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76화 (176/201)

176화 ―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 * *

에르미스의 제1회 공모전 결과 발표가 나온 그 주 토요일. 강남역 인근의 콘서트홀에선 에르미스 공모전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 에르미스의 제1회 공모전 대상 수여식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탄탄한 서사와 고증을 바탕으로 숨 막히는 전개를 진행해주고 계신 대감집 막내손자의 한태산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나와주시죠. 대상 수여는 LGA컴퍼니의 출판본부장이신 권미현 이사님께서 진행해주시겠습니다.”

미리 섭외된 MC의 말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콘서트홀 안에서 터져 나왔고, 기자들은 한태산으로부터 꽃다발과 상패를 수여 받는 한태산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공모전 당선자가 발표되고 난 후 상금 지급은 이미 끝났지만,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한태산 작가의 손에는 ‘대상 200,000,000원.’이라는 굵은 글씨가 전국노래자랑에나 등장할 법한 거대한 하드보드지에 적혀 있었다.

모두 연출 된 상황이었지만, 골방에서 글만 쓰던 작가들은 기자들과 LGA컴퍼니의 관계자들 그리고 팬들 앞에서 보이는 시상식 행사가 쑥스러우면서도 기쁜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본 수상식은 여기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엔 상을 수상하신 작가님들의 팬분들이 함께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이 아마 팬 여러분들이 가장 기다려왔던 순서일 겁니다. 작가님들과의 북토크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기다렸다고!”

에르미스의 시상식이 소설피아와의 시상식과 차별된 점은 단순히 기자들만 대동했을 뿐이 아니라 가벼운 팬들과의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이었다.

집필로 인해 눈코 뜰 새 없는 작가들이었지만, 시상식 참여를 위한 숙박과 교통수단 제공 그리고 팬들과의 적극적인 토론을 위해 별도 경비를 두둑이 챙겨드렸기 때문인지 질문을 하는 독자들도 이에 대답하는 작가들도 모두 적극적으로 행사에 임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태산 작가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제 소개부터 먼저 하자면 사실 저는 웹소설 작가를 목표로 하는 지망생입니다. 한태산 작가님처럼 현대판타지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작가님께서 고증을 위한 자료 조사를 어떤 식으로 진행하시는지에 관해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질문은 판무와 로맨스 장르의 대상 작가들을 향해 쏟아졌고,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이는 당연하게도 한태산이었다.

“하하, 답변드리겠습니다. 이거 답변을 드리다보니 오늘 이 자리에 단순히 독자님들이 오시기보단 지망생분들이 더 많이 오신 것 같기도 합니다. 자료 조사를 하는 방법은 작가마다 다양할 텐데요, 저는 제 경험에 따라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우선…….”

이무진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소통하는 모습을 스테이지 뒤에서 지켜보던 이무진은 옆에 서 있던 이지연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본부장님, 저…… 죄송한 말이지만 말입니다.”

“예? 무슨 일이세요?”

평소의 호탕한 모습과 달리 쭈뼛거리는 이무진의 모습에 이지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사 끝나고 먼저 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뒷정리는 제가 미현 본부장님이랑 따로 하려고 해서요.”

권미현은 작가와 진행자 옆에 앉아 있었기에 스테이지 뒤에 있는 이무진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들릴까 작게 소곤거렸다.

“에이, 같이 해야죠. 기자님들한테 따로 인사도 드리고 행사 진행해주신 분들 뒤처리도 같이해야…….”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뒷정리 끝내고 미현 본부장님께 따로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아… 아?!”

지난달 권미현의 고백 이후 이무진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지연은 권미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별말이 없었기에 대답 없는 거절처럼 흐지부지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떤 결정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무진이 그 결심을 내린 거라고 이지연은 생각했다.

“네에. 알겠어요.”

“크흠, 감사합니다.”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이무진을 보며 이지연은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행사가 마무리되면 얼른 남자친구인 박정우에게 이 사실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울림을 주는 좋은 작품으로 에르미스의 제1회 웹소설 공모전을 빛내주신 작가님들께 마지막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럼 금일 행사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 길 찾아와주신 독자님들과 기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행사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에 콘서트홀 안엔 박수 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고 팬들과 기자들 그리고 작가들도 하나둘 장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좋아, 지금이야.’

이무진과 눈빛을 교환한 이지연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바로 스테이지 위에서 뒷정리를 하기 시작하던 권미현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미현 본부장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죠? 죄송하지만 무진 본부장님이랑 마무리 같이해주실 수 있으세요?”

“벌써요? 밥이나 같이 먹고 가시죠. 근처에 맛집도 많은데.”

근처에 맛집이 있는 건 사실 몰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지연의 말에 권미현은 최대한 그녀를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무진과 입을 맞춘 권미현은

“죄송해요오. 근데 급하게 바쁜 일이 생겨서.”

“쳇, 누구예요? 정우 씨?”

“후훗, 비밀이에요. 그럼 마무리만 좀 부탁드려요.”

권미현은 이지연이 그 누구보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가 뺑끼를 부리는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다만.

‘하아…… 미치겠다. 불편한데, 둘이서만 있기는.’

이지연이 정말 일정이 있어서 먼저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거라고 해도, 이무진과 단둘이 있는 자리가 불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현 본부장님, 마무리 같이하시죠. 작가님들껜 제가 마무리 인사드릴 테니 본부장님은 진행자분들 정리만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둘은 잠시 어색한 동거를 진행했다.

하지만 뒷정리를 하는 건 정신이 없었기에, 어색할 새도 없이 빠르게 정리는 마무리 됐다.

“후우.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진 본부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 직원들도 먼저 다 보냈고 이제 저희만 가면 되겠네요. 그럼.”

이무진이 지난 한 달간 보여줬던 말 없는 대답은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의미가 명확했다.

다소 쌀쌀맞아 보일 수는 있으나, 자신이 고백했던 사람과 같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기에, 짐을 챙긴 권미현이 먼저 밖으로 나서려고 하던 그 순간.

“미현 본부장님, 잠시만요.”

이무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까고 한 달 간 아무런 말도 없었던 사내의 말에 권미현은 끊었던 연초가 강하게 땡겼다.

이무진과의 대화가 끝난 후 바로 편의점부터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권미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유지한 채 뒤를 돌아봤다.

“……아직 남은 일 있나요? 제가 맡은 일은 다 끝낸 것 같은데요?”

“아, 아닙니다. 미현 본부장님이 맡으신 일은 다 마무리된 거 저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뭐죠? 무슨 도움이라도 필요하신 건가요?”

냉기가 흐르는 듯한 권미현의 쌀쌀맞은 태도에 이무진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쳐 남한을 향해 탈북을 강행했을 때도, 몸에 총탄을 맞았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바이탈이 치솟는 기분.

‘이거 일 났구나야.’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만 했다.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난번에 드리지 못했던 대답. 늦었지만 지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

옅게 떨리는 이무진의 말에 권미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연초가 땡긴다는 생각을 하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이무진을 올려봤다.

“대답 한번 듣기 오래 걸리네요. 본부장님. 이미 한 달이 넘었어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으셔도 거절이라는 듯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와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이무진이 자석처럼 달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어내 말을 간신이 떼어낸 그때였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무진 본부장님.”

“……?”

“……?”

이무진과 권미현 모두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그 순간 텅 빈 콘서트홀 안으로 선교사를 연상시키는 선한 얼굴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늘 그래왔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강경진 본부장, 아니, 전 본부장님.”

양복을 빼입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콘서트홀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강경진이었다. 권미현과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린 이무진의 말에도 강경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이어 나갔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말하십니다? 그래도 미팅 자리에서도 여러 번 봤었는데,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요.”

“글쎄요. 딱히 반가운 얼굴은 아니라.”

쌀쌀함이 가득 묻어나는 이무진의 말에 강경진은 미소를 품은 시선을 그 옆에 있는 권미현을 향해 옮겼다.

“미현 매니저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아까 기사님들과 잠시 들어왔었는데, 운영팀에 계시던 미현 매니저님이 LGA컴퍼니 출판본부장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오래는 아니지만 제가 BS북 입사했을 때 뵈었던 거 기억이 나서.”

“……LGA컴퍼니 출판본부장 권미현입니다.”

권미현 또한 박정우를 통해 강경진이 어떤 식으로 BS북을 집어삼키려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상냥한 말을 건네진 않았다.

더군다나 강경진은 이제 업계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하하,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네요. 이렇게 다 한자리에 뵙게 된 게요. 진짜 반가워서 인사드리러 온 거였는데 그렇게 긴장하실 건 없습니다. 오늘은 가볍게 인사만 드리러 온 거여서요.”

그럴 필요 없다는 이무진의 말이 꺼내지기도 전에 강경진은 품에서 꺼낸 명함을 그들을 향해 건넸다.

“제 이름은 다 아시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소설피아 마케팅본부 부장 강경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 * *

시상식 일정이 모두 끝나고 보고 사항을 전달하는 전화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단풍 삼촌에게 걸려온 전화에 놀라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강경진을 만났다고?”

—그래, 소설피아 부장으로 들어갔단다. 그 양아치 새끼. 죽지도 않고 멀쩡히 살아있더라. 신수 좋던데?

내 손에 의해 내쳐지기 전까지 끝까지 BS북을 집어삼키려던 강경진이 소설피아에 입사했다는 말에 머리가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민을 잠시 미룰 때다.

지금 당장 한숨이나 쉰다고 해결책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거기다 지금은 단풍 삼촌에게 따로 전할 말도 있고.

“그런데 삼촌. 오늘 미현 본부장한테 말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다 끝난 거야?”

—어? 아, 아니?

“…….”

—그게…… 강경진 그 양아치 놈이 갑자기 나와서…….

“강경진 본 건 본 거고 삼촌은 해야 할 일 해야지. 진짜 정신 안 차릴래? 타이밍 놓치면 끝이야. 강경진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고 미현 본부장님이랑 대화나 끝내. 새벽에 질질 짜면서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인마! 내가 언제 질질 짰다고…….

“끝는다.”

단풍 삼촌의 전화를 끊자 이제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강경진, 그놈이 돌아왔다.

이곳 출판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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