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기다리셨다니…… 무엇을……?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으흐흐, 늦어서 더 좋지! 우리가 한우 오마카세를 얼마나 먹었는데. 배 터지겠다 야.”
“우린 이제 막 다 먹었는데.”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LGA컴퍼니 임원진 회식 장소였던 한우 오마카세 식당 또한 강남역 인근이었다. 그렇기에 박정우는 한태산과의 미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저도 미팅하면서 대충 먹었거든요. 딱히 배는 안 고프네요.”
“계약은요? 잘 됐어요? 아니, 물을 필요도 없이 잘 됐겠죠. 선인세 5억 원에 계약금 1억 원인데, 이걸 안 하면 그게 바보지.”
“하하, 따끈따끈한 계약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박정우가 한태산의 지장이 가득 찍힌 계약서가 든 서류 가방을 톡톡 두들기자, 권미현은 될 대로 되라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이무진은 걸걸한 웃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소고기로 배 가득 채웠으니 2차 가십시다. 단백질 보충은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알콜 섭취 좀 해 줘야지.”
“하하, 그러시죠.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법카가…… 음?”
이무진의 말에 박정우가 품에서 법인 카드를 꺼내는 그 순간. 박정우는 옆에서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는 이지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음? 권미현을 보라고? 아…….’
박정우에겐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이란 기술이 있다.
소설 속 상태창을 불러오는 것 같은 이능력은 아니지만, 이는 사람이 숨기는 미세한 표정을 읽는 기술.
여자친구의 흔들리는 동공과 뻐끔거리는 입 모양을 살피니 걸걸한 웃음을 내뱉은 이무진 뒤에 서 있는 권미현을 살피라는 신호가 분명했다.
‘나가! 나가라고! 2차 끼지 말고 나가!’
‘……접수 완료.’
이무진의 거대한 몸 뒤에 얼굴만 빼꼼 내민 권미현이 눈에서 광선을 내뿜으며 당장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고, 박정우는 그녀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법카가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하하. 법카 제가 들고 있다고요. 무진 본부장님이 이걸로 계산 하고 나와주세요. 영수증 챙겨주시고. 자, 우린 먼저 나가 있죠.”
“네, 대표니임.”
“밖에서 기다릴게요 본부장님.”
이무진을 뒤로하고 박정우와 이지연 그리고 권미현이 식당 밖에 모였다. 이무진이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 남은 시간은 길어봐야 1분 남짓. 그 사이에 모든 정보 교환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들 잘 들어요. 괜히 2차 갔다가 빠지려고 하면 무진 본부장님이 분명히 잡으려고 할거에요. 그러니까 2차는 저랑 무진 본부장님만 따로 갈게요.”
이무진이 아직 카운터 앞에서 계산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권미현의 말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빠르게 흘러 나왔다.
“장소는 정하셨어요? 여기 근처에 분위기 좋은 술집 몇 곳 있긴 한데.”
“분위기보다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찾아놨어요. 두 분의 기운을 받아 갈게요. 본부장님이랑 대표님은 서포트만 해주세요.”
“걱정 마요 미현 본부장님!”
“건승하시길…….”
“감사해요.”
권미현이 결연한 눈빛을 번뜩이는 그 순간.
걸걸한 웃음과 함께 배를 쓰다듬는 이무진이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아하하하, 소고기로 이렇게 배를 채우는 날이 오다니. 이제야 우리 회사가 좀 잘 나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우 대표, 무슨 꿍꿍이 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에요? 꿍꿍이라니?”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히죽이던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는 이무진의 말에 박정우뿐만이 아니라 권미현과 이지연도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그가 뭐라도 눈치챘을까를 걱정하면서.
“아니, 평소에는 매번 돼지고기만 먹더니 오늘은 왜 소고기냐 이 말이지? 소고기 사주는 사람 주의하라는 말 몰라?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어!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라고! 그아하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고기로 급 나눠요? 그동안 다들 돼지가 더 땡긴다고 했으니까 그런 거지. 소고기가 그렇게 좋으면 앞으로 회식 땐 계속 소고기 먹으러 가요, 그럼.”
“그아하하하하하! 조오치! 자, 그럼 2차는 어디로 가보실까? 맥주? 소주? 와인바? 이자카야? 말만 하라고! 내 손에 들린 게 바로 에르미스를 성공적으로 런칭하게 만든 LGA컴퍼니의 법인 카드니까!”
이무진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
자상이 가득한 얼굴로 걸걸한 웃음을 내뱉는 그를 보며 다들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오늘 1차까지만 하고 먼저 가볼게요.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살짝 얹힌 기분이 들어서요.”
“예에? 아니…… 무슨 새 모이처럼 드셔 놓고 얹힙니까? 2차 갔다가 3차로 노래방도 가고 그래야지?”
그리고 이제는 작전에 돌입할 시간이었다.
선빵을 친 건 이지연. 그리고 살짝 미간을 좁히며 시작된 이지연의 메소드 연기에 박정우 또한 바로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아, 거참. 무진 본부장님. 어디 가서 그런 말 했다간 꼰대 소리 들어요. 저도 사실 한태산 작가님하고 1차때 너무 달려서 속이 많이 안 좋네요. 머리도 어지럽고요.”
“아니 뭐야 이게? 얼마만의 회식인데 이러기야! 정우 너…… 아니, 대표님 화색도 완전 좋구만!”
BS북의 임원진을 갈아버렸던 작년 연말을 시작으로 에르미스 런칭 준비를 위한 온갖 미팅, 폴란드 출장 거기다 킵비트 운영과 인의 보육원의 관리까지.
이무진은 지난 반년 가까이 정말 쉼 없이 소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렇기에 정말 간만에 하게 된 임원진 회식을 이렇게 조촐히 끝낸다는 게 못내 서운했다. 심지어 눈가가 약간 촉촉한 것 같기까지 했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2차는 저희끼리 가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근처로 가죠. 아는 곳 있거든요.”
“어…… 그게 저…….”
이무진이 자신의 몸 반도 안 되는 권미현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박정우와 이지연은 밝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술은 어떤 걸로 드실래요? 종류 별로 다 있으니까 골라 보세요.”
“……어, 이게 참. 태블릿으로 주문하다니…… 이거 젊은 친구들 오는 데 아닙니까?”
이무진과 권미현 단둘이 향한 곳은 한우 오마카세집 근처의 룸 술집. 한쪽 벽면에 붙은 태블릿으로 주문을 하는 광경, 메뉴에 보드게임이 있는 광경, 태블릿을 통해 다른 테이블에 말을 걸거나 합석을 제안할 수 있는 광경 등. 그 모든 게 이무진에겐 너무 낯선 광경이었다.
“본부장님도 이제 30밖에 안 됐잖아요. 아저씨 같은 소리 말고 술이나 고르세요.”
“……아하하, 예. 그러죠.”
늘 새초롬한 말투를 하는 권미현이었기에 이무진은 업무 외적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무진은 권미현의 리드에 따라 홀린 듯 메뉴를 주문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손엔 하이볼이 한잔 들려 있었다.
“안주 나오기 전이긴 하지만, 일단 짠 할까요?”
“예, 예. 그러죠.”
비록 권미현이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평소에도 이 정도로 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무진 또한 그건 마찬가지.
하지만 둘이서 술자리를 갖는 건 LGA컴퍼니가 생기고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룸 안에서 하이볼이 꿀떡꿀떡 목을 넘어가는 소리 말곤 고요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숨 막혀 뒤지겠구만 기래. 아오지라도 들어 온 기분이다야.’
보육원에서 수많은 아이들과 복작거리며 살아온 이무진이었기에 이런 고요한 적막감이 그에게 주는 심리적 압박은 상당했다.
“하하, 미현 본부장님. 고기 드실 줄 알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죠?”
지금 당장 입을 벌리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버티지 못할 기분이 들었기에 이무진은 스몰 토크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한우 오마카세집 가기 전만 해도 거기 전통주가 유명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고기만 드시는 프로다운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그아하하하!”
“아, 네. 그냥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것 뿐이에요.”
“예?”
하지만 권미현의 입에서 되돌아온 말은 이무진이 적당히 받아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지옥 같은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종업원의 등장!
“이야아! 튀김 노릇노릇한 거 보십쇼! 이거 아주 기름을 좋은 걸 썼네! 하이볼에는 튀김이 딱이죠, 그아하하! 자, 미현 본부장님도 얼른 드시—”
“무진 본부장님.”
“예?”
“제가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 듣지 않으셨어요?”
이무진은 노릇노릇한 튀김 옷이 덮인 새우를 입으로 옮겨가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이무진이 머리를 굴리는 그 순간, 권미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브루나이 출장 갔을 때 말이에요. 본부장님이 담배를 피는 여자도, 술을 많이 마시는 여자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것 때문이에요.”
“……아. ……예. 예에?”
이무진은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던 꽃제비 출신.
남들과 다른 유년 시절로 인해 익힌 눈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우가 LGA컴퍼니 그리고 킵비트의 전권을 믿고 맡겼을 정도로 머리 또한 비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서른 평생 축적해온 그의 데이터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처해야 할, 아니, 해석할 방안은 마련된 적이 없었기에 자상으로 황소 같은 두 눈만 꿈벅거릴 뿐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신호를 보냈는데, 본부장님이 전혀 눈치를 못 채시는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제 스타일이 아니긴 하고요.”
“기다리셨다니…… 무엇을……?”
“저 무진 씨 좋아해요. 직장 동료 말고, 이성으로.”
“……?”
툭—
이무진의 젓가락에 들린 새우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다물어지지 않은 입을 뒤로 한 채.
* * *
드르르르륵— 드르륵— 드르르르륵—
“아…… 주말 아침부터 누구야…….”
한태산 작가와의 계약을 마치고 이틀이 지났다.
오늘은 6월 12일 일요일. 침대 머리맡에서 지진 같은 진동으로 내 단잠을 깨운 폰을 흐린 눈으로 집어 드니 아침도 아닌 새벽 5시다.
“하아…… 여보세요.”
—정우야, 잘 들어라. 진짜 큰일이다.
“지금 새벽 5시 반이야. 주말에 글 몰아서 써야 하는데, 루틴 망가지면 어떻게 할 거야.”
—간나야! 글도 중요하지만 이건 진짜 큰일이란 말이다! 퍼뜩 정신 차려 봐라!
“후우, 일어 났어. 뭔데. 말 해 봐.”
평소였으면 이른 시간에 걸려온 단풍 삼촌의 전화에 화들짝 놀랐을 게 분명했을 터. 하지만 이미 지연이를 통해 단풍 삼촌이 권미현에게 내뱉은 실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냥 귀찮기만 할 뿐이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는 몸만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고, 단풍 삼촌은 듣기만 해도 거북할 정도로 짙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려울 테지만 잘 들어라. 내가 이거 때문에 어제 한숨도 못 잤다. 미현 본부장님이 말이다…….
갑작스러운 미현 본부장의 고백.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고백에 단풍 삼촌은 권미현 본부장이 실은 산업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라. 8살이나 많은, 그것도 탈북자인 내가 뭐가 좋다고 고백을 한단 이 말이간? 머리에 핵 맞은 것도 아닌데 말이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LGA컴퍼니를…….
“아, 돌겠네. 그래서 미현 본부장님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 말도 안 하고 새우튀김만 처잡수시고 오셨어요? 미현 본부장님이 밖으로 나가는데 잡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하고?”
—너, 너, 그건 어떻게…….
“나한테 연락 말고 난초 삼촌한테 물어봐.”
난초 삼촌은 가부키초 호빠 출신.
인의 보육원 삼촌들 중에서 유일하게 곱상한 얼굴로 이성과의 대화에 면역이 있는 삼촌이다.
—간나야! 이걸 난초 형님한테 뭐라고 말을…….
“아, 몰라. 삼촌이 미현 본부장님한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 삼촌 개인 사정은 삼촌이 알아서 하라고.”
—야! 인마! 회사 본부장이 부탁하면 이걸 도와줘야…….
“끊는다.”
단풍 삼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전화를 끊고 방해 금지 설정을 했다. 앞으로 2시간은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누리길 바라면서.
“어휴, 삼촌 때문에 잠도 깼는데, 공모전 순위나 한번 봐 볼까?”
스윽— 슥— 스윽—
폰으로 에르미스 앱에 들어가자 3일차에 접어든 공모전 순위가 소설 탭 메인 화면에 나왔다.
“흠…… 아직은 100위 권이시네.”
공모전 순위를 쭉쭉 내리니 한태산 작가의 대감집 막내손자의 순위가 107위에 랭크되어 있는 게 보였다.
“뭐, 딱히 걱정할 건 없지. 어차피 1위는 대감집 막내손자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기에 폰을 치우고 다시 이불을 덮었다.
앞으로 단 한 달.
고작 한 달만 지나면 에르미스의 소설판은 뒤집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