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그건 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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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상과 달리 에르미스의 소설판이 뒤집어지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대감집 막내손자ㄱㄱ 설명이 필요없다 걍 달려라
└ 잼씀?
└ 닥치고 봐라 대상은 확정이다
—공모전 시작한지 2주 됐는데 벌써부터 대상 작 ㅇㅈㄹ 설레발좀 작작하자
└ 잼긴함 개취론 나혼상보다 막내손자가 더 잼씀
└ 22222
└ 미안하다 원댓인데 대상 확정 맞다 졸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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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북 익명 게시판에선 사람들이 연일 한태산 작가의 대감집 막내손자의 글을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와, 진짜 몰입감이 무슨……. 한태산 작가님 원래 필력 좋으시긴 해도 전작까지는 원래 이 정돈 아니지 않았나요? 갑자기 회귀자라도 되셨나?”
“이거 지금 컨택하면 늦었겠죠?”
“어휴, 매니저님. 소식이 왜 그렇게 늦어요?”
“뭐가요?”
“대감집 막내아들 우리 작품인 거 못 들었어요?”
“헐? 누구에요? 우리 팀장님? 아니면 1팀 팀장님?”
“아니이, 우리 엘가에서 계약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제 팀장님이 말해주셨음.”
물론 정글북을 포함한 커뮤니티 게시글뿐만이 아니라 에르미스 제 1회 공모전에 참여한 병사들, BS북의 매니저들도 한태산 작가의 신작에 관해 열띤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아, 또 엘가에요? 이제 배 아프거나 질투심 이런 게 생기기보다는 그냥 경이롭다니까요.”
“내 말이요. 아니 생각해 봐요. 코즈일작가랑 노원지귀 작가 다 엘가 소속이죠? 거기다 나 혼자만 상하차도 엘가꺼죠. 그런데 대감집 막내아들까지 엘가에서 바로 계약한 거 보면 진짜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코즈일도 나고 노원지귀도 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BS북엔 대표인 오진아 뿐. 평사원 중에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판무 2팀 매니저들의 웅성거림에 평소 남 이야기에 잘 끼지 않는 황건일 매니저도 귀를 쫑긋 새우며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팀장님, 혹시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 누구요?”
“나혼상이랑 대막아 계약하신 엘가 편집자님이요.”
“글쎄요, 저도 누군지는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그거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나혼상과 대막아를 계약한 사람은 네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로 나다. 그런데 황건일 답지 않게 미간을 슬쩍 찌푸리는 그를 보니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그냥…… 부러워서요.”
“부럽다고요?”
“……예. 물론 경력에선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래도 이번 에르미스 공모전 같은 경우엔 괜찮은 작품들 나름 잘 컨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황건일은 우리 1팀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으레 신입 편집자들이 성장통을 겪듯 황건일도 그 과정에 들어섰다는 게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 읽혔다.
“그래서 제가 컨택을 하고 직접 계약을 체결한 작품은 아니더라도 초반 회차를 보고 모니터링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대감집 막내 아들의 경우엔 솔직히 5화는 넘어가서부터 재미있다는 생각이 물씬 풍겨서 계약 제안을 보내려고 하니…… 이미 그때는 계약 제안을 닫아두셨더군요.”
소설피아의 경우 출판사 계정을 통해 계약 제안 쪽지를 주고받으며 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에르미스의 경우 쪽지 기능이 약간 다르다.
지금 황건일의 말처럼 에르미스를 통해 계약 제안을 보내려고 해도 작가가 계약 제안 받기 설정을 해둔 경우에만 계약 제안을 받을 수가 있고, 그 설정을 잠가둔다면 출판사는 계약 제안을 할 수도 없다.
‘원래 2021년은 되어야 소설피아가 도입했던 기능이었지.’
또한 소설피아는 추후에 5화 내에는 출판사에서 컨택을 하지 못하는 기능을 만들어 뒀었다. 표면적으론 최소 5화까지는 읽고 신중하게 작품을 컨택하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을 까놓고 보면 싹수 좋아 보이는 작품이 5화 전에 다른 플랫폼으로 나르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였다.
재미있게도 소설피아 자체 매니지는 5화가 되기 전에도 따로 계약을 했으니 오지는 내로남불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에르미스도 그 기능을 그대로 넣은 거였고.
“엘가와 마찬가지로 저희 BS북도 타 출판사와 달리 5화 전에 컨택을 할 수 있는데……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님께서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전개를 이끌어 가시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대감집 막내아들 그리고 나혼상을 컨택하셨던 담당 매니저님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혼자 계속 말을 이어나가던 황건일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이 머리를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괜한 소리라뇨. 단지 저도 그 담당자님이 누구신지는 정확히 몰라서 그래요. 엘가는 저희 쪽이랑 체계부터가 달라서요.”
다를 게 뭐가 있나.
엘가 쪽에는 입 무겁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여럿 뽑아 두둑한 월급 봉투 쥐어 주는 게 다인 것을.
하지만 황건일이 애타게 찾는 나혼상과 대막아의 담당자가 나라는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충 기운 내라는 말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팀장의 일이니까.
“건일 매니저님.”
“예, 팀장님.”
“물론 이번에 대감집 막내아들을 놓친 거는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번과 같은 일이 다음에도 여러 번 반복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황건일은 내가 자신을 질책하는 줄 알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주억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데, 여기서 갑자기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도 어려운 노릇.
빠르게 조언을 끝내기로 했다.
이제 LGA컴퍼니 쪽에서 진행할 미팅 시간도 다가오고 있으니까.
“같은 편집자 업무를 하더라도 사람마다 주어진 능력은 다르죠. 누구는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하고, 누구는 작가님의 취향에 따라 기가 막힌 윤문을 하기도 하죠.”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풀이 죽은 채로 대답하는 황건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건일 매니저님은 건일 매니저님만의 장점을 발전시키면 됩니다. 건일 매니저님은 자신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 저는…… 장점이랄게…….”
황건일을 정말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지 고개 숙인 얼굴에서 그의 동공이 여기저기 방황하는 게 보였다.
“자신감!”
“아, 예?!”
황건일은 자신에게 한 소리라고 들었는지 수그렸던 허리를 면접자처럼 곧게 세웠다.
“그게 건일 매니저님 장점이라고요. 서글서글하면서도 자신감 있고 친근한 말투 그 모든 태도가요.”
“그런 게 능력과 무슨…….”
내 말이 장난처럼 느껴졌는지 꼿꼿하게 세웠던 황건일의 허리가 다시 흐물해지며 그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 졌다.
“교정이나 윤문 이런 부분이 모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앞서 제가 말한 그런 상냥한 태도. 상당수의 작가님들껜 그런 태도가 원활한 집필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정말입니까?”
정말이고 말고.
그리고 실제로 이런 태도는 웹소설 매니저들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편집자와 작가라는 업무적인 관계로 만났다고 해도 결국 이건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짧은 단편 위주의 여성향 작가들과 달리 남성향 작가들의 경우 한번 집필을 시작하게 되면 짧아도 반년이 걸린다.
즉, 해당 작품의 시작 부분에 담당하게 된 담당 매니저와 반년간 함께 이런저런 소통을 해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못해도 주 1회 이상은.
그렇기에 반년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독자들의 마라맛 댓글에 뼈를 뚜드려 맞을 땐 작가의 멘탈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입니다. 제가 팀장으로서 월에 한 번 작가님들께 연락드리는 거 아시죠?”
“예, 팀장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황건일을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직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가님들이 담당 작가에게 주는 평가를 분석해보면 건일 매니저님이 출판 본부 전체에서 가장 높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다른 직원들도 들을 수 있으니까 목소리는 조금 낮추고요.”
잠시 화장실에 간다던 조팟은 변비라도 걸리셨는지 화장시에서 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덕분에 황건일과의 대화는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자, 죄송합니다. 작가님들이 좋게 평가해주셨다니 너무 기뻐서 그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하던 황건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충분히 기뻐해도 될 만한 성적입니다. 교정이나 윤문이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거지만, 작가를 대하는 태도는 쉽게 바뀌기 어렵거든요.”
황건일에게 말한 작가를 대하는 태도는, 달리 말해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BS북의 판무1팀과 2팀, 로맨스팀을 모두 통틀어 황건일이 작가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유(물론 나를 제외하고다)는 간단하다.
비단 업무적인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회사에 출근하면 작가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날씨가 좋다느니, 아니면 오늘은 비가 많이 오니 우산을 챙기라는 등 흔히 친구에게 할 법한 그런 말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행동이 쌓이고 쌓이면 단순히 업무적이었던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변모한다.
“건일 매니저님이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완결 임박한 작가님들께 차기작 계약하자고 하면 대부분 하시죠?”
“예, 그렇습니다. 온 좋게도 아직까진 차기작 계약을 다른 출판사와 하고 싶어 하신 작가님들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황건일은 그걸 운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건 결코 운이라 불릴 수 없다.
조팟만 보더라도 1질을 완결 내고 나면 다른 담당자로 바꿔 달라고 하던지 BS북에 학을 뗀 사람처럼 완결과 동시에 차기작은 타 출판사랑 계약할 거라고 선을 긋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건 운이 아닙니다.”
“……?”
“건일 매니저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결코 운이 아닌 건일 매니저님만의 재능이자 실력이란 뜻입니다. 이번에 첫 질을 했던 신인 작가님이 차기작에선 더 좋은 글을 쓰시고 차차기작에선 더 좋은 글을 쓰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황건이에게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때가 된다면 건일 매니저님은 알아서 강추강 작가님이나 한태산 작가님 같은 대작가님의 담당자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지금처럼만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팀장님!”
내 말에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황건일의 대답이 다시 쾌활해졌다.
매니저가 성장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 1팀의 매니저들이 남들과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극복해내는 그런 매니저들이 되기를 바란다.
“……저, 티, 팀장님?”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때 조팟이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똥을 30분을 쳐 싸냐 새끼야? 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었으나 나는 오늘도 품위를 지킨 채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작가님이 연락하셔서 통화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담당자…… 교체를 원하신다고…….”
“…….”
황건일은 됐고.
조팟놈만 성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