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에르미스는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 * *
어느덧 부쩍 더워진 7월.
조팟놈의 담당 작가가 담당자 교체를 요청하는 건 월례 행사 같은 일. 조팟놈을 조금 갈구긴 했지만 이젠 그 정도로 화가 나진 않는다.
‘기대할 게 없으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뭐 이런 건가?’
일상과도 같은 조팟의 실수 외에 별다른 이슈 사항은 없었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따지자면 전날이었던 일요일 밤 11시 59분을 마지막으로 에르미스의 첫 공모전이 마무리 되었다는 점. 그리고 월요일인 오늘, 결과 발표를 앞둔 것 정도다.
“와…… 참가자 수 대박이네. 매니저님 이거 보셨어요?”
“뭔데요?”
점심시간을 10여 분 앞둔 시간.
BS북 판무 2팀 매니저 한 명이 키보드 소리만 가득한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에르미스 공모전 참가자 수요. 이번 소설피아 공모전 참가자랑 거의 비슷하데요. 벌써 기사 떴어요!”
“와 비슷하다고요? 대박이네. 에르미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면 진짜 대박인 거 아니에요?”
“대박이죠.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네요. 공모전 시작일을 조금 더 늦췄으면 참가작 수가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데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판무 2팀 매니저의 말처럼 에르미스에 관한 입소문이 조금 더 번질 때까지 텀을 더 뒀다면 분명 이번 공모전 참가 작품 수는 소설피아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단풍 삼촌이 기사 바로 뿌린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하지만 에르미스의 공모전 일정을 뒤로 늦췄다면 소설피아 제2회 공모전에 참가했던 작품들을 쉽게 빨아오지 못했을 터.
소설피아보다 공모전 참여작 수가 낮은 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생긴 지 1년도 안 된 플랫폼이 국내 최대 웹소설 플랫폼인 소설피아와 비등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만 해도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고.
역시 작가들을 신규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돈 만한 게 없다는 생각에 다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때, 시계가 정오를 가리켰다.
“끄으읏……차. 식사 맛있게 하십쇼.”
“점심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드십시오.”
퇴근 시간을 제외하고 직장인들에게 가장 달콤한 시간. 12시 정각을 가리키자 매니저들은 각자 PC에 잠금 설정을 하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어… 어어?! 떴다.”
“결과 발표 나왔어요?”
오직 판무팀과 로맨스 매니저들을 제외하고.
그리고 판무 2팀 매니저들 몇이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고 출판 본부 매니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 폰을 보거나 PC 화면을 딸깍거렸다.
“역시는 역시네. 제가 말했죠? 대상은 대감집이 따놓은 당상이라고?”
“무슨 매니저님만 맞춘 것처럼 말해요. 대감집 막내손자가 대상 타는 건 처음부터 이견이 없었는데.”
“이견이 없긴요! 대감집 막내손자 처음에 뜰지 모른다고 한 사람들 많거든요?”
“눼에 눼. 결과 봤으니 점심이나 먹으러 가시죠.”
“아, 진짜. 매니저님, 저 못 믿어요?”
“아이고, 믿죠. 그래서 점심 뭐 드실 건데요?”
판무 2팀 매니저들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에르미스의 첫 공모전 수상작이 대감집 막내손자인 것에 이견을 갖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편집자는 물론, 독자들도 원하는 건 오직 단 한 가지. ‘더 읽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와, 대바악! 루미 님 대상 탔어요!”
“진짜 잘 됐다!”
그리고 판무팀뿐만이 아니라 감탄의 탄성은 로맨스팀에서도 흘러나왔다. 로맨스팀 매니저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두 눈을 반짝이며 열창하는 필명, ‘루미’.
지금은 콩밥으로 단백질 보충 중이신 이전 판무 1팀 팀장 한우석 밑에서 반기를 들고 나갔던 싸이코루미 작가를 말하는 거였다.
‘이름이 임서진 매니저였었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대단하시네.’
전직 BS북의 판무 매니저였던 싸이코루미 작가는 로맨스물로 상당한 주가를 올렸다.
2016년이 되면서 BS북의 임원진이 전부 물갈이 됐다는 사실을 알리며 BS북 로맨스팀 매니저들이 컨택해 계약을 요청했다고 듣긴 했었는데, 우수상까지 탈 줄이야.
‘확실히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이번 첫 공모전은 판무뿐만이 아니라 로맨스도 함께 진행했기에 LGA컴퍼니 임직원들이 상당히 고생을 했다. 물론 고생한 만큼 두둑하게 보너스를 안겨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잔잔바리 소형 플랫폼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판무와 로맨스 공모전을 함께 열지는 않는다. 인력난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로맨스 장르를 집필하는 작가님들 중엔 판무를 장르를 쓰는 작가들도 은근히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에르미스 공모전도 처음엔 판무와 로맨스를 분리해서 진행할지 잠시 고민했었다. 하지만 결국엔 같이 진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신생 플랫폼인 에르미스를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소설피아보다 우리 에르미스가 우위에 있다는 점을 확고히 하기 위해선 한 번에 판무와 로맨스 공모전을 여는 것만큼 확실히 파급력을 주는 건 없었으니까.
“와, 진짜 대박이네요.”
PC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황건일이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읊조렸다.
“뭐가 대박입니까? 건일 매니저님은 다른 작품이 대상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판무 쪽만 해도 상금이 10억…… 로맨스까지 합치면 지급되는 총 상금만 해도 20억인데…… 진짜 어마어마한 것 같아서요.”
“놀랄 게 뭐 있어요? 재능 있는 작가님들한테는 그에 걸맞게 대우해 드려야죠. 출판계도 그래야 함께 성장하는 거고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진짜 상금 금액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마어마한 금액이긴 하지.
비록 황건일에겐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20억이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뒤엔 앞으로 몇년간은 돈을 쪽쪽 뽑아낼 수 있는 킵비트 그리고 나 혼자만 상하차 웹툰으로 화수분 역할을 하는 에르미스가 든든히 버티고 있다.
한태산 작가님의 대감집 막내손자 같은 대박 작품이 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에르미스에서 웹소설 파트는 수익보다 손실이 더 큰 부문.
웹툰처럼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까진 적자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직은 시든 풀잎처럼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테일랜드나 웹월드만 해도 점점 더 빠르게 덩치를 불려 나갈 테니까.
“건일 매니저님도 나중에 시간 되면 글 써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대상의 주인공이 건일 매니저님이 될지도.”
슬쩍 내뱉은 한담에 황건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사래를 쳤다.
“에헤이, 아닙니다. 저는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몇 배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건 안 됩니다. 아하하핫. 팀장님, 조팟님이랑 돈까스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지난주에도 3일은 돈까스를 먹은 것 같던데 이번 주도 한 주의 시작부터 돈까스라.
굳이 묻지 않아도 메뉴를 선택한 게 내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는 조팟놈일 게 분명하다.
“아뇨, 저는 점심 식사 끝나고 엘가에서 미팅이 있어서요. 맛있게들 드세요.”
“네, 팀장님. 다녀오십쇼!”
“맛점입니다.”
조팟같이 매일매일 들러붙어서 지 먹고 싶은 음식만 먹자고 하는 상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해야하는 황건일이 딱하긴 했지만, 업무가 아닌 점심 메뉴까지 내가 터지할 수는 없다.
황건일도 앞으로 사회생활에서 지금보다 성장해 나가려면 메뉴 선택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테고. 애처럼 내가 다 떠먹여 줄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
“이제 날이 덥네.”
황건일과 조팟을 먼저 내보내고 나는 임원진들이 기다리고 있을 LGA컴퍼니 3층 회의실을 향해 이동했다.
하루에 한 번밖에 없는 귀한 점심시간을 굳이 조팟놈과 보내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사실 오늘은 미팅 전에 회의실에 모여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셨어요, 대표님!”
“음식 도착했어요.”
“그아하하, 세팅 이미 싹 다 마쳤습니다. 얼른 식사부터 하십시다.”
그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임원진들이 미소를 가득 띠며 나를 반겼다.
“다들, 지난 한 달 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요.”
물론 환한 미소와 달리 임원진들의 얼굴은 무척 수척했다. 특히 심사를 진행하느라 지난 한 달간 눈이 빠지도록 글을 읽었던 권미현이.
“고생한 건 우리 다 아는 사실이니까 얼른 앉아서 밥부터 먹읍시다. 배고파 죽겠으니까.”
“그러죠. 밥부터 드시죠.”
그래서 오늘 주문한 메뉴는 전복 삼계탕.
아직 초복까지는 한 주가 남았지만, 원기 회복에는 삼계탕 만한 것이 없으니까.
‘……뭐지? 이 분위기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닭다리를 잡고 뜯기 시작하는데,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 묘한 기류가 잡힌다. 특히 단풍 삼촌과 권미현 사이에서.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에르미스 공모전의 시작 날이자 한태산 작가를 계약했던 그날, 지금 생각해도 믿기진 않지만 권미현이 단풍 삼촌에게 고백을 했었다.
초반에 단풍 삼촌이 징징대던 것 외에는 내가 따로 묻지도 않았고 각자 맡은 일이 바빠 모두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오늘이 처음 있는 일.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야들야들한 닭고기를 입에 쑤셔 넣는 지금도 한기가 불어오는 듯하다. 특히 권미현의 자리에서.
“흐음, 흠. 다들 고생 많으셨지만, 미현 본부장님이 특히 고생 많으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역시.
권미현의 반응이 이런 걸 보니 단풍 삼촌이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평소 얼음 같던 권미현이 드라이아이스처럼 변모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풍 삼촌의 반응을 살피는 게 나을 듯하다.
“아참. 무진 본부장님, 시상식 준비는 잘 되고 있죠? 작가님들은 모두 참여 가능하다고 하시나요?”
“그렇죠. 지방에 살아서 오기 힘들다고 하신 작가님들도 숙박비 모두 지원해드린다고 하니까 다들 시간 내서 와주시겠다고 하더군요. 주말이라 시간도 다 된다고 하시고.”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는 표정에 단풍 삼촌이 권미현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긴 하지만, 정확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수상자로 지정된 작가님들께 드릴 상패는 업체에서 각인 바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상식 날 올 기자들도 모두 섭외해 놨고.”
“고생하셨네요.”
“그으흐흐, 고생은 무슨.”
이번 공모전은 에르미스의 이름을 달고 하는 첫 번째 공모전. 소설피아와 달리 공모전 당선 결과도 예정된 일자에 진행했지만, 이걸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알리는 게 중요하다.
비록 나는 시상식 당일에 참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에르미스의 첫 번째 공모전을 빛내주신 작가님들이 그 덕을 온전히 받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기사님들이 언론에 쫙 뿌려주실 테고.’
소설피아와 테일랜드 그리고 웹월드는 성공리에 공모전 마무리가 된 에르미스를 보며 이제 한숨을 돌릴 터.
하지만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웹소설 공모전은 끝났으니까, 이제 슬슬 웹툰 공모전도 시작해 볼까요?”
“일 얘기는 밥 좀 먹고 합시다.”
“하하하, 알겠어요.”
에르미스는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