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59화 (159/201)

159화 ― 수정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 * *

“로판 번역은 해외에서 인기를 얻기 어렵다는 건가요?”

“네, 정확히 말하자면 독자들이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죠.”

“로판이면 배경 자체가 전반적으로 중세 유럽이 모티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오히려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이어진 내 대답에도 권미현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실 만도 하죠. 하지만 로판의 배경이 대부분 중세 유럽을 참고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많이 어색해 보일 겁니다.”

“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권미현과 달리 단풍 삼촌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옅은 탄성을 흘렸다. 나는 권미현을 위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로판 인기작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돌려 번역을 한다고 가정해보죠. 미현 본부장님이 말씀하셨던 ‘잠이 안 오는 황녀님’을 예로 들면, 여주인공인 황녀의 이름은 로밀다 크롬웰 그리고 황녀의 아버지 이름은 알프레도 크롬웰이죠. 그리고 황녀의 원수이자 경쟁자인 친동생의 이름은 클레어 크롬웰입니다.”

“네, 잘 알고 있죠. 로밀다, 알프레도, 클레어는 주연 캐릭터들이니까요.”

이렇게까지 설명을 했지만 권미현은 여전히 이상한 점을 파악하지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잠이 안 오는 황녀님’의 세 주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겠지.

“각 등장인물의 이름의 국가적인 배경이 다 다릅니다. 황제의 이름인 알프레도는 이탈리안계고 주인공인 로밀다는 독일계죠. 심지어 여동생 클레어는 프랑스계고요.”

“아…… 이름의 배경이 아예 다 다르네요?”

이제야 내 말의 의도를 간파한 권미현이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죠. 잠이 안 오는 황녀님 작중에서 보면 알프레도 황제는 단 한 명의 부인에게서 로밀다와 클레어를 낳았죠. 참고로 알프레도 황제의 부인인 황후의 이름인 네슬리는 튀르키예 계통이죠.”

“튀르키예요?”

“아, 터키를 잘못 말했네요.”

아직은 터키의 국가명이 튀르키예로 변하기 전이라는 걸 깜빡했다.

“정우 대표님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보지 않았지만 사실 이름뿐만이 아니라 성도 따지고 보니 이상하네요. 황녀 가문의 성이 크롬웰인데 크롬웰은 영국 계통입니다.”

이어진 단풍 삼촌의 설명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배경이 다문화가 본격화된 현대라면 몰라도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세계관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의 혈통으로 묘사된 작품에서 아빠, 엄마, 딸들의 이름 거기다 성까지 다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것부터가 상당히 몰입을 깨게 만듭니다.”

“음…… 한국 로판은 그럼 거의 내수용으로 봐야겠네요.”

모든 로판 작품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을 때 이런 눈엣가시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로판 작품이 이런 고질병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 물론, 판타지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매일 한 화씩, 못해도 주에 5화씩은 연재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일일이 이름의 어원까지 뒤져보며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테고.

“아무래도 그렇죠. 한국 독자분들이 보시기엔 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테지만 번역판을 본 해외 독자들 입장에선 상당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일 테니까요.”

이 부분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만약 외국 작가가 집필한 한국 배경의 소설에서 삼시 세끼 찌개와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한국인이 나온다고 치자.

토종 한국인이자 한 그룹의 회장인 재벌가 아버지의 이름은 김장첸, 우아한 어머니의 이름은 사쿠라 박, 미국에서 엘리트 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아들 김오사마.

그리고 김오사마의 여자친구이자 경쟁 그룹의 차기 후계자인 민지 응우옌이 주연 등장인물로서 함께 하는 소설이, 장엄한 서사와 치밀하고 숨 막히는 연출을 보여준다고 해도 참기름에 간장 넣고 밥 비벼 먹는 게 일상인 한국인들이 과연 소설에 몰입을 할 수 있을까?

김장첸 회장이 아무리 위엄있는 표정을 짓는다는 서술이 있어도, 회장 부인 사쿠라 박이 아무리 복수의 칼날을 감춘 섬뜩한 모습을 보여도, 김오사마와 민지 응우옌이 로맨틱한 춤을 추더라도 어지간한 필력이 아니면 개그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다.

‘아니 어지간한 필력이 아니라 대문호가 써야 어떻게 승부해볼 만할 테지. 그것도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음…… 앞으로는 로판 작가님들이 주조연 이름 정하실 때 심사숙고 해달라고 따로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권미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언급 정도 해주시면 감사하죠. 중세 유럽 배경의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최소 같은 가문이나 황실 가족들의 이름은 작가님께서 다른 의도를 염두해 쓰신 게 아닌 이상은 검토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생각해보니 말이 나온 김에 이것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로판 작가님, 중세 판타지물을 쓰시는 작가님들께 이왕 안내드리는 거면 호칭 관련해서도 함께 전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처음 계약 진행할 때요.”

“호칭이요?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권미현이 내 말을 받아 적겠다는 듯이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성하고 이름의 순서를 혼동해서 사용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제국을 예로 들어보죠. 거기서도 알리사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한국형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보자면 겨울제국 같은 세계관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영화에선 알리사 공주가 아닌 그녀가 사는 지역명 즉, 에덴버그의 공주 그리고 알리사가 여왕이 된 후에는 에덴버그의 여왕님 혹은 에덴버그의 알리사 여왕님을 뵙는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한국의 중세 판타지 배경의 웹소설을 보면 알리사 공주님, 알리사 여왕님같이 지역명이나 성 대신 대뜸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호칭 부분은 특히 중세 배경으로 처음 집필하시는 작가님들껜 미리 언급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강제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 그대로 유지하시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요.”

“네, 대표님. 그렇게 전달하도록 할게요.”

사실 이것 말고도 로판 장르와 중세 배경 판타지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들에게 해줄 조언은 많다.

흔히 한국형 중세판 웹소설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오등작의 체계로 계급이 분류된다. 다만 이 다섯 등급의 작위 구분은 유학자들이 주나라 때 사용된 호칭들을 도식화하고 서열순으로 정의한 것. 그렇기에 중세 유럽 배경의 귀족 계급과는 차이가 있는 편이다.

특히 백작과 남작 사이의 계급으로 흔히 사용되는 Viscount(자작)의 경우엔 봉토를 소유한 귀족이라기 보다 백작을 보좌하는 직위다.

하지만 한국형 중세 배경 웹소설에는 자작이 가문을 따로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작가님들께 이런 피드백을 드린다고 해도 한국 독자들이 주로 보고 어차피 마법 나오는 판타지 소설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터.

물론, 한국을 타겟으로만 삼는다면 문제는 없을 테다. 하지만 무협 장르에서 소림사 승려들이 아이를 낳고, 한국 배경의 대체역사 소설에서 내시들이 배필을 맞이해 자신들만의 가문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집필을 한다면 독자들의 몰입감을 방해하는 요소일 것은 분명하다.

‘이 내용을 고지해도 작가님께서 그대로 쓰시겠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작품의 평가는 결국 독자로부터 받는 거니까.’

사실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집필 중에 이름이나 호칭을 바꾸기는 상당히 어려울 테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가상의 자식과도 같은 존재.

몇 날 며칠을 고심해서 만든 주인공과 주인공 가족의 이름이 각각 영국계, 독일계, 이탈리안계, 프랑스계라 하더라도 이미 정이 붙을 대로 붙은 상황일 테니 수정하기는 어려울 테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늘 느끼는 거지만 소설을 쓰는 건 어렵다.

하지만 수정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 * *

어느덧 4월 말에 접어들었다.

거리를 밝게 수놓았던 벚꽃들이 바닥을 적신 오늘은 4월 23일 토요일이다.

“설거지 내가 해도 되는데, 그냥 두지.”

“괜찮아요. 먹고 바로 안 치우면 벌레 생길 수도 있잖아.”

어제 퇴근을 마치고 토요일 저녁이 된 오늘까지 지연이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별함이 없는 하루이지만 지연이와 둘만 있는 이 순간 자체가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 티비 설치 거의 다 끝났으니까. 마무리만 하고 도와줄게.”

“괜찮아, 나도 다 했어.”

지연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는 오늘 점심때 지연이와 같이 사 온 텔레비전을 설치 중이다. 그동안 텔레비전 없이 살아왔던 건, 그동안 워낙 바쁘게 살아와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었던 것뿐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규 방송에 나오는 드라마나 예능 등, 이미 전생에서 봤거나 알던 내용이기에 내겐 딱히 새롭지 않았으니까.

“휴우, 설치 다 끝났네.”

“고생했어요. 여기 주스, 목마르지?”

“나는 다른 거 마시고 싶은데.”

“응? 어떤 거? 물?”

“아니, 지연이 입술.”

“아, 뭐야아.”

텔레비전 설치가 끝난 내게 주스를 건넨 지연이에게 장난스러운 키스를 건넨 후, 우리는 침대에 앉았다.

“설치가 안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고생 많았어. 그래도 방영 시간 놓친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게, 정말 다행이네.”

정규 방송에 어떤 드라마가, 예능이 나올지 이미 다 아는 내가 갑작스럽게 텔레비전 설치를 한 건 오늘이 바로 코즈일 필명으로 집필했던 두 번째 작품이었던 ‘인턴사원 회상님’의 드라마 첫 방영일이기 때문이다.

총 20부작으로 제작이 확정된 인턴사원 회장님은 제작 당시부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BS북으로 계약했던 원작을 LGA컴퍼니로 이관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년 6월에 판권 계약이 완료되었지만, 지금은 열심히 콩밥을 먹고 있을 희대의 성범죄자 양아치 전진철이 주연에 낙점돼 놈을 하차시키는 것만 해도 상당히 애를 먹었으니까.

“정우야, 시작해!”

“응, 시작한다.”

인턴사원 회장님이 곧 방송한다는 말과 제휴사들이 적힌 내용 그리고 광고가 연달아 나온 후 감미로운 배경음과 함께 주조연 배우들의 모습이 담긴 오프닝 화면이 흘러갔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나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주인공의 배역을 맡은 배우의 내레이션이 독백처럼 흘러나오며 시작된 본편이 시작됐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평생을 돈만 바라보며 살아온 회장. 그리고 뒤늦게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후회하던 그가 인턴 시절로 회귀하며 벌어지는 내용이 이어졌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모습.

그의 과거는 내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 그리고 나 또한 회귀 전엔 후회만 가득 남겼었다.

활자의 세계 속에 창조해 냈던 그가 브라운관 속에 새롭게 탄생한 모습. 그리고 다시 얻게 된 두 번째 삶에 감사하며 이제 두 번 다시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모습이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다잡게 한다.

“으응? 왜?”

말없이 꽉 잡은 손에 내 어깨에 기댄 지연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나는 미소 지을 뿐이다.

“그냥, 고마워.”

다시 얻게 된 두 번째 기회.

남들은 얻지 못한 다신 없을 기회임을 상기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본다.

지금의 행복 그리고 앞날의 행복을 이어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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