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 뼈가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 *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하진성 감독이었다.
윤선미의 루프탑 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의기소침한 모습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당당한 목소리를 건네는 하진성에게 나는 밝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아! 얼마 전에 사냥도시 촬영 시작했다고 기사로 봤습니다. 진작 인사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편집까지 마무리한 하진성 감독은 지난 2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영화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기간에 소설피아의 표지 검열 이슈가 제대로 불타오르면서 에르미스 경영 방안에 집중하느라 하진성 감독이 사냥도시의 촬영을 시작했다는 것을 기사로 봤음에도 따로 연락할 짬을 내지 못했다.
급한 일처리를 마무리하고 나면 어느새 연락을 하기에는 애매한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이 되기 일쑤였으니까.
—하하, 아닙니다. 제가 사냥도시 메가폰을 잡게 된 것도 모두 다 작가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불 지르는 파이어맨으로 입봉을 하지 못했다면 사냥도시 같은 작품은 찍을 기회는 결코 제게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진성 감독님께서 쾌활해지신 것은 좋은데, 내 양심 냉장고를 박살 내려 하신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하진성 감독은 원래 사냥도시의 메가폰을 잡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오직 회귀자인 나만 아는 사실.
이걸 딱히 설명할 방법도 없었기에 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으레 하는 말로 답했다.
“별말씀을요. 감독님께서는 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작품을 계속 내셨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사냥도시를 시리즈로 연달아 만들고 2편도 다른 사람이 아닌 하진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그런 욕구를 억눌렀다.
하진성 감독은 호탕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오늘 작가님께 연락드린 건 안부 차원에서 연락을 드린 게 아니라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업무 전화라면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
나는 조팟과 황건일 매니저에게 통화 때문에 회의실에 간다며 입을 뻥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이죠, 작가님. 무슨 일이실까요?”
내가 소회의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성 감독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불 지르는 파이어맨 공식 개봉일이 정해져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와, 드디어 정해졌군요? 언제로 정해졌다고 합니까?”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진성 감독은 마치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핸드폰 너머로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달 초인 5월 1일 월요일입니다.
소회의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하진성 감동의 말에 불끈 쥔 주먹을 소리 없이 허공을 향해 연달아 날렸다.
내가 이리도 기뻐하는 이유.
그건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개봉일이 다음 달 초인 5월 1일로 확정되면서 한국 영화 ‘최초’ 넷플렉스 오리지널 작품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달만 늦었더라도 공 감독의 순자가 넷플렉스 최초 타이틀을 받았을 텐데, 생각보다 빠른 개봉일에 꾹 닫았던 내 입에서도 저절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하진성 감독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다음 달 1월이면 한국 영화 최초 넷플렉스 오리지널 타이틀을 얻는 건 확정 된 거겠네요.”
잔뜩 들뜬 내 반응에 하진성 감독도 기뻤는지 전보다 더 큰 웃음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맞습니다. 단순히 한국 넷플렉스 영화 최초 오리지널 컨텐츠가 아닙니다. 5월 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5월 1일이라면…… 아? 근로자의 날이네요?”
잠시 머리를 굴리다 뱉은 말에 하진성 감독이 다시 호탕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렇죠. 개봉일부터 휴일이니 아주 좋죠. 거기다 하루 건너선 석가 탄실일 또 하루 건너선 어린이날 그리고 바로 주말이 이어지죠.
하진성 감독의 말에 소회의실 한쪽 벽면에 걸린 달력을 훑어보며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거기다 그 다음 주 화요일은 대통령 선거일이네요.”
하진성 감독은 여전히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대통령 선거일까지 정말 기가 막힌 황금 연휴 아닙니까? 전세계 동시 개봉이긴 하지만 특히 한국 넷플렉스 사용자들이 특히 좋아할만한 타이밍입니다.
하진성 감독의 말처럼 기가 막힌 황금 연휴다.
사실 이틀만 더 빨리 개봉했다면 토, 일, 월 3일 연짝을 더 높은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네.’
5월의 시작인 1일에 임팩트 있게 오픈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소소한 위안으로 마음을 달랬다.
“정말 잘됐네요. 그동안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하하, 별말씀을요.
껄껄 웃던 하진성 감독은 깜빡 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참! 작가님. 이메일 주소 하나만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이메일 주소는 왜 물으십니까?”
하진성 감독은 불지파의 런칭 그리고 사냥도시의 메가폰을 잡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좋은지 평소보다도 훨씬 높은 텐션으로 말했다.
—하하, 보이스 피싱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작가님. 다름이 아니라 넷플렉스에서 감독인 저와 주연 배우들에게 개봉 전에 미리 모니터링 할 수 있도록 링크를 보내준다고 합니다. 작가님이 메일 주소 보내주시면 제가 넷플렉스 측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전 세계의 누구보다 빠르게 불 지르는 파이어맨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한 고양감을 안겨 줬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런데 제작진들과 배우님들만 볼 수 있는 걸 제가 먼저 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진성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사실 우리 배우들도 주연 배우들만 볼 수 있는 거긴 하지만, 제 입봉작이 된 불지르는 파이어맨의 감독으로서 가장 처음으로 보시는 분 중 한 분이 작가님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하진성 감독의 말에 다시 한번 가슴 속 양심 냉장고가 아파온다. 하지만 남들 보다 먼저 내 영화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메일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불 지르는 파이어맨도 사냥도시도 모두 함께 대박 났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대박나시죠.
전화를 끊고 나는 허공에 다시 몇차례 쉐도우 복싱을 하며 기쁨을 표출했고 로맨스팀 매니저 몇이 나를 미친놈 보듯 하며 아쪽으로 사라졌다.
BS북이 지금 누구 껀데 저런 불경한 눈빛을?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참았다. 솔직히 그 누가 보더라도 회의실 안에서 월드컵 세레모니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타다다닥— 타닥— 타다다다닥—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LGA컴퍼니 임원진들 그리고 오진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조금 전에 보던 수의사물 작품 피드백과 교정을 진행하기 위해 마우스를 딸칵거리는 그때.
“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하진성 감독에게 내 메일 주소를 건네줬지만, 그렇다고 10분도 안 지나서 넷플렉스에서 불 지르는 파이어맨을 미리 볼 수 있는 링크를 줬을 리는 없었다.
또한 새로운 메일 수신을 알리는 계정은 내가 하진성 감독에게 알려줬던 개인 메일 계정이 아닌 LGA컴퍼니 아카데미 관련 메일 계정으로 온 메일.
딸칵딸칵— 드륵— 드르르륵—
메일을 살피니 수의사물을 보냈던 작가님이 새로운 원고를 보내줬다.
‘이건 뭐야? 새로운 버전?’
메일의 내용인 즉슨, 기존에 보냈던 수의사물 주인공을 워낙 수전노에 망나니처럼 묘사해서인지, 주인공 캐릭터성과 주변 등장인물들을 조금 바꾼 버전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편집자는 여러 가지 버전을 보내면 귀찮다며 싫어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계속 고민하면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고 돕고 싶은 작가들의 자세다.
드르륵— 드륵— 드르르륵—
기쁜 마음으로 그가 새로 보낸 버전의 작가물을 주르륵 읽어 내려갔다.
가볍게 던진 말에 케리어 안에서 녹색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내 말 알아 듣는 거야?”
“그래. 나는 동물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거든.”
내가 말을 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슬쩍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투명 플라스틱 안에서 녹색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껄룩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간식으로 먹을만한 거 없어? 츄르 먹고 싶은데.”
“일단 검사부터 하자.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일단 케리어에서 꺼낼게.”
“알겠어.”
수의사로 일하면서 동물들에게 가장 많이 다치는 경우가 바로 고양이들 때문이다. 대화가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환자의 경계심을 낮출 수 있다는 게 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숙련된 의사라도 낯선 고양이를 다루는 건 매 순간이 쉽지 않으니까.
케리어에서 껄룩이를 꺼내 HCM(비대성 심근증) 검사부터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HCM 증상으로는 기침이나 식욕부진, 활동성 감소 등을 보인다.
껄룩이의 경우 병원에 오자마자 꾸준히 간식을 찾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듯 싶었지만, 방사선과 초음파, NT―proBNP(심장효소) 검사를 비롯해 개구호흡의 원인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검사들을 연달아 진행했다.
모든 검사의 결과가 나온 후.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민지아에게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낀 민지아가 나를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저희 껄룩이는… 괜찮은 걸까요? 기다리면서 비대성 심근증을 찾아봤는데 껄룩이처럼 아메리칸 숏헤어 종에 유전병으로 많이 생긴다고 들었어요. 저희 껄룩이….”
“다행이 비대성 심근증은 아닙니다.”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민지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여전히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손짓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병일 지도 모릅니다.”
내 말에 민지아의 동공이 세차게 요동쳤고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껄룩이는 비만입니다. 당장 다이어트 시키셔야 하세요.”
‘음 이전 버전보다 확실히 더 좋은데?’
추가로 입고된 원고를 훑어보니 교정과 윤문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확실히 이전 버전의 원고에서 보았던 과한 캐릭터성이 사라졌다.
이전 버전이 망나니 수의사였다면 이번엔 조금 더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감성의 수의사랄까?
‘열심히 하시면 그만큼 보답을 해드려야지.’
타다닥— 타닥— 타다다다닥—
편집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
그건 노력하는 작가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촌철살인의 피드백을 건네는 것이다.
그가 성장해 언젠가는 내가 도달한 것처럼 드라마 그리고 영화, 혹은 그 이상까지 진출할 수 있도록.
한 자 또 한 자.
내 담당 작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나는 정성을 담은 피드백을 작성해 메일로 보냈다.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