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72화 (172/201)

172화 ― 인주도 챙겨 왔거든요.

* * *

“작가님?”

“아, 죄, 죄송합니다. 휴지가…….”

“괜찮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가득 보이는 한태산을 뒤로하고 나는 플라스틱 책상 위에 올려진 냅킨을 뽑아 빠르게 손을 닦았다.

이제야 본 게임 시작이다.

벌써부터 대화의 흐름이 끊기면 안 될 일이지.

“드리던 말씀을 마저 하자면, 정산 비율은 작가님이 9할 그리고 저희 드래곤이 1할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에르미스에서 100화까지 독점으로 연재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한잔하죠.”

“예, 작가님.”

내가 건넨 계약 제안에 놀란 듯, 한태산은 잔을 부딪친 뒤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큰일이네.”

“예?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신단 뜻입니까?”

소주를 털어 넣으며 중얼거린 한태산의 말에 놀라 되묻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주가 답니다. 이런 날 마시면 취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태산은 그 말을 끝낸 후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워 단숨에 비워 냈다.

“후…… 지금 하신 말씀. 사실입니까? 제가 말한 계약 조건보다 선인세 6배에 계약금 100배를 주신다면…… 선인세는 4억 8천만 원 그리고 계약금은 1억 원을 주신다는 뜻인데요?”

“정확합니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건넨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한태산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술잔 끝을 검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이.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정산비 9 대 1에 선인세 4억 8천 만 원 그리고 계약금 1억 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생각할 틈을 줄 생각이 없다.

무릇 패가 든 칼을 뽑아 들었으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 내야 하는 법이니까.

“아직 조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비록 6배라고 말씀드렸지만 선인세도 깔끔하게 5억 원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진심…… 진심이십니까?”

고생한 대리 기사님께 웃돈을 얹어 드리듯 2천만 원을 더 얹어주겠다고 한 말에 한태산의 눈이 부릅 뜨였다.

“물론이죠. 혹시라도 걱정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선인세를 차감하지 못하면 몇 배 이상 반환 같은 독소 조항 따위는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직접 살펴보시죠.”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 건네자 한태산은 손끝으로 글자를 가리키며 빠르게 계약서를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껏 살펴보십쇼, 작가님. 독소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아봐도 없는 클린한 계약서니까.’

한태산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는다고 해도 LGA컴퍼니의 계약서엔 작가 편의적인 조항들로만 가득 차 있을 테다.

선인세를 차감하지 못하면 몇 배 이상 반환?

배 이상 반환은 커녕 억지로 차기작을 계약해야 하거나 하는 목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약서의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살핀 한태산 또한 그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다. 그의 얼굴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계약서 내용이 복잡할 수도 있죠. 이해가 잘 안 가시는 부분을 알려 주시면 제가 쉽게 풀어서 설명을 도와드리—”

“아뇨. 제 말은 에르미스가 아무리 신생 플랫폼이라고 해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작가에게만 유리한 계약서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한태산은 계약서를 덮어 테이블 한쪽 끝으로 민 후,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 이 계약서대로라면 제 신작, 대감집 막내손자가 선인세 5억을 차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완결만 낸다면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남은 선인세의 차액을 반환한다는 조항 또한 없고요. 제 말이 맞습니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카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둔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눈초리처럼, 한태산은 경계심을 잔뜩 담은 눈빛을 내게 보냈다.

“정확합니다, 작가님. 이미 다른 출판사와 여러 작품을 하셨던 작가님이시라면 LGA컴퍼니의 이런 차이점을 의아하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 작가님께 계약 요청을 드리는 것은 담당 매니저인 제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가가 신작을 준비할 때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저 또한 제 작품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째 제 자신보다 매니저님이 제 글에 더 자신감을 가지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자신이 없었으면 퇴근 시간이 끝나고 이렇게 작가님을 찾아뵈러 오지도 않았을 테죠.”

“…….”

이어진 내 설명에도 한태산은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았다. 그러곤 비었던 소주잔을 채워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 내게 물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어느 작가라도 이렇게 좋은 조건을 받는다면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태성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선인세를 차감할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매니저님께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으십니까?”

에둘러 말했지만 한태산의 말뜻은 자신이 쓴 글이 선인세를 다 차감하지 못하면 내가 괜찮은지, 즉, 짤리진 않을지에 관한 염려를 나타낸 거였다.

아직 웹소설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2016년.

S급 작가 아닌 SSS급 작가라 하더라도 1~2억 원 정도의 선인세를 받는 시기다.

그런데 선인세가 아닌 그냥 작가에게 주는 돈인 계약금만 1억 원에 선인세는 5억원, 도합 6억 원을 준다고 하니 한태산은 자신이 아닌 내 안위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아직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5억밖에 안되는 시기니까.’

자신이 얻게 될 이득보다 내 안위를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한태산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다. 앞으로 5~6년만 지나면 그를 움직이기 위해 선인세만 최소 10억 원이 넘는 거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가님께서 우려하시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대표님께선 전적으로 담당 매니저의 재량에 따라 선인세 등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니까요. 그리고 저는 이 글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가능성이요? ……어떤?”

“출판사 사이에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 만든 원작 하나, 열 작품 안 부럽다.”

“그런 말이 있었습니까?”

“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말이죠.”

내가 지금 만든 말이다.

그가 들어봤을 리가 만무하지.

“편집자들 사이에서 도는 이 말은, OSMU가 가능한 좋은 IP 하나면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입니다. 대감집 막내손자 같은 경우엔 현대 배경이기에 우선 웹툰으로 제작하기에 용이하고요.”

“신기하군요. 어차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일 뿐인데, 현판이라고 더 쉽다는 겁니까? 건너 듣기론 배경은 무슨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쉽게 배치하고 채색만 다시 하면 된다고 하던데요?”

웹툰 작가들이 들었으면 뒷목 잡고 각혈할 소리를 하는 한태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님 말씀처럼 스케치업 이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배경에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배치하고 리터칭만 하면 되죠. 하지만 현판 장르의 경우 회사, 사무실 안, 학교 등 한정적인 공간인 것과 달리 판타지 장르는 작가의 독창성이 주가 되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스케치업을 사용하더라도 한계가 명확합니다.”

“음…… 그건 몰랐군요.”

“거기다 무협이나 액션이 주가 되는 판타지 장르의 경우 무공이나 이능력이 발현되는 효과를 넣기 위해 진이 빠져서 그림 작가님들이 상당히 기피하시죠.”

한태산 작가의 전작들 중 웹툰화가 진행된 작품은 아직 없다. 그렇기에 웹툰화라는 떡밥은 한태산의 입맛을 다시게 할 수밖에 없을 테다.

물론 이건 시작일뿐이지만.

“하지만 작가님의 글은 웹툰 보다 드라마로 제작했을 때 더 좋은 반응을 얻을 겁니다. 드라마 제작사에서도 상당히 좋아하는 소재니까요.”

“……고작 1화만 올린 글인데 벌써 그렇게까지—”

“작가님, 1화만 나온 글이던 200화까지 다 나와서 완결이 된 글이던 OSMU 계약 체결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물론 구라다.

아직 지표도 나오지 않은 글을 보고 선뜻 계약할 제작사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 그렇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작가님께서 원하신다면 대감집 막내손자의 웹툰화는 지금 당장 특약에 적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

이어진 말에 한태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계약서를 준비해 오면서 특약에 웹툰화 확정에 관한 부분을 일부러 적지 않았다.

4억 8천만 원에서 2천만 원을 더 얹어주고 웹툰화를 확정시켜 주는 것. 사실 이건 조삼모사이긴 하지만 한태산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테다. 단지 그를 잡기 위해 계약 조건을 더 얹어주는 것처럼 보일 테지.

“그리고 드라마화는 지금 당장 확정해 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한 5년 이내에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저희 LGA컴퍼니와 계약을 해주신다면 계약 시점으로부터 바로 제작 업체를 찾아보도록 하죠.”

“저, 정말입니까?”

정말이고 말고.

내가 한태산과 계약을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빌어먹을 드라마의 마지막 두 화.

명작을 순식간에 개그물로 만들어버린 그 장면을 없애버리고 싶은 거였으니까.

“예, 작가님. 더 궁금하신 사항 있으십니까?”

내가 회귀자란 사실을 밝힐 수만 있다면 한태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특히 단 두 화로 이전 13화를 싹 다 말아먹은 그 드라마에 관해서.

‘말한다고 해도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긴 하겠지. 한태산 작가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니까.’

내가 회귀하기 전.

한태산은 드라마 대본 제작에 자문으로 참여했었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한태산이 원작에 참여한 건 10화까지.

그리고 그 후로부터는 드라마 작가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 때려쳤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한태산 작가님, 정말 선녀십니다. 저였으면 엔딩을 아 씨발 꿈 따위로 망친 인간한테 똥물을 들이부었을 텐데요.’

그렇기에 대감집 막내손자의 원작을 무조건 내가 계약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전생과 같은 파국을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음…… 제가 계약한다면 선인세는 그럼 언제까지 들어오는 겁니까?”

더 궁금한 부분이 없냐는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한태산이 고개를 슬며시 들며 물었다. 그리고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 컨택 주셨을 때 제가 말씀 드렸지만, 저는 아직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겸업으로 작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니저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데 여기서 계약 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나 할 선택이겠지요.”

소주를 다시 한 잔 입에 털어 넣은 한태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 정도의 선인세가 들어온다면 저는 바로 퇴사를 하고 전업 작가 생활을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쭤보는 거니 너무 좋지 않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작가님께서 전업을 시작하신다면 집필에만 전념하실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건데, 저로서도 더 좋은 일이죠.”

“좋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한태산 작가가 대감집 막내아들을 처음 연재했던 건 원래 2017년은 되어서였다. 그리고 한태산 작가가 전업을 시작한 것도 대략 그 시기였기에 그가 겸업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알아서 전업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시다니? 그렇다면 작가님의 판단이 흔들리기 전에 돕는 게 바로 참된 매니저로서의 도리다.

“그럼 내일 바로 입금해 드리죠. 선인세 그리고 계약금까지 모두 다.”

“…….이런 말 듣고도 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바보겠죠.”

한태산 작가는 빙긋 미소를 지은 후 계약서 잡아들고 넘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사인을 할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가방에서 팬을 꺼내 건네는 그 찰나.

꾸욱—

“자, 작가님?”

“하하, 도장을 따로 안 가지고 나왔으니 무인(拇印)으로 찍겠습니다.”

“…….”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한태산은 어느새 바짝 쪼그러든 닭볶음탕 국물에 굴린 엄지를 계약서에 날인란에 찍었다.

“하하, 이거 분명히 매니저님께서 계약 하겠다고 하신 겁니다? 이제 와서 무르는 것 없어요?”

“그게 아니라…….”

서명으로 해도 될 것을, 쪼그라든 닭볶음탕 국물을 적셔 지장을 찍을 줄은 상상을 못했다.

눈을 부릅뜨며 반 장난스럽게 계약서를 자신의 품으로 숨기는 한태산의 행동에 나는 말 하려던 것을 멈추고 가방을 뒤적였다.

“혹시 몰라 인주도 챙겨 왔거든요.”

“아…….”

솔직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닭볶음탕 국물에 손가락을 적실 정도로 한태산은 이걸 놓칠 수 없는 계약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하, 괜찮습니다 작가님. 계약서는 항상 여분을 가지고 다니니까요. 여기 무인으로 하실 거면 인주는 이걸 사용해주시면 됩니다.”

“아하하, 민망하네요. 예, 감사합니다.”

물티슈로 엄지를 깨끗하게 닦아 낸 한태산이 다시 인주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고 나 또한 즉시 LGA컴퍼니 법인 도장을 꺼내 계약서를 맞대고 각각의 페이지를 반으로 접어 날인해 계약서를 마무리했다.

“하하하, 혈서라도 쓴 것처럼 손가락이 시뻘개졌네요. 잘 썼습니다.”

“별말씀을요.”

한태산은 물티슈로 시뻘개진 엄지를 다시 닦고는 내게 인주를 건넸다. 그러고는 역심히 지장을 찍은 두 부의 계약서 중 하나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입금 안 되면 이번 계약은 무횹니다. 아시죠?”

“물룐이죠 작가님. 아무리 늦어도 오후 5시 전에는 입금될 겁니다.”

사실 오전 중에 입금될 게 99.9%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것도 이제 막 계약한 작가에게 하는 말이라면 예외 상황을 대비해 신중에 신중을 가해 말해야만 한다.

매니저의 의도가 어떻든, 출판사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매니저는 회사의 얼굴로 미팅 자리에 나온 거니까.

“하하하, 이제 좀 제대로 마셔볼까요? 정든 회사에도 내일 당장 사표를 내야겠네요.”

“좋습니다, 작가님.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 마음껏 드시지요.”

“아이고, 됐습니다! 계약금을 1억씩이나 받았는데, 소주 하나 제가 못 사겠습니까? 서운한 소리 말고 제가 사겠습니다.”

“하하, 그럼 염치 불고하고 얻어먹어 보겠습니다, 작가님.”

“건배 하시죠!”

내 우상과 나의 잔이 함께 부딪쳤다.

비록 작가와 매니저의 관계로 부딪치는 잔이었지만, 여전히 즐거웠다.

‘주식 이야기는 다음에 꺼내는 게 좋겠네.’

LGA컴퍼니 임원진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태산을 기필코 LGA컴퍼니로 끌어들이려 한 다른 이유. 그가 소설피아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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