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대감집 막내손자
* * *
―이번 역은 강남. 강남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판교, 정자 방면으로 가실 고객님께서는 이번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타시기…….
“잠시만요, 내리겠습니다.”
“아, 정말. 밀지 좀 마세요. 다들 이번 역에서 내리거든요?”
“……예, 죄송합니다.”
지하철 문이 열리기 전.
조금이라도 빨리 내리기 위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앞 사내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진정하자 정우야. 이건 팬 미팅이 아니라 작가 계약이니까.’
차를 집에 두고 굳이 지옥철을 타고 이동하는 건 LGA컴퍼니 임원진 미팅이 끝난 후 한태산 작가에게 보낸 컨택 쪽지 답장이 바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낸 컨택 제안에 한태산 작가는 내게 곧장 답변을 보내왔다. 자신의 회사 근처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볼 수 있냐면서.
“내, 내립니다!”
“밀지 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태산 요청한 미팅 시간은 오후 7시.
퇴근 시간에 차를 끌고 왔다면 까딱하다가 2시간도 더 걸렸을 터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타고 온 지금도 마냥 여유있는 건 아니었다. 합정에서 강남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만 40분 가까이 걸렸으니까.
“잠시만…… 잠시만요!”
“아, 뭐야 진짜?”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나는 체력장을 떠올리며 계단을 두세 걸음씩 뛰어올라 11번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후우, 허억, 헉.”
가뜩이나 사람이 많은 강남.
거기다 하필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다.
하지만 불금을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열정만큼 한태산 작가를 만나기 위한 내 열정 또한 이글거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11번 출구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5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후우……. 그럼 가볼까?”
강남역 11번 출구 밖으로 나오니, 한태산 작가가 말한 것처럼 포장마차가 즐비한 골목이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서울.
그 중심에 있는 강남역 한복판에 있는 포장마차라니.
거대한 마천루들 사이에 널브러진 플라스틱 의자들이 자아내는 광경이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길거리 포차 안에서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었지만, 내게 이곳은 작가의 계약을 따내야만 하는 전쟁터였으니까.
뚜벅— 뚜벅—
포차 안으로 발걸음을 한걸음 또 한걸음 옮기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귓가엔 내 발자국 소리 그리고 터질 듯이 쿵쾅대는 심장 고동 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는 매콤한 냄새의 닭볶음탕을 올려놓고 허리를 기울여 폰을 보고 있는 중년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LGA컴퍼니 판무 레이블 드래곤의 박정우 매니저라고 합니다. 혹시 한태산 작가님 맞으실까요?”
“……아? 오셨군요. 하하, 반갑습니다. 한태산입니다.”
학자를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중년 사내.
한태산이 건넨 손을 잡자 형언할 수 없는 찌르르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흘러들었다.
단순히 작품 성적으로만 따지자면 한태산 작가는 강추강 작가의 나 혼자만 상하차나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366일을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한태산 작가의 ‘대감집 막내손자’는 내가 손에 꼽는 인생 작품 중 하나. 그중 웹소설 현판 장르에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강추강 작가나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만났을 때와 달리 잔뜩 밀려드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어이구, 별말씀을요. 퇴근 시간도 지났는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죠. 자리에 앉으시죠.”
“예, 작가님.”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넨 명함을 받은 한태산은 내게 손짓으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회사가 근처라 먼저 와서 주문만 해 뒀어요. 노상 포차라 허름해 보이지만, 나름 맛집이어서 시간이 조금만 더 늦으면 자리가 아예 없거든요. 닭도리탕 좋아하십니까?”
“물론이죠. 없어서 못 먹습니다, 작가님.”
“하하, 잘됐네요.”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한태산이 국자로 음식을 떠주기 시작했다.
“작가님 먼저 드시―”
“아이고, 괜찮습니다. 국물이 졸아서 저는 먼저 떴어요.”
“감사합니다.”
한태산 작가가 직접 떠 준 황송한 닭볶음탕을 받아 자리에 내려놓는 그때. 그의 말이 곧장 이어졌다.
“매니저님이 보내주신 계약 제안 보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마치 재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더군요,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굵직굵직한 권별 플롯을 다 짜줘서 이대로 그냥 쓰기만 하면 될 것 같던데요? 아직 계약도 하기 전인데 이렇게 퍼 주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퍼 주기는 무슨.
내가 한 일이라곤 작가님이 원래 썼던 글의 플롯을 그대로 정리해서 전달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작가님. 저희 드래곤과 계약을 해주시던, 안 해주시던 제가 드린 아이디어는 오롯이 작가님을 위한 것입니다. 작가님의 전작을 모두 즐겁게 읽은 독자이자 팬으로서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흠, 그래요? 부담 없이 받기엔 너무 큰 선물이긴 한데. 그리고 대가 없는 선물은 없는 법이죠.”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한태산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나란 사람을 파악하려는 듯이.
“말씀드렸다시피 작가님의 팬으로서 드리는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굳이 대가를 말하자면 당연히 작가님과의 계약이겠죠.”
한층 또렷해진 한태산의 시선을 받아내며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이제 본 게임의 시작이다.
“제가 기억하기론 전작까진 카리오스와 계속 계약을 유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아직 카리오스와 계약을 유지 중이신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다른 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서 드래곤과 바로 계약하겠다는 건 아니죠. 아직 조건을 듣기 전이니까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었지만, 철저하게 손익을 따지고자 하는 한태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권미현의 리스트 속에서 한태산의 이름을 보고 바로 선인세 5억에 계약금 1억을 부른 나였지만, 작가와의 계약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선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기 전까진 내 패를 먼저 꺼내지 않는 게 국룰이다.
거기다 한태산에게 계약 제안을 보냈을 때 나는 대감집 막내손자의 추후 전개 방향과 함께 계약 조건은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다고만 한 상황. 그렇기에 우린 서로 슬쩍슬쩍 간을 보는 것일 테다.
“맞는 말입니다. 컨택 쪽지를 통해서는 작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을 최대한 맞춰 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한태산이 카리오스는 물론 다른 출판사의 목줄을 차고 있지 않다는 걸 안 이상, 나는 더 이상 간을 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제가 쪽지로 전달드렸던 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작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을 먼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조건을 제가 먼저 제시한다라…… 상부와 의논 없이 매니저님 선에서 협의가 가능한 부분입니까?”
“물론입니다.”
상부와의 의논? 당연히 필요 없지.
내가 BS북이고 LGA컴퍼니이며 에르미스 그 자체니까.
“흠…… 그렇단 말이죠?”
옅은 웃음을 내뱉은 한태산은 휴대용 가스버너의 불을 낮추곤 잠시 고민에 찬 표정으로 눌러 붙기 시작하는 닭볶음탕 바닥을 국자로 휘적였다.
“드래곤이 최근 판무 레이블 중에선 가장 영향력 있고 작가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는 출판사라는 걸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계약 제안은 소설피아나 웹월드 혹은 테일랜드가 아닌 LGA컴퍼니의 자체 플랫폼인 에르미스에서 독점으로 연재를 진행하게 되는 거죠.”
“맞습니다.”
“무례한 말일 수도 있지만, 공모전을 떠나 신생 플랫폼에서 독점 연재를 한다는 게 작가 입장에서는 상당한 리스크이기도 하니까요.”
한태산이 우려하는 점이 어떤 건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을 쉽게 정리하자면 에르미스 공모전에 출품한 게 공모전 상금만 노리고 참전한 거란 뜻이다.
남성향 웹소설이라고 알려진 판무 장르에선 일반적으로 1권 분량인 25화를 전후로 해당 작품의 흥망성쇠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쯤 되면 독자들이 얼마나 따라오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연독 그리고 추천, 댓글 반응 그리고 관심작 수의 지표가 파악이 되니까.
즉, 한태산 작가는 공모전 수상이 될 사이즈가 안 나오면 바로 접을 수도 있다는 뜻을 에둘러 말하는 거다.
“이런 부분을 감안해서 제안을 드리는 거니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르미스가 현재 발군의 성적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신생 플랫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작가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니,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한태산이 언급한 부분은 미리 감안하고 있는 거였기에 딱히 놀랍진 않았다. 에르미스는 소설피아와 같은 독점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
‘독점연재’라는 기준이 각 플랫폼마다 다르긴 하지만 소설피아와 에르미스는 유료화가 된 작품이 101화가 된 시점에 타 플랫폼에 풀 수가 있다.
즉, 말이 독점이란 거지 실제로는 선독점 형태로 100화까지만 우리 플랫폼에 묶어두겠다는 뜻이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테일랜드나 웹월드처럼 완결 회차까지 독점으로 묶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엔 아직까지 에르미스의 이름이 지닌 영향력이 미미하다.
신인 작가만 하더라도 에르미스 독점으로 유료화를 진행하는 게 상당히 두려울 터. 그렇기에 이미 여러질을 쓴 기승 작가인 한태산에게 에르미스 독점 연재를 요청하는 건 상당히 달갑지 않은 제안일 테고.
“제가 원하는 계약 조건은 정산비 8대 2에 선인세 8천만 원 그리고 계약금 100만 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다면 독점 계약을 50화까지만으로 묶어 주실 수 없을지 요청드리고 싶군요.”
“음……. 작가님 술 한잔 하시면서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하하, 좋죠. 닭도리탕이 안주인데 사실 술이 없어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원래 술을 먼저 권하는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술은 주문하지 않았는데 한태산 작가의 앞 그리고 내 자리에 놓여있는 소주잔.
그리고 말을 이어 가는 한태산 작가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니 굳이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쓰지 않더라도 한태산은 소주 한 잔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말을 들으면 술이 더 당길 테고.
“이모님, 소주 늘 마시던 걸로 부탁드립니다.”
“빨간 뚜껑 맞죠?”
“하하, 예. 감사합니다.”
이곳이 그의 단골집이었는지, 한태산의 말에 종업원이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소주를 우리에게 건넸다.
“제가 따라드리겠습니다, 작가님.”
“하하, 감사합니다.”
한태산의 손을 향해 다가가던 소주병을 냉큼 낚아챈 뒤 나는 공손히 그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에르미스 독점 계약 작품의 경우 소설피아와 동일하게 100화까지는 연재를 해주셔야 합니다.”
“음…… 그렇군요. 일단 매니저님도 한 잔 받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묻어난 채로 한태산이 내 잔을 채우기 시작할 때 쯤, 나는 그를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대신 선인세는 작가님이 말씀하신 금액의 6배 그리고 계약금은 100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산률은 9 대…… 작가님?”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잔은 흘러 넘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