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93화 (193/201)

193화 ― 에르미스와 웹월드.

* * *

소설피아로부터 CP계약 종료를 통보 받은 그날 저녁.

LGA컴퍼니의 이무진과 이지연, 권미현 그리고 BS북의 오진아까지. 그들 모두는 비장한 표정을 걸친 채 판교로 이동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긴 장소는 웹월드 본사…… 아니, 본사 옆의 한 카페였다.

약속된 장소로 들어가자 그들을 알아본 웹월드 박태호 부장과 최경일 대리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반겼다.

“직접 뵙는 건 오랜만입니다.”

박태호의 인사에 이번 미팅에 이무진이 답했다.

“바쁜 일정이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웹월드가 아직 별도 회의실이 없어서 카페에서 미팅을 진행하게 되어 송구하군요.”

웹월드는 굴지의 IT 대기업의 자회사.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한 회사답게, 미팅을 진행할 회의실 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도 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선 그런 걸 신경 쓰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진행되는 미팅이었지만, 이들 사이에서 오갈 이야기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중요한 이야기었으니까.

“아닙니다. 어떤 내용이 오가느냐가 중요한 거지 장소가 중요하겠습니까?”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태호 부장이 안경을 슬쩍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기에 본부장님들과 대표님들이 모두 와주신 겁니까?”

이무진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자리를 마련하게 된 박태호 부장과 최경일 대리는 으레 다른 출판사들이 그러하듯 웹월드에서 새로 런칭할 작품의 심사를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궁금하긴 하던 참이었다.

비록 웹월드 정도는 아니었지만 킵비트라는 탄탄한 자금력의 뒷배를 지닌 자체 플랫폼, 에르미스가 있는데 굳이 웹월드를 찾아왔다는 것이.

그것도 에르미스를 총괄하는 이무진뿐만이 아니라 LGA컴퍼니의 본부장들과 BS북의 대표까지 모두 한 자리에 대동하고 왔으니 단순히 신작을 제안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만 상하차처럼 좋은 작품이라도 생겨서 오신 것 같지는 않고…… 따로 제안하고 싶으신 거라도?”

이무진이 자상으로 가득한 살벌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지난 소설피아 인수 건 때문에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박태호 부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려고 판교까지 찾아와 주신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본론을 말씀해 주시죠. 갑자기 잡힌 미팅이라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어서 말입니다.”

“언짢게 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굳이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소설피아가 테일랜드와 손을 잡았듯 에르미스는 웹월드와의 관계를 공고히 맺었으면 합니다.”

박태호 부장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최경일 대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소설피아의 인수가 무산된 후, 상부에서도 몇 번 나왔던 말이기는 했다. 에르미스의 인수 관련 말이.

하지만 에르미스는 킵비트 라는 탄탄한 자금력이 뒷받침 되어있고 무엇보다 브루나이 정부 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였기에 인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빠르게 생각을 굴리던 박태호 부장의 시선이 다시 이무진을 향했다.

“테일랜드가 소설피아와 손을 잡은 방식은 지분 인수였죠. 에르미스도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저희 웹월드도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군요.”

“굳이 돈이 오고 가야 한 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다른 방식도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요?”

이무진은 살벌한 미소를 히죽거렸다.

제 딴엔 부드럽게 짓는 미소였다.

“소설피아에서 1차 독점으로 연재되고 있는 저희 쪽 작품들을 모두 빼올 생각입니다.”

“예? 모두요?”

놀라 되묻는 말에 이무진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피아에서 연재 중인 LGA컴퍼니 그리고 BS북의 모든 작품을 내릴 계획이란 말이죠.”

박태호는 이무진의 말이 놀랍다는 듯이 슬쩍 주위를 살폈다. LGA컴퍼니의 임원진들뿐만이 아니라 BS북의 대표 오진아도 함께 와서 눈 하나 깜박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이들을 대표해 말을 건네는 이무진의 말이 모두 사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박태호는 놀란 마음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상대의 움직임이 읽힌 이상 속내는 더 깊이 감춰야 했으니까.

“설마 소설피아에서 내린 작품을 저희 측에 넣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무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되면 웹월드가 소설피아의 눈총을 모두 다 받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원하는 건 에르미스와 웹월드가 협력을 하는 거지 누구를 총알받이로 세우려는 건 아닙니다.”

박태호 부장의 표정만 보더라도 이무진은 그가 LGA컴퍼니 그리고 BS북에 생긴 일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행이구만 기래. 생각보다 정보가 느려서.’

사건이 터진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인지 웹월드 측은 에르미스의 CP 계약 해지 건에 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테일랜드라면 CP 계약 해지에 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소설피아의 인수를 실패로 끝낸 웹월드는 소설피아와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을 테니 CP 계약 해지에 관해 모르리란 게 박정우의 판단이었다.

웹월드와 미팅 약속을 잡기 전.

마치 작두 타는 사람처럼 웹월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리라고 한 박정우의 말이 조금은 의심스럽긴 했는데, 막상 웹월드를 총괄하는 박태호 부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이자 이무진은 내심 놀라웠다.

“총알받이가 아닌 협력이라…….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군요.”

이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이었다.

“우선 소설피아에서 독점으로 연재 중인 작품은 에르미스에서 연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다만 이에 관한 보상안으로 2차 독점을 진행했으면 하는데.”

“그걸 웹월드에서 진행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소설피아는 테일랜드와의 2차 독점 연계를 점점 강화하고 있죠. 하지만 유독 웹월드에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요. 테일랜드와의 지분 인수가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CP사에 돌렸던 공문 혹시 기억하십니까?”

“흠…….”

박태호의 입이 굳게 닫히고 옆에 앉은 최경일 대리의 표정도 잔뜩 찌푸려지는 모습. 그들 또한 그때 당시를 똑똑히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CP사 여러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그동안 안내해드린 바와 같이, 소설피아에서 연재 중인 작품들은 연재 방식과 과금 방식이 타 플랫폼과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소설피아 1차 독점으로 진행된 작품에 한해서는 100화 이후 타 플랫폼에서 동시 연재 되는 기간 중 ‘기다렸다 무료’같은 기간 한정 이벤트가 적용되지 않아야 하며, 완결 후 3개월 이상 경과한 시점부터 진행될 수 있습니다.

“사실 다들 말만 안 했을 뿐이지 그건 누가 보더라도 웹월드를 저격하는 공문이라는 걸 모르는 CP사는 없었을 겁니다.”

박태호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저희는 테일랜드나 소설피아 같은 양아치 짓은 안 합니다. 우리 웹월드의 ‘기다렸다 무료’나 테일랜드의 ‘매일 또 무료’나 다 같은 거 아닙니까? 에르미스에서 진행하는 ‘눈만 뜨면 무료’도 동일한 기간 한정 프로모션이고요. 그런데 소설피아에서는 우리 웹월드만 대놓고 저격하고 있죠. 노선을 달리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명확한 저격입니다.”

박태호는 몇 달 전에 받았던 그 공문이 여전히 분한지 입술을 슬쩍 떨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긴 합니다. 웹월드와 소설피아는 그간 감정의 골이 깊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에르미스가 굳이 소설피아와 척을 지어가면서까지 웹월드의 손을 잡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요?”

파랗게 빛나는 박태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이무진이 답했다. 에르미스의 CP 계약이 이제 한 주 뒤면 해지된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은 채.

“부장님이 알고 계신 것처럼 소설피아와 에르미스의 관계는 딱히 나쁠 것은 없죠. 오히려 상생에 가까운 관계이니까요. 하지만 테일랜드가 소설피아를 인수하고 지난 소설피아의 검열 사건을 보면서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업계를 불문하고 독과점이란 여러 폐해를 야기하죠.”

박태호는 손에 깍지를 낀 채 이무진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서비스 개선의 동기 부족부터 가격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 하지만 출판계에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지난번의 논란처럼 창작자의 자유를 위협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걸 막기 위해 웹월드와 함께 손을 잡는 게 좋겠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야겠군요?”

이무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태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만, 그렇다고 저희가 굳이 에르미스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아, 그런 표정 지으실 건 없습니다. 싫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손사래를 치던 박태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저희는 단지 선택지가 남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소설피아를 인수하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소설피아와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더노벨이 있지 않습니까? 에르미스와의 협력? 상생? 다 아름다운 말이죠.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군요.”

잠자코 있던 오진아가 대화에 끼어 들었다.

“웹월드 측에서 더노벨을 인수할 계획이 있다는 뜻입니까?”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손아귀에 거의 다 들어온 줄 알았는 소설피아는 테일랜드에서 채갔고, 에르미스는 애초부터 판매용이 아닌 상황.

웹월드가 더노벨로 눈길을 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거……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요?”

웹월드 측의 동상이몽이 시작되려는 찰나.

오진아가 팔짱을 껸 채로 이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더노벨을 인수하겠다는 걸 보면, 굳이 에르미스가 웹월드와 협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더노벨이 최근 들어 점점 하락세에 접어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오진아도 더노벨이 완전히 망하리란 것은 확신하지 못했다. 단지 박정우가 했던 말을 상기하며 오진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입을 맞춘 연기를 하듯.

이무진은 오진아를 말리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오 대표님, 일단 웹월드 측의 이야기도 들어 보시죠. 아직 확정된 사실은 아닐 게 아닙니까?”

“흐음…….”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오진아를 보며 박태호 부장은 속으로 흠칫했다.

사실 더노벨을 인수하겠다는 박태호의 말은 블러핑이었다. 인수를 위해 검토를 진행한 것은 사실이나 확인하면 할수록 더노벨의 회사 운영이 얼마나 개판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써 자신의 놀란 마음을 갈무리하는 박태호를 보며 이무진은 속으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단지 에르미스 뿐만이 아닙니다. 저희가 모두 이번 미팅에 함께 참석한 건 LGA컴퍼니 그리고 BS북도 파트너십에 함께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블러핑이 먹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박태호는 경청의 자세로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우선 들어보도록 하죠.”

“에르미스는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인 연계를 원하는 겁니다. 이를 설명드리자면…….”

고개를 짧게 끄덕인 이무진은 인제야 준비된 말을 차례차례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무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박태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