된 소설피아처럼 특별히 우대를 받는 일은 없을 테였다.

그렇다면 에르미스 계열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웹월드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흙탕 속에서 살아남으려 버둥거리는 에르미스 계열사들의 허우적거림이 떠오르자 강경진은 입가에 차오르는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경진과 달리 판무 1팀 팀장은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 에르미스 계열사들의 브랜드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부장님께서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팀장이 조심스럽게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폰을 건넸다.

강경진이 받아 든 폰 화면에는 웹월드 어플리케이션 메인 화면에 들어가면 나오는 팝업 배너가 뜨여 있었다.

LGA컴퍼니의 레이블 ‘드래곤’ 그리고 BS북의 레이블 ‘파이톤’의 작품들이 브랜드전 형식의 기획전으로 나열된 것을 보면서도 강경진은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1팀 팀장이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브랜드전 같은 형식의 기획전은 어느 정도 예상한 범주 안이었으니까.

“……음?”

하지만 에르미스 계열사들의 브랜드전 홍보 배너를 살피던 강경진의 눈빛이 점점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강경진의 입이 슬쩍 벌어지자, 팀장은 강경진의 말이 나오기 전에 냉큼 선수를 쳤다.

“엘가와 BS북 모두 소설피아와 척을 지기로 한 모양입니다. 소설피아 독점 작품을 브랜드전을 빌미로 웹월드에서 플모를 넣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강경진은 소설피아 1차 독점으로 진행된 작품에 한해서는 웹월드의 ‘기다렸다 무료’같은 기간 한정 이벤트를 적용하지 않아야 하고, 완결 후 3개월 이상이 경과한 시점부터 타 플랫폼의 프로모션을 적용할 수 있다고 타 CP사에 공문을 보낸 상황이었다.

비록 에르미스의 계열사들이 소설피아와 CP계약을 끝내기로 했지만 독점이 끝난 작품도 아니고 아직도 소설피아에서 독점으로 연재 되고 있는 작품에 함부로 가격 차이를 발생하는 프로모션을 넣는다니?

당돌함을 넘어서 어이가 없는 행동에 강경진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생각에 잠긴 강경진을 보며 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부장님께 보고 드리고 엘가와 BS북 측에 항의 내용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규정 위반에 관한 내용을 메일로―”

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경진이 슬쩍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말을 끊었다.

“됐습니다. 일단 제가 전화해보도록 하죠. 쓴소리 하려는데 이왕이면 안면 있는 제가 하는 게 낫겠죠. 에르미스 계열사들이 다른 플랫폼에서 이상한 짓 하지 않는지 확인해서 알려주시고, 일단 나가 보세요.”

“예, 부장님. 그럼.”

고개를 꾸벅 숙인 팀장이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경진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대화는 너랑 하는 게 가장 낫겠지.”

혼자 읊조리듯 비릿한 미소를 지은 강경진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그리 길지 않게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고, 차갑고 건조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폰 너머로 들려왔다.

—번호를 잘못 누른 거 치곤 신호음이 오래 울리네.

“오랜만이다, 진아야.”

자상한 오빠처럼 건네는 인삿말에도 오진아는 한결 같은 차가운 톤을 유지하며 말했다.

—안부 인사나 하자고 전화 한 건 아닐 테고. 용건이나 말했으면 좋겠는데요, 강경진 부장님?

직책으로 자신을 언급하는 오진아의 말에 강경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러죠, 오진아 대표님. 이미 아시는 것처럼 웹월드와 브랜드전 관련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공사다망하신 대표님께서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저의 소설피아에서 타 플랫폼의 기간 한정 프로모션에 관해서 공문을 보낸 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요.”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기억력 좋기로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손에 꼽는 사람인데 어떻게 된 게 대표로 계신 BS북 직원들은 일처리를 제대로 안 하나 봅니다? 적당히 넘어가 주기엔 너무 지나친 실수 아닙니까?”

강경진의 말에 오진아는 정말 놀랐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어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강경진은 예상과 달리 오진아가 대뜸 사과를 건네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좋게좋게…….”

—오해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단 뜻이었어요. 직원들의 실수도, 오해도 아니고 BS북에 대표인 제가 직접 지시한 건데요. 문제라도 있을까요?

다소 뻔뻔하게 들릴 수 있는 오진아의 말에 강경진은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자신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와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어버린 사촌 동생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그래, 그래야 오진아 답지. 우리끼리 대화인데 서로 존대하면서 말장난할 것 없이 말해보자. 대체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벌린 거야? 완결 임박 작품 정도면 어떻게 눈감아 줄 수 있어도 아직 1차 독점 시작하고 100화도 안 풀린 작품들까지 브랜드전에 넣어버리면 개싸움 하자는 거밖에 안 되지 않나?”

—오빠, 그동안 재미있어졌네. BS북도 LGA컴퍼니도 소설피아에서 없는 규정을 들먹이면서 멋대로 CP 계약 해지해서 소속 작가님들한테 애먹게 하곤, 이제와서 우리 책임으로 돌린다?

날카롭게 건넨 강경진의 말에 가장 먼저 들려오는 건 조소 짙은 웃음이었다.

—경진 오빠. 똑똑히 잘 들어. 지금까지 비위 맞춰가면서 소설피아 깡패짓 눈 가리고 아웅했던 건 소설피아가 무서워서도, 테일랜드에게 인수되어서도 아니야. 단지 소설피아에서 계속 연재해오셨던 작가님들이 익숙한 플랫폼에서 집필하시는 글 외엔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말이 이어지면서 오진아의 말에선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동안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했다는 거야. 그런데 이번처럼 더는 피할 수 없도록 아예 똥을 묻혀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경진 오빠. 잘 들어. 법적으로 갈 거면 법적으로 가든지. 에르미스 독점 작품 소재 표절 시비 있는 작품이라든지 소설피아에 문제 걸만한 작품 걸려면 끝도 없이 많으니까.”

“오진아…….”

마치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강경진의 말에 오진아는 통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발랄하게 웃었다.

—더러운 싸움이든, 개싸움이든, 이젠 피할 생각 없어. 다만 그렇게 되면 소설피아도 진짜 각오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오빠도 소설피아 윗분들한테 말이나 똑바로 전달해. 괜한 짓 하다가 서로 피 보지 말자고.

자신을 쫓아낼 때만 해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회사라는 정글 속에서 동물적인 육감을 키워온 강경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진아, BS북뿐만이 아니라 엘가 쪽도 이렇게 진행을 한 거라면 이게 전부 네 머리에서 나왔을 리가 없어. 아니, 네가 이런 식으로 수를 쓴다고 해도 너한테는 결정권이 없을 텐데. 대체 누구야? 뒤에서 이런 짓을 모두 꾸민 사람이?”

처음에는 배후에 있는 게 오진아나 전 대표였던 오성민이 아닌가 했지만, BS북뿐만이 아니라 LGA컴퍼니에도 손을 썼다면 이건 최소 이무진 정도는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대체 왜?

강경진도 나름 알아봤지만, 이무진은 탈북자 출신에 LGA컴퍼니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자신이 자라온 보육원에서 관리직 일이나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뜬금없이 출판계에 뛰어든 것뿐만이 아니라 마치 자기 일처럼 발 벗고 작가들의 대우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전화 너머로 오진아의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어차피 믿지도 못할 거고.

“뭐?”

—할 말은 여기서 끝냈으면 하는데.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BS북, LGA컴퍼니, 에르미스 관련 작품들 상대로 더는 장난질 하지 마. 다음부터는 단순히 작품 빼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전면전으로 갈지도 모르니까.

오진아와의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강경진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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